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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멸망 원인이자 살수대첩 승리 요인, 청야
2009/08/29 13:30
고구려가 당나라에게 멸망당하게 된다. 고구려 멸망 원인을 놓고 연개소문 집안 때문이란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있다.
우선 오픈백과에 있는 고구려 멸망에 대해 소개한다.
668년(보장왕 27) 나·당 연합군과의 싸움에 패함으로써 주몽 이래 700여 년을 이어온 고구려 왕조는 막을 내렸다.
당시의 내정은 70여 년에 걸친 수·당나라를 비롯한 거란 ·신라와의 투쟁으로 인한 인적·물적 손실은 많은 국력을 소모시켰다.
그리고 연개소문의 독재는 민심을 혼란시켰고, 665년 경 연개소문이 병사한 후 남생(男生) ·남건(男建) ·남산(男産) 세 아들의 불화로 지도층이 분열되었으며,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淵淨土)는 12성(城)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하였고, 남생은 당나라에 투항하는 등 내분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기회를 이용한 나·당 연합군은 668년 김인문(金仁問)이 이끈 27만의 신라군과 이적·설인귀(薛仁貴)가 이끈 당나라 군사 50만으로 평양성을 공격 ·함락시켰다.
이때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고 설인귀로 하여금 통치하게 하였고, 고구려의 영토를 9도독부(都督府) 42주(州)로 나누어 지배하는 한편, 2만 8200호를 당나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연개소문 집안의 권력 다툼 때문에 멸망한 것으로 돼있다.
하지만 실제로 연개소문 집안의 권력 다툼도 맞기는 하지만 내면을 살펴보면 고구려 대대로 내려왔던 청야전술 때문이다.
당나라는 안시성 전투 이후 고구려 침략의 기본 전술을 바꾸기로 결정한다.
안시성 전투 이후 고당 전쟁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 후 당나라는 659년 음력 11월에 설인귀를 앞세워 다시 고구려를 침략하였고, 이듬해 음력 6월에는 소정방이 군사 13만 명을 이끌고 신라와 함께 백제를 침략하였다. 이 같은 나당연합군의 공세에 밀려 백제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661년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연합군은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로 진격하였다. 나당연합군이 평양을 향해 진군하였고, 이에 호응하기 위해 당 고종은 4만 4천 명의 병력을 징발하여 고구려의 변방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백제 부흥군이 나당연합군의 후미를 치는 바람에 신라군이 다시 남진하여 백제부흥군과 싸워야 했으며, 그 상황을 이용하여 고구려는 서북 변방에 병력을 집결시켜 당나라군을 격퇴하였다.
이에 당나라군은 그 해 음력 4월에 다시금 대군을 거느리고 수륙양공 작전을 구사하며 평양성을 향해 진군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당나라군이 패하자 당나라 조정에서는 고구려와 휴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으며, 이에 밀린 당 고종은 일시적으로 고구려 공략을 중지하였다.
661년 음력 8월에 당나라는 다시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소정방의 10만 대군을 태운 당나라 함대가 대동강을 타고 평양성을 포위하여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그리고 서쪽에서는 당나라 육군이 압록강 일대를 향해 밀려왔다. 이에 연개소문은 맏아들 연남생에게 군사를 내주고 압록강 일대를 지키도록 하였으나 패퇴했다.
662년 방효태가 이끈 당나라군은 연개소문이 이끈 고구려군과의 사수 전투에서 패배하여 몰살되었다. 그러자 평양성을 공략하던 소정방의 군대는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포위를 풀고 황급히 퇴각하였다.
고구려는 당나라와의 전투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수십년간의 전투로 인해 국력에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또한 당시 고구려의 모든 권력은 연개소문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는데, 이는 666년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들 간에 권력 투쟁이 벌어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맏아들 연남생이 대막리지 직위를 이어받았지만, 동생인 연남건과 연남산은 형의 권력 독식에 불만을 품었다.
