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진도독부 (熊津都督府)
집필자 : 김영관
 
660년 7월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뒤 백제 고토를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군정기관.
 
웅진도독부는 660년 7월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뒤 백제 고토를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군정기관이다. 백제를 멸망시킨 당은 백제의 5방 체제를 바탕으로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도독부를 설치하여 지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백제 유민의 부흥운동이 전개되면서 웅진도독부만 겨우 유지하였고, 부흥운동을 진압한 이후에도 1도독부 체제로 정비하였다. 신라의 백제 고토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당이 백제를 직접 지배하려고 설치한 기구였므로 신라와 갈등을 빚었다. 신라는 676년에 나당전쟁에서 승리하고 점령지에 대한 실효지배 정책을 추진하여 웅진도독부를 퇴출시켰다.
 
 
개설
 
백제를 멸망시킨 당은 백제 고토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사비도성에는 백제도호부를 설치하여 낭장 유인원을 주둔시켰고, 지방에는 백제 지방통치의 거점에 5도독부를 설치하고 그 밑에 주현을 두어 통치하려고 하였다. 웅진도독부는 백제 북방의 요충지인 공주에 설치하였고 왕문도를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도독부의 도독과 주현의 관리들은 백제인들을 발탁하여 지배하려고 했다. 그러나 백제 전역에서 일어난 유민들의 거센 저항과 부흥운동의 전개로 당의 백제 고토 통치계획은 도상 계획에 그치게 되었다.
 
실제 당군이 지배한 곳은 사비도성에 설치한 백제도호부와 북방성에 설치한 웅진도독부뿐이었다. 그나마 661년에는 백제 유민들의 기세에 물려 백제도호부가 폐지되었고, 이후 664년 3월 백제부흥운동군을 완전히 진압할 때까지 웅진도독부만이 기능을 하였다. 당은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한 후에 백제 고토를 웅진도독부 단일 도독부 체제로 확정하고, 그 아래에 7주 51현을 설치하여 기미지배를 하였다. 그러나 백제 고토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신라와 갈등이 심화되자 당은 백제 태자였던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고, 백제인들을 지방의 자사와 현령 등으로 삼아 백제 고토에 대한 직접 지배를 획책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과 신라는 점령지 지배권 문제로 전쟁을 하게되었고, 신라는 671년에 백제 사비도성지역을 차지하여 소부리주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백제 고토의 다른 지역들도 대부분 신라의 영향권에 들게 되었다. 이로써 실질적으로 웅진도독부의 기능은 정지되었으나, 웅진도독부의 위치가 요동의 옛 고구려 건안고성으로 바뀌게 되는 676년 2월까지 명목상으로나마 백제 고토에 존재하였다. 당이 676년 2월 웅진도독부의 위치를 요동 건안고성으로 바꾸어 설치한 것은 곧 백제 고토에 대한 당의 지배를 완전히 포기한 것과 같았고, 따라서 백제 고토는 신라의 직접지배영역이 되었다.
 
 
내용
 
660년 7월 의자왕이 항복하자 당은 백제 수도였던 사비와 지방의 지배 거점들에 5도독부 37주 250현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지배체제는 백제의 지방지배체제였던 5방, 37군, 250성 체제를 이름만 중국식으로 바꾼 것으로, 실제적인 지배는 시행할 수 없는 탁상 계획에 불과했다. 의자왕이 항복한 뒤에 백제의 지방 군장들이 투항해왔고, 이들을 도독부와 주, 현의 관리로 발탁하려고 했으나, 금세 부흥운동에 참여함으로써 당의 의도는 실현되지 못했다. 지방 주요 거점이었던 5방 관할 지역을 각기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도독부로 편제하였으나, 실제 기능을 한 것은 웅진도독부뿐이었다.
 
