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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수서』 열전 45 백제 조
주제로 본 한국사 > 한국의 건국 신화 읽기 > 3. 백제의 온조⋅비류 설화 읽기 > 1) 백제 온조⋅비류 설화 전승 자료와 내용
▣ 또 다른 시조인 구태
그런데 백제의 건국 설화에는 위의 온조 전승 및 비류 전승과는 또 다른 시조 전승이 전해진다. 『수서(隋書)』 등 중국 측의 역사책에 전해지는 구태(仇台) 시조 전승이 바로 그것이다. 이 전승도 살펴보도록 하자.
〔사료 3-1-03〕 『수서』 열전 45 백제 조 – 구태 시조 전승
㉮ 백제의 조상은 고려국(高麗國)으로부터 나왔다. 그 나라의 국왕에게 한 시비가 있었는데, 갑자기 임신을 하여 왕이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시비가 말하기를 “달걀같이 생긴 것이 나에게 내려와 닿으면서 임신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자 그냥 놓아주었다. 뒤에 드디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뒷간에 빠뜨려 놓아 두었으나 오래도록 죽지 않았다. 왕이 신령스럽게 여겨 기르도록 명령하고 이름을 동명(東明)이라고 하였다. 장성하여 고려 왕이 시기를 하므로, 동명은 두려워하여 엄수(淹水)로 도망하였는데, 부여(夫餘) 사람들이 그를 받들었다.
㉯ 동명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자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그는 대방(帶方)의 옛 땅에 처음 나라를 세웠다. 한의 요동 태수 공손도(公孫度)가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 뒤 나라가 점점 번창하여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처음에 백가(百家)가 건너왔다[濟]고 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불렀다…… 시조 구태의 사당[廟]을 도성 안에 세우고 해마다 네 번씩 제사를 지낸다.
㉮ 百濟之先, 出自高麗國. 其國王有一侍婢, 忽懷孕, 王欲殺之. 婢云有物狀如雞子, 來感於我, 故有娠也, 王捨之. 後遂生一男, 棄之廁溷, 久而不死. 以爲神, 命養之, 名曰東明. 及長, 高麗王忌之, 東明懼, 逃至淹水, 夫餘人共奉之. ㉯-① 東明之後, 有仇台者, ② 篤於仁信. ③ 始立其國于帶方故地. ④ 漢遼東太守公孫度, 以女妻之. 漸以昌盛, 爲東夷强國. ⑤ 初以百家濟海, 因號百濟. …… 立其始祖仇台廟於國城, 歲四祠之. (『수서』 권 81 백제전)
위 구태 전승의 내용을 보면 앞서 살펴본 온조 전승이나 비류 전승과는 그 내용이 매우 다름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구태라는 시조의 이름부터가 온조, 비류와는 전혀 다르다. 시조의 이름이 다르다는 것은 시조로 받들어지는 인물 자체가 달랐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백제에 또 다른 시조로 추앙되는 존재가 있고, 그가 새로운 왕실의 존재를 추적할 수 있는 단서가 될지도 모르겠다. 위 구태 전승을 보면 구태라는 시조 이름 외에도 온조나 비류 전승과는 다른 내용들이 많기 때문에, 이 구태 설화에 대해서는 좀 더 차근차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구태 전승의 내용을 온조⋅비류 전승과 비교해 가며 하나씩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구태 설화의 앞 부분에 등장하는 동명 신화이다. 하지만 동명 신화는 따지고 보면 백제의 건국 설화와는 무관하며 내용상으로는 오히려 부여(夫餘)의 건국 신화에 해당한다. 그런데도 앞 부분에 동명 신화가 서술되어 있는 것은 백제의 건국 시조인 구태(仇台)가 부여의 시조인 동명(東明)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즉 백제는 부여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동명 신화가 구태 설화의 앞머리를 장식한 것이다.
