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Contents?contents_id=E0003330
고구려삼경 [高句麗三京]
고구려시대의 중요한 3개의 수도.
고구려 3경(三京)은 평양성(平壤城)·국내성(國內城)·한성(漢城)을 지칭한다. 평양성 지역은 일찍이 고조선(古朝鮮) 후·말기의 중심지였던 곳이고, 고조선이 망한 뒤 한족(漢族)이 설치한 낙랑군(樂浪郡)의 중심지가 되어 황해 연안의 중요 무역기지로 발달하였다.
고구려는 313년경 이 지역을 한족으로부터 탈환했으며, 344년(고국원왕 4)에 평양성을 증축한 것으로 나타난다. 353년(고국원왕 13)에 전연(前燕)의 침입(342)으로 황폐화된 국내성에서 평양으로의 이거(移居) 기사가 나타나고 있다. 393년(광개토왕 2)에 평양에 9사(九寺)를 창건한 사실 역시 이미 평양지역으로의 귀족세력 이주가 일정 정도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409년(광개토왕 18)에 평양성 민호(民戶)의 국동(國東) 6성(城)으로의 이주는 평양 지역 주민의 전반적인 개편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 끝에 427년(장수왕 15) 이곳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 뒤 고구려 말까지 평양성은 고구려의 수도로 계속 번영하였다. 천도 이후 평양성은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불렸다.
이러한 평양천도(平壤遷都)의 배경과 동기로는 남진정책(南進政策)의 실현 및 왕권 강화와 귀족세력의 통제 목적, 한반도 서북부 일대의 경제적 기반 확보, 북위(北魏)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탈피 등 다양한 측면이 제시되었다. 이와 함께 최근에는 평양 지역이 갖고 있는 인적·문화적 기반을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 역시 평양 이주의 배경으로 지적되고 있다.
국내성은 평양성으로 천도하기 전의 고구려 수도였던 곳이며, 지금의 압록강 중류 북쪽인 통구(通溝) 지역이다.『삼국사기』에는 서기 3년(유리왕 22)에 환인(桓因) 지역의 졸본성(卒本城)에서 이곳으로 천도했다고 하였다. 국내성으로의 천도는 후한(後漢)의 대외정책 변화에 따라 제2현도군의 분리통제책을 봉쇄하는 한편 동옥저(東沃沮) 방면으로 진출하고 나아가 압록강 수로망을 장악하여 국가체제를 정비하려는 목적에서 단행되었던 것이다. 그 뒤 계속 고구려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으며, 평양천도 후에도 국내성 지역은 400여 년 간의 정치·행정 중심지였던 이유로 천도 이후에도 여전히 정치적으로 고구려 귀족들의 중요한 거점이 되어 별도(別都)로 편제되었다.
한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하나는 지금의 황해도 재령(載寧)에 비정하는 설이다. 이와 관련되는 자료로『고려사(高麗史)』지리지(地理志)나『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등의 지지류(地誌類)에서 재령의 지명이 일명 ‘한성(漢城)’ 또는 ‘한홀(漢忽)’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지금의 서울 부근인 북한산성(北漢山城)에 비정하는 설이다.『삼국사기』지리지 한양군조(漢陽郡條)에 “본래 고구려의 북한산군인데 ‘평양(平壤)’이라고도 하였다”라고 한 것과『고려사』지리지 등에서 “남평양(南平壤)이라고도 하였다”라고 한 것에서 삼경제(三京制)에서의 수도의 명칭을 따 별호(別號)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라 진흥왕 22년에 세운 「창녕비(昌寧碑)」에는 사방군주(四方軍主) 중 ‘한성군주(漢城軍主)’가 나오는데, 이는『삼국사기』지리지 한양군조에 고구려의 북한산군을 진흥왕이 주(州)로 만들고 군주(軍主)를 두었다고 한 것(『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진흥왕 18년으로 명시되어 있음)과도 부합되므로, 북한산군을 당시에 ‘한성’으로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창녕비의 ‘한성’이 재령이 아님은 진흥왕이 영토 확장을 한 지역을 고려하더라도 알 수 있다. 재령 지역에서 고구려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도시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재령이 한성이었다는 설은 확고한 근거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한성을 북한산성으로 비정하는 설에 대한 완전히 부정적인 증거라고 단정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백제가 475년에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남쪽으로 천도한 후에도 다른 지역에서 여전히 ‘한성(漢城)’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음을 보면, 고구려의 경우도 6세기 중엽 백제와 신라의 동맹군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뒤 한성의 위치가 변동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의의와 평가]
[의의와 평가]
오랜 문화가 축적되어 있던 곳에 자리 잡은 삼경은 고구려의 영토 확장 과정의 산물이기도 하였다. 고구려 영역 내에 발달한 도시가 오직 삼경에 국한되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삼경제는 확대된 영역에서 도시의 기능을 보다 확산시키는 제도이기도 하였다. 또한 수도인 평양도성을 제외하고 별도인 국내성과 한성이 지역적 기반을 달리하는 정치세력을 편제하는 기능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수서(隋書)』
『진흥왕순수비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眞興王巡狩碑 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
「고구려 평양 도성의 정치적 성격」(임기환, 『한국사연구』137, 2007)
「고구려 국내 천도(高句麗 國內 遷都)의 시기와 배경」(여호규, 『한국고대사연구』38, 2005)
「고구려 평양천도의 동기」(서영대, 『한국문화』2, 1981)
『한국사(韓國史)』-고대편(古代篇)-(이병도, 을유문화사, 1959)
「眞興王の戊子巡境碑と新羅の東北境」(池內宏, 『滿鮮史硏究』上世 2,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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