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t/view.do?levelId=ht_001_0040_0020
2) 백제 온조⋅비류 설화를 이해하는 몇 가지 논점들
주제로 본 한국사 > 한국의 건국 신화 읽기 > 3. 백제의 온조⋅비류 설화 읽기
▣ 온조의 아버지는 주몽일까, 동명일까
이제 백제의 건국 시조에 대해서 조금은 다른 방향에서 접근해 보자.
앞에서 온조와 비류가 주몽의 아들인지, 우태의 아들인지를 따져 보면서, 사실 건국 설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이 두 시조 계보에 대한 인식이 모두 있었다는 사실임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온조와 비류가 실제 형제라기보다는 두 연맹 세력의 존재와 그 통합 과정을 반영한 설화적 형태라는 점도 살펴보았다. 다시 말해서 다른 건국 설화도 마찬가지지만, 건국 설화의 내용 그대로가 역사적 사실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온조 전승의 경우, 실제 백제인이 자신들의 시조가 고구려 시조 주몽의 아들이라는 시조 전승을 갖고 있었는지 여부도 다시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백제와 고구려는 4세기 후반 이후 7세기 초까지도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던 적대 국가였기 때문이다. 370년 백제 근초고왕의 평양성 공격으로 고구려 고국원왕이 전사한 뒤로 고구려는 백제를 원수의 나라로 간주했다. 반대로 474년 고구려 장수왕의 한성 공격으로 개로왕이 살해당하고 5백여 년 동안 나라의 터전이었던 한강 유역을 잃은 뒤로는, 백제 역시 고구려에 대한 복수심을 감추지 않았다. 이렇게 오랫동안 백제와 고구려가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상황에서, 과연 백제인이 자신들의 건국 시조를 적대 국가 시조의 아들로 인식하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실제로 현재의 온조 전승 그대로 온조가 주몽의 아들이었다 하더라도,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까지 계속 이러한 내용을 건국 설화에서 강조할 필요가 있었을까. 특히 건국 설화는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 왕실의 신성성과 존엄성을 강조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의심을 품게 된다.
그런데 백제의 다른 건국 설화를 보면 또 다른 가능성을 찾아볼 수도 있다. 다음 자료를 살펴보자.
〔사료 3-2-01〕 『속일본기(續日本紀)』 소재 백제 시조 관련 내용
백제의 먼 조상[遠祖]인 도모 대왕(都慕大王)은 하백(河伯)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하여 태어났다(『속일본기(續日本紀)』 연력(延曆) 8년 12월).
무릇 백제의 태조(太祖) 도모 대왕(都慕大王)은 태양신이 몸에 내려온 분으로 부여에 머물러 나라를 세웠다. 천제(天帝)가 녹(籙)을 내려 모든 한(韓=삼한)을 통솔하고 왕을 칭하게 하였다(『속일본기(續日本紀)』 연력(延曆) 9년 7월).