그런데 이 구태 전승 앞 부분에 실려 있는 동명 신화는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三國志)』나 『후한서(後漢書)』 부여전에 실려 있는 동명 신화와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물론 한 가지 큰 차이점이 있다. 위 『수서』의 기록에는 동명이 고려국(고구려)에서 탈출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백제가 고구려에서 내려온 온조 설화와 서로 통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같은 구태 설화를 기록하고 있는 중국의 역사책 『북사』에는 색리국(索離國)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지』 부여전의 동명 신화를 고려한다면 색리국이나 고리국이 옳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수서』의 구태 전승에 보이는 고려국은 실제 고구려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고리국을 잘못 표기한 것이다. 아마도 『수서』를 편찬한 역사가들이 발음이 비슷한 고리국과 고려국을 혼동한 것 같다. 이렇게 보면 구태 전승 앞 부분의 동명 신화는 『삼국지』 부여전의 동명 신화를 축약하여 옮겨 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떠한 연유로 『삼국지』 부여전의 동명 신화가 백제 시조 전승의 일부가 되었을까. 물론 『수서』에 전하는 구태 전승의 일부를 구성하는 백제의 동명 신화를 『수서』 편찬 사관들이 자기들 멋대로 일방적으로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제로부터 백제 시조 동명과 관련된 어떤 이야기들이 당시의 중국에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에 동명과 관련해서 아무런 정보도 전해지지 않았는데, 중국 역사책의 백제 시조 전승에 부여의 동명 신화를 임의로 추가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당시 백제로부터 전해진 동명과 관련된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여기에도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 백제가 『삼국지』 등에 전해지는 동명 신화를 자신들 시조 전승의 일부로 정리하여 중국 측에 전하였을 가능성이다. 둘째, 백제가 자신들의 시조인 구태의 조상으로 동명이라는 부여의 시조를 내세웠는데, 이를 전해 들은 중국 측 역사가가 『삼국지』 등에 전해지는 동명 신화를 떠올리고는 이를 구태 전승에 추가 기록하였을 가능성이다. 이 두 가지 가능성 중에서는 두 번째 것이 보다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구태 전승 앞 부분의 내용이 『삼국지』 부여전의 동명 신화와 너무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구태 전승의 앞 부분을 구성하는 동명 신화는, 당시 백제 스스로가 동명의 후예임을 대외적으로 표방하였고, 이러한 정보가 중국 측에 전해지면서 동명 신화가 백제 구태 전승의 일부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구태 전승의 내용에 대하여 검토해 보자. 구태 전승의 내용은 대략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구태(仇台)가 동명(東明)의 후예임〔출자 계보〕.
② 구태의 인품이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음〔시조의 덕성〕.
③ 대방(帶方)의 옛 땅에서 건국하였음〔건국〕.
④ 구태가 요동 태수 공손탁(公孫度)의 딸과 혼인하였음.
⑤ 백제의 국호가 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너왔다는 사실에서 비롯함〔국호〕.
위에서 구태가 요동 태수의 딸과 결혼하였다는 내용은 중국 측 역사가의 착오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삼국지』 부여전에는, 2세기 초에 부여 왕인 위구태(尉仇台)가 요동 태수 공손탁의 딸과 결혼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아마도 『수서』를 편찬한 역사가가 백제 시조 구태라는 이름에서 이 위구태를 떠올렸고, 이 두 사람을 동일 인물로 착각하여 이 이야기를 구태 전승에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 2세기 초 만주 지역에서 부여의 왕으로서 그 행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구태가, 한반도 내의 한강 유역에서 등장한 백제의 시조일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이다.
다음 ③ 구태가 나라를 세운 곳이 대방(帶方)의 옛 땅이라는 내용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이 대방의 옛 땅에서 건국하였다는 기사에 입각하여 대방군, 즉 지금의 황해도나 경기 북부 일대에서 백제가 처음 건국된 것으로 보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 기사를 곧이곧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당시의 백제인들이 자신들의 건국지인 한강 유역을 중국인들에게 설명할 때 어떻게 표현하였을지 생각해 보자. 당시 중국인들의 한반도에 대한 지리 정보는 주로 낙랑군, 대방군 등 과거 자신들이 설치했던 군현의 위치를 통해 이해하고 있었다. 이를 고려하여 백제는 자신들의 건국지를 ‘대방군의 옛 땅[帶方故地]’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6세기 말에 중국의 북제나 수나라가 백제 왕을 ‘대방군공 백제왕(帶方郡公百濟王)’이라는 벼슬로 책봉한 것 역시 백제 구태(仇台) 전승의 정보가 알려진 결과로 짐작된다. 이렇게 본다면 ‘대방 고지’라는 건국지를 근거로 구태 전승이 앞서의 온조 전승(위례성) 및 비류 전승(미추홀)과는 또 다른 건국 전승이라는 견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리고 ② 구태가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篤於仁信).”고 하거나, ⑤백제라는 칭호가 ‘백가제해(百家濟海)’에서 비롯되었다는 표현은 한문식의 세련된 표현이기 때문에 백제 고유의 표현과는 약간 거리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것이 백제인들 스스로의 표현인지, 아니면 백제인들이 전해 준 건국 설화의 내용을 중국의 한문식 표현으로 바꾼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을 근거로 구태 전승이 온조 전승보다 후대에 성립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다음으로 중국 역사책인 『주서(周書)』에 그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 구태(仇台)에 관한 시조 인식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가 중요하다. 일단 그 시기를 구체적으로 밝히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6~7세기 무렵, 백제 사회에 대한 정보가 중국에 유입되면서 당시에 편찬된 역사책에까지 실리게 된 구태 전승은, 당시 백제 사회에서는 널리 공인되고 있던 시조 전승임이 분명하다.
