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mirror.enha.kr/wiki/%EC%A0%95%EB%8F%84%EC%A0%84#s-2
* "정도전 - 엔하위키"에서 "2. 인물됨"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글 중의 속어는 의미에 맞게 바꾸거나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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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도전 인물됨
냉철한 지성과 강직함을 지니고 있었던 혁명적 사상가의 이미지와는 달리 상당히 덜렁대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외출을 했는데 말을 몰고 가는 하인이 "대감, 서로 다른 신발을 신고 나오셨습니다."라고 지적하자 정도전은 "상관없다. 이렇게 말을 타고 가면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사람은 오른쪽 신발만 볼 것이고, 왼쪽으로 지나가는 사람은 왼쪽 신발만 볼 테니까."라고 웃으며 그대로 짝짝이로 신발을 신은 채로 있었다고. (쿨가이인지 귀차니스트였던 건지 앞이나 뒤에서 보면 어쩌려고) 공양왕 시절에는 반이성계파 인사였던 우현보를 탄핵하려던 계획을 세웠는데, 이것이 사실은 이성계 일파의 참모진들 외에는 기밀사항이었다. 그런데 이를 실수로 주변 사람들에게 흘리는 바람에 반이성계파 대간들이 이를 두고 정도전을 집중적으로 탄핵했고 결국 공신녹권 박탈에 유배까지 당해서 큰 위기를 겪기도 했다. 또 태조가 문득 불쌍해보이거나 안쓰러워 보이면 자리를 가리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대성통곡하고는 했다는 기록이 있어 매우 감정표현에 솔직한 인물임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권신들과 감정적 대립 역시 심했고, 그가 우왕대 복직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 당장 다른 신진 사대부들이 하나 둘 현실과 타협했지만 끝까지 버틴 인물이 바로 정도전이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부로를 훈시하던 오만함이, 유배된 부락의 천인들과의 정서적 교류, 그들의 지식과 지혜에 대한 파악과 이해를 거치면서 크게 바뀌었다. 이후 백성을 중시하며 실용을 중시하는 사고관이 자리잡게 된다. 드라마 '정도전'에서도 이 점을 지적한다.
다만 주변사람과 충돌하고 과격하게 행하는 면모는 이후로도 고치지 못했으며 한번 가진 은원을 잊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철저히 갚는 면모도 있었다. 전반적으로 분란을 일으키는 문제아 성질이 매우 다분한 인물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경복흥, 이인임 같은 조정의 권신들에게 개기다가 유배 당했는데 거기서 또 악에 받힌 소리를 하고 떠나서 곤장 맞을 뻔하기도 하고 유배지에서 백성들에게 가서도 그랬다가 반성하기도 하지만 나중에 유배에서 풀려나와 삼각산 등지에서 후학을 가르칠때도 혹세무민하는 요망한 인간을 매우 까는데 같이 까던 승려도 '석가모니나 저놈이나 다를게 뭐냐?'는 식으로 면박을 주질 않나...그냥 마음에 안들면 가리지 않고 막 까는 인물이었던 것.
애시당초 정도전을 까는 졸기에서도 처음엔 스승과 동문들간의 사이가 두터웠으나 나중에 원수같이 되었다고 되어 있다. 그리하여 개국에 반대한 이색과 그 동문들은 작정하고 작살낸다. 스승인 이색이나 동문 이숭인, 정몽주와는 나중에 원수가 되었다고 할 정도였으며 이숭인은 유배지에서 정도전이 보낸 사람에 의해 맞아 죽었다. 거기에 또 다른 동문 후배인 하륜은 아예 '술수하는 자 따위의 말은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까기도 했다. 또 자신의 내력을 알려 승진을 막았다고 생각한 우현보의 집안을 아주 작살내 버렸다. 가장 압권은 스승 이색이 조선 개국 이후 유배를 갔을때인데 정도전이 외딴 섬인 자연도로 보내려고 하니 그 말을 들은 경기 계정사 허주가 자연도에는 사람이 없다며 난색을 표하자 "섬에 귀양보내자는 것은 바로 바다에 밀어넣자는 것이다" 라고 대답했다. 참고로 이건 너무 심하지 않느냐며 이색을 육지로 유배보내준 게 태조였다(…). 한 마디로 정작 주군인 태조 이성계가 개국 과정에서 많은 이들에게 관용을 베풀려고 했던 것과는 상반된 모습들이다. 이 때문에 많은 반감을 샀으며 1차 왕자의 난 때 이 성격으로 미움받아 죽었다는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편인 남은이 말했을 정도였다.