위의 두 자료는 모두 일본의 『속일본기(續日本紀)』라는 역사책에 기록된 내용으로, 백제의 시조로 도모(都慕)를 들고 있다. 도모는 『삼국사기』 등에 전하는 온조와 비류와는 전혀 다른 이름이다. 그런데 간략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부여의 동명 설화 혹은 고구려 주몽 설화의 내용과 매우 흡사하다. 도모(都慕)는 일본식 발음으로는 고구려 시조인 추모(鄒牟)와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같은 인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특히 하백녀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고구려의 주몽 신화와 그 맥이 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일본의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을 보면, 백제의 시조인 도모(都慕)와 고구려의 시조인 추모(鄒牟; 주몽(朱蒙))는 명확히 구분되고 있다. 이는 단지 명칭상의 차이만이 아니라, 실제로 당시 고구려나 백제계 유민들 사이에서 고구려 시조와 백제 시조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었음을 반영한다. 즉 9세기까지만 해도 고구려나 백제 유민들은 서로 다른 독자적인 시조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위 『속일본기』에 전하는 ‘도모’라는 백제의 시조는, 주몽보다는 부여의 시조로 전해지는 ‘동명(東明)’과 연결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특히 부여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내용을 보아 동명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즉 백제의 시조가 동명(東明)이라는 또 다른 시조 전승을 확인할 수 있는 셈이다. 물론 고구려의 건국 시조인 주몽 또한 ‘동명성왕’으로 불렸듯이 동명과 주몽은 동일인이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 도모 전승 또한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 백제 시조와 혈연적으로 연결되는 내용의 온조 전승과 밀접히 연관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고구려의 건국 설화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동명과 주몽이 다른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동명은 부여의 시조이고, 주몽은 고구려의 시조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몽 또한 동명성왕으로 시호가 칭해졌다는 것은 ‘동명’이 특정 인물을 가리키기보다는 부여족이 세운 나라에서는 각각의 건국 시조를 모두 ‘동명’이라 부르는 범칭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백제에서도 건국 시조 내지는 건국 시조의 계보로서 동명에 대한 숭상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즉 백제의 시조 전승 자료에도 동명과 관련된 기사가 보인다. 백제 시조 전승을 전하는 『고전기(古典記)』라는 역사책의 일부 기사가 전해지는데, 이 책에는 온조의 아버지가 ‘주몽’이 아닌 ‘동명왕(東明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 남부여(南扶餘) 조에도 『고전기』를 인용한 기사에서 “시조 온조는 동명의 셋째 아들이다(始祖溫祚乃東明三子).”라는 구절이 보인다. 이 『고전기』 기사는 현재 전하는 온조 전승으로서는 가장 오래 된 전승이다. 따라서 본래 백제 측 전승에는 온조의 아버지가 ‘주몽’이 아닌 ‘동명’으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실제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동명 묘(東明廟)를 설치하고 동명 묘에 제사를 지내는 기사가 여럿 등장한다. 이런 기록은 백제의 시조가 동명이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앞서 『수서』와 『북사』의 백제전에서 보듯이 늦어도 사비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는 부여의 동명 신화와 관련된 전승이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전해지는 시조 전승은 고구려 시조 주몽의 아들인 온조와 비류에 의한 건국 설화로서, 동명 신화와는 그 구조가 전혀 다르다. 고구려의 주몽 전승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동명 신화와 전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백제의 건국 설화 자체는 동명 신화의 구조와는 전혀 다르다. 그렇다면 백제의 건국 설화에는 동명 신화적 요소가 없었을까.
본래 온조 전승과 비류 전승 등이 동명 신화적 요소를 갖추고 있었던 흔적은 현재 전하는 내용에서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예컨대 온조 전승에 보이는 바와 같이 부여 왕에게 세 명의 딸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세 딸은 『구삼국사』 동명왕 본기에 보이는 하백(河伯)의 세 딸을 연상시킨다. 또 비류 전승의 소서노(召西奴)는 주몽 전승에 보이는 주몽의 어머니인 하백의 딸 유화(柳花)와 그 성격이 유사한 지모 신(地母神)적인 존재이다. 백제 본기 온조왕 17년 조에 “묘(廟)를 세워 국모(國母)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라는 기사를 보면, 본래 고구려 주몽 설화의 유화(柳花)와 비슷한 존재가 온조 전승에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백제에도 원래 독자적인 동명 신화가 있었음을 추정하게 하는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백제에서도 고구려의 주몽 전승에 연결되는 형태가 아니라, 독자적인 동명 신화를 갖고 있었을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앞의 『속일본기』에 전해지는 두 기사를 보면 백제의 시조 도모 전승도 부여의 동명 신화나 고구려의 주몽 신화에 나타나는 천신(天神; 일신(日神))과 지신(地神; 하백녀(河伯女)) 신앙의 내용성을 두루 갖추고 있었음을 단편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다. 이는 현존하는 온조 전승이나 비류 전승의 구조와는 다른, 백제 독자적인 건국 신화로서의 동명 신화라는 존재를 짐작하게 한다. 바로 이 도모가 백제 본기에 나타나는 시조 묘(始祖廟)의 대상인 동명(東明)일 것이다.