그래서 연남생이 변방을 순행하는 사이 왕명을 빙자하여 연남생의 측근을 없애고 연남생을 소환하려 하였다. 이에 연남생은 당나라로 탈출하여 투항하였다
그 후 보장왕은 연남건을 대막리지로 삼고 조정을 재편하였다. 하지만 조정은 이미 많은 신하가 제거되어 어수선하였고, 민심도 연남건 형제에게서 등을 돌렸다.
당 고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남생을 앞장세워 이적, 설필하력, 학처준, 백안륙 등에게 군사를 내주어 고구려를 재침략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되자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한반도 쪽의 12개 성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해 버렸다.
667년부터 당나라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40여개의 성과 마을이 함락되었고, 668년에는 수도인 평양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보장왕은 항복을 선언하고 당나라로 끌려갔다.
수뇌부가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던 고구려 병사들은 여전히 당나라에 대항하여 싸웠지만, 결국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위 내용을 살펴보면 당나라가 참으로 꾸준하게 고구려를 괴롭혔다.
수나라와의 전쟁기간까지 합한다면 서기 598년부터 668년에 이르기까지 고구려는 70년을 전쟁을 한 것이다.
70년동안 계속적으로 쳐들어 온다면 멸망하지 않는 나라가 있겠는가.
당나라는 수나라와 고구려와의 전투 그리고 안시성 전투 이후 전략을 바꾸게 된다. 자치통감을 보면 이세민이 647년 고구려에 대한 보복전을 일으키려 했을 때 나온 조정의 의론 중 하나가 고구려 사람들의 식량난이 심각하다는 내용이 언급돼 있다.
신료들은 고구려에 가뭄이 계속돼 고구려인들이 식량난으로 고생하고 있으니 소규모 병력을 동원해 고구려를 소란케하고 고구려인들을 피로케 하면 몇 년 사이에 요동땅 천리가 황폐해져 민심이 떨어져 나갈 것이니 압록수 이북을 힘들이지 않고 쳐들어갈 것이라고 건의한다.
실제로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여러 성들이 제대로 싸우지 않고 항복을 했다. 이는 고구려 내부에 식량난이 엄청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고구려가 대기근이 오게 되고 식량난을 겪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당나라는 안시성 전투 이후 소규모 전투로 전환한다. 그동안 몇십만을 동원했던 전투에서 소규모 전투로 바꾼다. 하지만 고구려의 가장 기본적인 전술은 청야전술이다.
청야전술은 들판의 식량을 치우고 들판을 불태우는 것이다. 당나라가 쳐들어 온 그 해에는 한 해 농사를 완전히 망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구려 당시 농경사회이기 때문에 한 해 농사를 망친다는 것은 결국 경제가 휘청거린다는 것이다.
그 벌판의 주인 대부분이 인근 성주이거나 중앙 귀족들이다. 그런 성주와 귀족들이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면 왕실(당시에는 연개소문 집안)을 원망할 수밖에 없다.
당나라는 소위 때린 곳에 또 때리는 형식을 취했다. 매년 같은 곳에서 소규모 전투를 벌임으로써 고구려 민심을 분열시키는 작전을 사용한 것이다.
백성들은 지쳐가고 성주와 귀족들 역시 전쟁에 지쳐가고 민심은 이반되기에 이르렀다.
연개소문 집안이라면 이를 갈아버릴 정도가 됐을 것이다. 고구려가 멸망을 하든지 말든지 자신들이 살아야 했다. 결국 고구려에서 이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연개소문 집안의 권력 다툼도 있었지만 연정토가 신라에 귀순한 것도 연남생이 당나라에 귀순한 것도 민심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청야전술 덕분에 수나라와 당나라 대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수나라 113만 대군을 청야전술로 물리쳤다. 당 태종의 대군도 안시성에서 청야전술로 물리쳤다.
하지만 그 청야전술이 고구려의 발목을 잡고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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