워낙 문(文) 쪽으로만 치우쳤는지 체구는 뚱뚱했다고 한다. 배가 불룩 나왔다고 하는 묘사가 사서에 있을 정도. 이 점은 본인도 '농부에게 답하다'라는 글에서 '뺨이 풍요하고 배가 나왔다'라고 자신의 외모를 묘사했다. 또한 정도전의 후배이자 정치적으로는 반대 입장이었던 권근은 정도전의 용모를 "온후한 빛과 엄중한 용모는 쳐다보면 높은 산을 우러러 보는 듯하고 다가서면 봄바람 속에 앉은 듯하다. 그 얼굴이 윤택하고 등이 펴진 것이 온화함과 순함이 속에 있음을 알겠다"라고 묘사했다. 실록에서도 정도전이 죽을 때 이웃집으로 도망치자 그 집 주인이 '배 불룩한 사람이 저희 집에 숨었습니다'라고 이방원에게 고발하기도 했다.[6] 이로 미뤄 보면 정도전은 꽤 풍채가 좋은 스타일이었던 것 같다. '등이 펴졌다'는 권근의 묘사를 보면 단순 비만형은 아니라 제법 늠름한 인상이었던 듯.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서거정의『태평한화』에 의하면 하루는 정도전이 이숭인[7], 권근과 더불어 각자가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바에 대해 얘기했는데, 이숭인은 조용한 산방에서 시를 짓는 것을 평생의 즐거움이라 했고, 권근은 따뜻한 온돌에서 화로를 끼고 앉아 미인 곁에서 책을 읽는 것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꼽았다. 이에 정도전은 “첫눈이 내리는 겨울날 가죽옷에 준마를 타고, 누런 개와 푸른 매를 데리고 평원에서 사냥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했다 한다. 개국 이후 직접 병서를 지어 직접 군사훈련을 지휘했다는 점을 감안해봤을 때 정도전은 다른 문인들에 비해 무(武)의 성향도 어느 정도 있었다고 할 수 있다.다만 실제로 그가 전장에 나가서 공을 세우거나 병재(兵才)를 입증한 바는 없다.병법을 연구하는 정도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성계와의 관계는 그야말로 수어지교였던 듯. 이성계는 왕이 된 후에도 정도전에게 스스로를 '송헌거사'라고 칭하면서 편지를 쓰기도 했었고, 한양 천도 후 연회 자리에서 정도전이 지은 '문덕곡'이 연주되자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이거 니가 지은 노래니까 당장 일어나서 춤 좀 춰봐"라고 명했고, 정도전은 즉시 그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었는데, 이성계는 웃옷을 벗기고 춤을 추게 하며 흥겹게 놀았다고 한다. 본격 일등참모 능욕[8] 또한 이성계가 묏자리를 찾으러 돌아다닐 때 정도전도 이를 수행했는데, 정도전은 이성계가 노년이 되어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쓰러웠는지, "오늘날 묏자리를 잡으러 다니시는 것을 보니 슬픔을 금치 못하겠나이다"라며 술잔을 올리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정도전의 죽음을 전해들은 이성계는 "나의 원훈을 죽였구나!"라고 통곡했다고 한다.
주석
주석
[6] 다만 이 부분은 실록에서도 앞뒤가 안 맞는 대표적인 부분이다. 이방원 집권 이후 이미지 왜곡을 위해서 넣었다고 보는게 맞을지도.
[7] 이런 얘기까지 나올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지만 후일 그는 유배를 가서 정도전이 보낸 이한테 장살당한다. 그것도 이성계는 살려주려고 굳이 장을 치는 것으로 형을 감했는데도 불구하고 정도전이 몰래 남은과 짜고 때려죽인 것. 이 사건은 후에 다시 조사되어 정도전과 남은이 사후에 다시 비난받는 이유가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이숭인을 장살한 것은 정치적 이유보다 그가 자신보다 문재가 뛰어나서였다는 말이 있다.
[8] 이 일화는 용의 눈물에도 재현되어 있다. 다만 정도전이 웃옷을 벗지는 않고 곱사춤만 추는 정도로 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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