고구려에서 부여의 동명 신화 구조를 빌려 건국 전승으로서 주몽 설화를 만들었던 것처럼, 백제에도 건국 시조는 동명[도모]이라는 건국 설화가 성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부여족이 이동하여 각지에서 나라를 세우면서 부여족 본래의 건국 설화인 동명 신화가 다시 생성되는 과정에서, 백제에도 동명 신화가 등장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본래 백제에도 건국 시조로서의 동명에 대한 신화가 있었다 하더라도, 역사적인 변천 과정에서 부여 시조로서의 동명에 대하여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졌다. 대외 관계 자료를 볼 때 5세기 이후의 백제는 부여계 국가 내지는 부여국의 계승자라는 인식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인상을 준다. 백제 왕실의 성씨를 부여씨(夫餘氏)라고 하였다는 점이나, 후기의 일이지만 성왕(聖王)이 사비로 도읍지를 옮긴 이후 나라 이름을 ‘남부여(南扶餘)’로 칭하였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 준다. 따라서 일찍이 건국 시조로서 동명을 내세웠던 부여국(夫餘國)이 4세기 후반에 멸망하자 백제가 그 뒤를 이어 부여의 계승자임을 강조하는 시조 설화가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당시 백제는 대외적으로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광개토왕의 공격으로 아신왕 때 항복하는 수모를 당하였는데, 아마도 이 무렵에 북부여의 정통성을 표방하는 고구려의 건국 신화인 주몽 신화가 백제에 전해졌을 것이다. 이 무렵 부여나 고구려와 유사한 동명 신화를 갖고 있었던 백제는 부여의 멸망과 고구려의 부여 복속이라는 상황하에서, 백제 시조의 혈연적 정통성을 부여의 시조인 동명과 연결시키는 시조 설화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고구려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백제로서는 부여의 직접적인 계승의 표방이 더욱 절실하였을 것이다. 부여의 계승 국가라는 인식을 대내외적으로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형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대략 그 시기는 5세기 초 이후로 추정되는데, 개로왕이 북위(北魏)에 보낸 표문(472)에서 “백제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로부터 나왔다.”라고 말한 것은, 이미 동명과 온조로 나뉜 새로운 시조 전승을 확립한 이후의 관념이 반영된 주장으로 해석된다. 새로운 시조 전승이 확립된 시기는 일단 개로왕(455~474) 대로 추정된다.
▣ 동명에서 주몽으로
현재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전해지는 온조 시조 전승이나 비류 시조 전승은 모두 고구려 시조인 주몽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앞서 고구려의 건국 신화 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주몽 신화의 국내 전승 계통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주몽 신화와 『동명왕편』에 전하는 「구삼국사」의 주몽 신화 등 두 계통이 있다. 그런데 「구삼국사」에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보이는 주몽의 도읍지인 ‘졸본(卒本)’이라는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즉 고구려 본기의 편찬자가 참고한 자료 중에는 「구삼국사」와는 계통이 다른 「고기」류의 존재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현전하는 백제의 온조 전승나 비류 전승에도 ‘졸본(卒本)’이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구삼국사」가 의거한 고구려계 전승 자료에도 나타나지 않는 ‘졸본’이라는 명칭이 백제의 시조 전승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의구심을 갖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자료를 통해 현 백제의 시조 전승이 고구려의 주몽 신화와 긴밀히 연관되어 정리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면모는 비류 전승에 잘 나타나는데, 고구려 본기의 주몽 신화와 일치하는 주몽의 어머니 예씨(禮氏)와 주몽의 아들 유류(孺留) 등의 인물이 등장하며, 고구려의 건국 연대 등도 밝히고 있다. 이런 예들은 어느 시기엔가 백제와 고구려의 시조 전승이 한꺼번에 정리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렇게 볼 때 현재 전해지는 온조 전승과 비류 전승에 나타나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본래 동명(東明)이었는데,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 이후 어느 시기엔가 양국의 역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주몽=동명이라는 후대인의 선입관으로 백제의 동명이 고구려의 주몽으로 바뀌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백제의 건국 설화에 보이는 고구려 시조 주몽의 존재는 백제의 동명 신화로서 검토해야 할 것이다.