더욱이 구태는 단순히 시조로서 전승될 뿐만 아니라, 당시 백제의 국가 제사 체계에서 차지하는 위상 또한 매우 높은 인물이었다. 『수서』 백제전에는 수도에 시조 묘를 설치하여 1년에 4번 제사를 지낸 것으로기록하고 있다.
▣ 구태는 과연 누구일까
이렇게 백제 말기에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시조 구태가 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국내의 전승 자료를 모은 역사책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두 가지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하나는 국내 전승 자료에서 누락되었을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구태라는 이름이 다른 이름으로 전승되었을 가능성이다.
먼저 전자의 경우를 검토해 보자. 시조의 문제는 곧 왕실 계보의 문제와 직결된다. 다시 말해서 왕계가 전해지는데 그 왕계의 첫머리인 시조가 전해지지 않을 리 없는 것이다. 구태가 6~7세기에 백제 왕실의 시조로 받들어졌다면 그것은 6~7세기의 왕계가 구태계임을 의미한다. 실제 혈통상으로는 구태계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구태를 시조로 하는 형태로 왕실 계보가 정리되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현존하는 백제 본기의 왕계는 단일 왕계로 구성되어 있다. 더욱이 6~7세기에 왕실의 교체는 상정하기 어려우므로, 백제 말기의 왕계 인식은 구태를 시조로 하는 왕계 인식으로 단정하여도 무방하겠다. 현 백제 본기에 보이는 왕계는 백제 말기에 정리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혹 백제 멸망 이후에 정리되었다 하더라도 당시 백제 왕계 내지는 왕실 관련 역사를 정리할 때, 백제 말기의 자료를 전거로 삼았음은 굳이 의심할 필요가 없겠다. 따라서 중국 사서에서 확인되는바, 말기까지 백제 왕실이 시조로 모시던 구태에 관한 기록이 국내 역사 기록에서만 누락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구태가 국내 역사 기록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다. 그 동안 학계에서의 논의도 이 부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렇다면 과연 구태에 해당하는 인물은 누구일까.
현재 가장 많은 동의를 얻는 주장은 백제의 8대 왕인 고이왕으로 보는 견해이다. 즉 ‘구태(仇台)’의 발음을 ‘구이’로 읽고, 고이왕(古爾王)의 ‘고이’와 발음이 유사하다고 보면 그 이름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고이왕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고대 국가로서의 체제를 정비한 왕이기 때문에, 충분히 건국 시조로 볼 만한 인물이라는 점도 설득력 있는 논거가 되고 있다. 그러나 부여 계통의 인명이나 관직명에 붙는 ‘台’는 ‘치’, ‘티’로 읽는 것이 옳기 때문에, 구태는 오히려 ‘구치’로 읽게 되면 고이왕으로 보기 어렵다는 의견을 제기하기도 한다. 오히려 발음상으로는 비류 전승에 등장하는 비류의 아버지 우태(優台)를 더 가깝게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에는 몇 가지 문제점들이 있다. 먼저 구태를 ‘우태’로 보는 비류 전승에서는 우태를 해부루의 계보로 보고 있다. 해부루는 동명과는 다른 인물이므로 구태 전승에서는 동명의 계보인 구태를, 해부루의 계보인 우태와 동일 인물로 보기는 어렵다. 즉 구태 전승과 비류 전승은 시조의 계보상 동일한 전승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구태를 ‘고이왕’으로 보는 견해에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고이왕이 여러 방면에서 국가 체제를 정비함으로써 백제가 비로소 고대 국가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게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라를 정비했다고 해서 시조 혹은 건국자로 섬겨진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더욱이 시조나 건국자는 제사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고이왕이 국가적 제사의 대상이었다는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고이왕을 ‘구태’로 보기 어렵다.
역시 구태에 비정할 수 있는 인물은 시조로 섬겨진 인물이어야 한다. 그 후보로는 역시 온조와 비류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백제 본기 편찬자들은 이 두 인물 중에서 온조 전승과 온조 왕계를 주류로 설정하고 있다. 즉 『삼국사기』 편찬 시에는 직접적인 자료가 없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두 전승 중 온조 전승을 백제의 시조 전승으로 상정할 만한 어떤 근거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근거로 백제 말기에 왕실에 의하여 표방되던 시조 전승과 왕계 의식을 반영한 자료만 한 것이 있을까. 따라서 온조 전승이 백제 말기의 왕계 의식을 반영한 자료에 의거하였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보겠다.
이렇게 보면 해답이 좀 더 분명해진다. 즉 국내의 「고기」류에 전하는 온조 전승이 사비 시대까지 전승된 것이고, 이것이 백제 말기의 왕계 의식을 반영한 전승이며, 6~7세기경 중국 왕조에 전해진 구태 전승 역시 백제 말기의 공식적인 시조 전승이라고 한다면, 의당 양자는 동일한 성격의 전승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백제의 세 시조 전승 중에서 온조 전승과 구태 전승은 그 내용 구성에서 상당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앞서 제시한 바 있는 두 시조 전승의 내용을 서로 대응시켜 보자.