당이 백제 영토를 완전히 평정하지 못한 상태였고, 전국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당과 신라군이 점령한 곳은 일부에 그쳤다. 661년 3월 중방성이었던 고사성, 663년 2월 동방성이었던 덕안성, 남방성이었던 구지하성 부근의 거물성, 사평성, 663년 11월 서방성이었던 도선성 부근의 임존성 등이 모두 백제부흥군의 거점이었다는 기록을 참고하면 실제 당군의 영향력이 미친 곳은 북방 웅진성과 사비도성 부근에 불과했다. 그나마 661년 6월에 이르면 당군은 사비도성마저 백제부흥군에게 내주고 웅진으로 옮겨왔다. 그러므로 당이 설치한 5도독부 중 웅진도독부만이 겨우 유지되었고, 663년 8월 백강구 전투의 승리와 663년 9월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이었던 주류성을 함락시키고, 11월 임존성마저 함락시킨 이후에도 5도독부 체제로 환원되지는 않았다. 664년 3월 사비산성을 다시 찾음으로써 백제부흥운동을 완전히 제압한 이후에도 웅진도독부 단일 체제를 유지하였다.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한 이후에 당은 백제 고토를 웅진도독부 1도독부 체제로 정비하고, 그 아래에 7주 51현을 두었다. 7주는 동명, 노산, 고사, 사반, 지심, 대방, 분차 등이며, 51현은 웅진도독부 직할의 우이, 신구, 윤성, 인덕, 산곤, 안원, 빈문, 귀화, 매라, 감개, 나서, 득안, 용산 등 13개 현을 비롯하여 각 주별로 4개에서 9개의 현을 거느렸다. 5도독부 체제 아래에서 웅진도독부의 치소는 웅진이었다. 그런데 백제부흥운동 진압 후 단일 웅진도독부 체제 아래에서는 웅진에서 사비로 옮겨갔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665년 8월 신라와 체결한 취리산 회맹으로 웅진이 국경이 되었고, 웅진도독부 직할 13개 현이 대개 사비 부근으로 추정되며, 웅진성 부근은 동명주로 편제된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웅진도독부의 지배구조는 도독과 자사, 현령 등의 임명 상황을 통해 알 수 있다. 당의 기미지배정책에 따른다면 웅진도독부 역시 백제인으로 도독을 임명해야 하지만, 부여융이 백제부흥운동 진압 후 임명되기 전까지는 당에서 직접 파견되어 임명되었다. 초대 웅진도독은 좌위낭장 왕문도였는데, 660년 9월 부임하자마자 죽었다. 당은 5도독부 체제가 유명무실해졌고, 웅진도독으로 부임한 왕문도가 죽자 5도독부를 총괄하기 위해 사비에 설치한 백제도호부 도호였던 유인원을 왕문도를 대신해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였다. 663년 9월 임존성을 함락시킨 후 유인원이 당으로 귀환하자 유인궤가 검교웅진도독이 되었고, 664년 신라와의 웅령 회맹을 주관하였다. 665년 7월에는 부여융이 웅진도독으로 부임하여 신라 문무왕과 취리산에서 회맹하였다. 이후 웅진도독부가 실질적으로 역할을 할 수 없을 때까지 부여융은 웅진도독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고, 676년 2월 웅진도독부의 위치가 요동 건안고성으로 바뀐 이후에도 웅진도독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웅진도독부 휘하의 관료로는 유인궤가 검교웅진도독이 되기 전에 대방주자사를 지냈다. 백제 출신 관료들도 여럿 확인할 수 있다. 난한은 웅진도독부 장사, 예군과 흑치상지는 사마를 지냈다. 흑치상지는 절충도위와 대방주 및 지심주 장사, 예식진은 동명주 자사, 난무는 지심주 자사, 증산 사마와 웅산 현령을 지낸 법총 등이 있다.
 
웅진도독부는 신라의 백제 고토 지배를 인정하지 않고 직접 지배하려고 설치한 기구이므로 계속 신라와 갈등을 빚었다. 영토 문제를 둘러싸고 신라군이 실질적으로 점령하고 있는 백제 영역이 상당했음에도 당은 신라 문무왕을 계림주 대도독으로 임명하고 웅진도독과 더불어 기미부로 취급하려고 하였다. 이에 반발한 신라는 실질적인 백제 고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하려고 하였고, 그 과정에서 신라와 웅진도독부의 경계를 획정하는 두 차례의 회맹을 맺었다. 664년 2월 웅령 회맹과 665년 8월의 취리산 회맹이 그것이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신라와 당의 갈등은 폭발하여 결국 나당전쟁으로 이어졌다. 671년 사비에 소부리주를 설치하고, 676년에는 나당전쟁에서 승리하여 웅진도독부를 완전히 퇴출시켰다.
 
 
의의와 평가
 
웅진도독부는 당이 백제 고토를 직접 지배하기 위해 세운 5도독부의 하나로 출발하였지만, 백제 유민들의 부흥운동으로 다른 도독부들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자 폐지하고 웅진도독부로 단일화하여 거점으로 삼았던 식민 통치기구였다. 당은 전통적인 정복지 지배정책에 따라 백제 고토 역시 백제인들을 관료로 임명하여 직접지배하려고 하였다. 이로 인해 백제의 옛 땅은 한동안 신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세력권을 형성했으나, 결국 당나라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당의 백제 고토 지배정책은 백제 유민의 부흥운동과 신라의 점령지에 대한 실효지배 정책 추진으로 파국을 맞아 실패하게 되었고, 웅진도독부 역시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백제부흥운동연구』(김영관, 서경문화사, 2005)
「웅진도독부의 성립과 운영」(박지현, 『한국사론』 59, 2013)
「백제 멸망후 부여융의 행적과 활동에 대한 재고찰」(김영관, 『백제학보』 7, 2012)
「부여융 도독 체제 웅진도독부의 통치구조」(김수미, 『역사학연구』 32, 2008)
「당의 백제지역지배와 웅진도독부」(방향숙,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07)
「백제부성의 실체와 웅진도독부 체제로의 전환」(김수미, 『역사학연구』 28, 2006)
「웅진도독부의 지배조직과 대일본정책」(이도학, 『백산학보』 34, 1987)
 
 
관련 항목
 
백제 부흥운동 : 백제가 멸망한 뒤 660년에서 663년까지 왕족 · 군인 등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던 부흥운동.
부여융 : 삼국시대 백제 제31대 의자왕의 셋째 아들인 왕자.
나당전쟁 : 백제와 고구려 멸망 후 신라와 당나라가 7년간 싸운 전쟁.
소부리주 : 신라 중대의 지방 통치 구역.
거물성 : 신라 문무왕 3년(663) 신라의 김흠순과 김천존이 공격한 백제성.
구지하성 : 전라남도 장성군 부근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5방성 중 하나인 성곽. 성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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