이때 주목되는 것은 온조와 비류의 선대(先代) 계보이다. 즉 주몽을 동명으로 치환해 보면, 동명-온조⋅비류 계보와, 북부여 왕 해부루(解扶婁)-우태(優台)-온조⋅비류라는 양대 계보가 나온다. 여기서 북부여 왕 해부루의 존재는 고구려의 주몽 신화에서도 볼 수 있는 인물이다. 이러한 점에서 백제 시조 전승의 계보와 동명 신화는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와 고구려의 시조 전승 모두에서 해부루의 계보가 등장한다면, 본래 동명 신화의 원형에서도 해부루의 존재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 백제 건국의 배경
위의 온조 전승과 비류 전승을 보면 내용에서 서로 일정한 차이는 있지만, 백제 건국기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들이 반영되어 있다. 부여⋅고구려 방면에서 한강 유역으로 다수의 주민들이 이동했다는 사실, 그리고 한강 유역에 여러 집단이 공존하다가 하나의 정치 체제 속으로 통합되었다는 사실 등등을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백제는 한반도 중심부의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급성장하였다. 특히 온조의 위례 집단과 비류의 미추홀 집단의 결합은 그 팽창 속도를 가속화하였다. 본래 온조나 비류 집단이 등장하던 기원전 1세기 말의 한강 하류 지역은 마한의 세력권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백제도 마한의 여러 소국 중 하나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주변의 여러 소국들을 병합해 나가면서 백제는 한강 하류 일대에서 연맹체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백제의 성장 과정은 그 국호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기록상 백제는 나라 이름을 몇 차례 바꾸었으며, 여러 가지 별명들도 전한다. 『삼국사기』에 처음 나오는 백제의 국호는 ‘십제(十濟)’이다. 그러다 온조왕(溫祚王)이 형인 비류(沸流)가 다스리던 백성을 합쳐 더 큰 나라를 만들 때 비류의 백성들이 모두 즐거워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는 설명이 있다. 한편 중국 측의 역사서인 『수서(隋書)』 백제전에는 처음에 백여 호(戶)가 바다를 건너[百家濟海] 남하하여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백제라 하였다고 씌어 있다. 백제의 국호에 대한 삼국사기와 수서의 설명 가운데 어느 쪽이 맞는지는 아직 가려내기 어렵다.
한편 중국의 진수(陳壽)가 3세기 후반에 편찬한 역사서 『삼국지(三國志)』에도 마한(馬韓)에 속한 54개 소국의 이름을 열거하는 가운데 ‘백제국(伯濟國)’이라는 국호를 적어 놓은 대목이 있어 눈길을 끈다. ‘백제(伯濟)’와 ‘백제(百濟)’는 한자만 약간 다를 뿐 같은 음(音)으로 된 글자이다.