첫째, 〔출자 계보〕와 관련된 내용이다. 온조나 구태가 모두 동명의 후예로 나타나는 점이다. 물론 구태 전승은 부여의 시조 동명이고, 온조 전승에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으로 나온다. 그러나 온조 전승의 주몽은 동명과 주몽을 동일시한 후대 인식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이 점에 대해서는 잠시 뒤에 다시 설명하도록 하겠다. 그렇다면 양 전승의 출자에는 별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또 온조는 동명[주몽]의 아들로, 구태는 단지 동명의 후손으로만 나오지만, 동명의 혈통적 계통을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양 전승은 일치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에 반하여 비류 전승은 ‘해부루-우태’ 계보라는 점에서 위의 두 전승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둘째, 〔건국〕에 대한 내용이다. 이 두 전승은 한산(漢山)과 ‘대방의 옛 땅[帶方故地]’이라는 건국 지역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대방의 옛 땅이 한강 지역에 대한 표현상의 차이에 불과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두 전승에 등장하는 건국지 역시 서로 다른 곳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셋째, 〔시조의 덕성〕에 관한 부분으로, 구태 전승에는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篤於仁信).”라고 하였다. 온조 전승에는 온조의 인품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백성들이 편안하였고 …… 그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에 귀부하였다(人民安泰 … 其臣民皆歸於慰禮).”라고 하여 왕으로서 온조의 덕망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이 부분 역시 일정하게 양 전승이 통하는 일면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 남부여(南扶餘) 조에는 온조의 성품에 대하여 “체격이 크고, 성품이 효도와 우애를 좋아하며, 말 타고 활 쏘기를 잘하였다(體洪大 性孝友 善騎射).”라고 기록하였다. 이런 자료를 보면 본래의 온조 전승에는 구태 전승과 마찬가지로 시조의 덕성에 관한 직접적인 표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적어도 시조의 덕성을 전승 안에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두 전승은 공통된다고 볼 수 있다.
넷째, 〔국호〕 문제로, 온조 전승에서는 “10명의 신하가 보좌하여 나라 이름을 십제라 하였다. …… 백성이 즐겨 따랐으므로 다시 백제로 고쳤다(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 百姓樂從 改號百濟).”라고 하여 국호가 십제에서 백제로 바뀌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구태 전승에서는 “백가가 바다를 건넜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하였다(以百家濟海, 因號百濟).”라고 했다. 백제라는 이름의 연원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국호를 설명하는 방식에서는 매우 유사함을 보여 준다. 이러한 백제의 국호와 “백가가 바다를 건넜다.”라는 식의 설명은 백제인 스스로의 설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상 네 가지 점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온조 전승과 구태 전승은 기본적인 내용 및 구성상에서 상당한 유사성을 지닌다. 다시 정리하자면, 두 전승 모두 백제 말기에 내세워진 시조 전승이라는 점, 전승의 구조와 내용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두 전승이 전혀 다른 계통이 아니라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었을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백제의 시조 전승으로 확신했던 동명[주몽]–온조 전승과 중국 사서에 전해지는 동명–구태 전승은 매우 깊이 연관된 전승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중국 측 역사책에 전해지는 구태 전승은 온조 전승이 축약되었거나 중국에 전해지면서 변형된 형태로 짐작된다.
그러나 ‘구태’와 ‘온조’는 너무도 다른 이름이라는 점에서 사실 결정적인 의문은 여전히 남지만, 다음과 같은 가능성은 지적할 수 있겠다. 먼저 구태(仇台)가 인명(人名)이 아닐 가능성이다. 구태(仇台)를 ‘ku-dhi’ 혹은 ‘ku-dzi’로 읽고 이를 왕을 뜻하는 백제어 건길지(鞬吉支)의 길지(吉支)의 음인 ‘ki(r)-dzi’와 통한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를 받아들이면 온조 전승이 중국에 전해질 때, 시조 ‘왕(王)’이라는 뜻의 구태(仇台)가 중국 측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고 보겠는데, 여기에는 부여 왕 위구태(尉仇台)의 존재에 대한 중국 사가들의 선입관도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본래 백제가 전한 내용에는 없었을 것이 분명함에도 구태(仇台)를 위구태(尉仇台)와 동일 인물로 기록한 점이 이를 방증한다.
위와 같이 검토하면 구태 전승은 온조 전승의 또 다른 형태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별도로 또 다른 백제의 시조로 구태를 상정할 필요는 없다. 백제인들이 생각했던 백제의 시조는 온조와 비류 두 인물에 한정되었던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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