즉 양자의 관계로 보아 『삼국지』의 백제국을 백제의 초기 단계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서기 720년에 편찬된 역사서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위례국(慰禮國)'이라는 명칭이 나오는데, 이는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한 백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고대에는 도시 명칭 그대로를 나라 이름으로 사용하는 예가 적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위례국이라는 이름도 백제라는 국호보다 앞선 시기의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
백제국이든 위례국이든 혹은 십제이든 서울 지역에는 이들이 나라를 세웠던 흔적들이 뚜렷이 남아 있다. 우선 백제 유적 중에서 부여⋅고구려 방면으로부터의 문화적 영향을 보여 주는 것으로는 한강 유역의 고분군을 들 수 있다. 특히 석촌동⋅가락동 일대의 토광묘와 적석총들은 백제의 건국자 집단과 깊이 관련된 것으로 알려지는데, 근자에 도시 개발 등으로 많은 고분들이 파괴되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수십 기의 적석총이 석촌동 일대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사적 제243호로 지정된 3호분과 4호분은 기원 전후해서부터 나타나는 고구려 무덤 형식인 기단식 적석총이다. 특히 4호분의 축조 방식은 고구려의 적석총과 연관이 있는데, 백제 전기에 활발했던 고구려와의 문화 교류 증거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 일대의 백제 고분군에는 3호분과 같이 대형 왕릉급 고분이 있는가 하면, 소형 토광묘처럼 일반 관리나 평민의 것으로 보이는 고분들도 있고, 서로 다른 시기의 무덤들이 중복된 경우도 많아 석촌동 일대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신분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사용했던 고분군 지역으로 볼 수 있다.
석촌동 적석총 1호분 출처: 문화재청
석촌동 적석총 2호분 출처: 문화재청
석촌동 적석총 3호분 출처: 문화재청
석촌동 백제 초기 적석총 발굴 장면 출처: 문화재청
다음 도성 유적으로는 오늘날 서울시 송파구에 남아 있는 풍납 토성(風納土城)과 몽촌 토성(夢村土城)을 들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백제의 도성으로는 위례성(慰禮城), 한성(漢城) 등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백제의 건국 설화에 나오는 초기 도성, 곧 하남 위례성이 정확히 지금의 어느 곳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현재 남아 있는 유적 등을 종합해 볼 때 이른바 풍납 토성이 하남 위례성이었을 개연성이 가장 높다.
풍납 토성은 원래 전체 둘레 3.5km의 방형 내지 타원형의 평지 성이다. 홍수와 도로⋅주택 등의 건축 공사로 인하여 대부분 파괴되면서 지금은 동벽과 북벽의 극히 일부분만 남아 있지만, 성벽의 높이는 대체로 10m를 훨씬 넘으며, 성벽 가장 아랫부분의 현재 폭은 30∼40m에 달할 정도여서 백제 최대의 토성이라고 할 만하다. 서북쪽으로는 한강 건너편의 아차 산성이 바로 올려다보이며, 동쪽으로는 멀리 이성 산성과 마주한다. 남쪽으로는 약 750m 정도 떨어져 있는 몽촌 토성과 평지로 연결된다. 몽촌 토성을 지나 조금 더 내려가면 3㎞ 이내에 방이동⋅가락동⋅⋅석촌동 고분군과 만나게 된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서 건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부터 백제의 도성으로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자주 나타나는 이름이 한성(漢城)이다. 백제가 도읍을 옮긴 것인지, 아니면 도성의 이름만 중국식으로 바꾼 것인지는 분명히 가릴 수 없지만, 풍납 토성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 한성은 남성(南城)과 북성(北城)을 합한 이름이었다는 것이 『삼국사기』 백제 본기의 설명이다. 따라서 북성을 지금의 풍납 토성, 그리고 남성을 지금의 몽촌 토성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만약 백제의 한성이 지금의 풍납 토성과 몽촌 토성을 합한 것이 틀림없다면, 그 일대의 지형 조건을 감안할 때 중심 시가지는 풍납 토성의 내부 또는 그 동쪽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외에 삼성리 토성(三成里土城; 강남구 삼성동), 사성(蛇城; 강동구 하일동 강안 추정)과 수석리 토성(水石里土城; 구리시 수석리), 아차성(阿且城; 광진구 광장동) 등은 백제의 도성 방위를 위해 강안에 쌓은 성으로, 백제 당시 고성의 모습을 짐작하게 하는 유적이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거의 훼손되어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풍납 토성 출처: 문화재청
몽촌 토성 출처: 문화재청
몽촌 토성 목책 출처: 문화재청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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