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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진 서울교대 교수가 복원한 가야 여자 모습 . 왼쪽은 정상인, 오른쪽은 편두이다.
가야가 살아온다 <1> 옛 가야人의 모습
특별취재팀 / 윤정길
가야인은 어떻게 생겼을까.
특별취재팀 / 윤정길
가야인은 어떻게 생겼을까.
조용진 서울교대 교수가 복원한 가야 여자 모습 . 왼쪽은 정상인, 오른쪽은 편두이다.
정확한 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가야인의 얼굴을 추정할 수 있는 방법은 고분에서 나온 옛 가야인의 뼈 등 생물학적인 유물을 통해 유추하는 것이다. 지난 76년 김해 예안리 가야고분에서 다량 출토된 인골은 가야인 복원작업을 가능하게 했다.
서울교대 조용진(미술과) 교수는 당시 출토된 여자 유골을 토대로 가야인의 얼굴을 복원했다.
조 교수는 “사람의 외모는 유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뼈의 모양을 보면 얼굴 복원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며 “골격을 구성하는 특질에서 근육, 혈관을 되살리고 골격 모양과 상관성이 큰 피부나 이목구비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얼굴복원 작업은 고대인의 식생활, 언어, 생활방식 등 문화와도 결부된다.
음식물의 종류, 영양성분과 상태, 어로나 농경생활 등이 얼굴의 살집, 표정 등에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가야인은 신체를 변형하거나 인위적인 장식을 하는 풍속도 가지고 있었다. 변진시대의 사회상을 기록한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에는 변진 사람들은 아기를 낳으면 그 머리를 납작하게 만든다는 ‘편두 풍습’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편두는 신생아 때부터 나무로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만들고 뒤통수는 약간 튀어나오게 만드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가야의 여자들은 ‘짱구미인’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안리 유적의 경우 여성 인골의 30%가 편두이며 나머지 대부분은 정상인이었다.
가야인들은 대체로 키가 크고, 뼈가 가늘며, 쭈그리고 앉아서 일한 흔적이 없는 ‘큰키형’ 민족으로 분석되고 있다. 예안리에서 출토된 성인 유골들의 평균 신장은 남성 167.4㎝, 여성 150.8㎝로 조사됐다.
가야 유골을 직접 조사하고 연구한 조 교수는 “4~5세기 가야인들은 상하의 치아가 앞니에서 마주 닿아 같이 마모돼 치관 전체가 평면으로 되고 턱이 큰 편”이라고 말했다. 이는 가야인들이 음식을 씹을 때 윗니 아랫니가 마주 닿아 닳아버릴 정도의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턱의 근육이 상당히 두꺼워진 것으로, 오늘날의 김해인보다 훨씬 남성적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삼국지’ 변진조의 12국 왕들의 모습에서 가야인의 헤어스타일도 추정해 볼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12국의 왕들은 머리를 묶어서 틀어 올리지 않고 그대로 늘어뜨린 모습을 하고 있는데 학계 일각에서는 이를 3세기 가야 소국의 왕이나 귀족들의 헤어스타일로 추정하기도 한다.
가야의 사회상을 연구한 계명대 권주현(사학과 ) 강사는 “유물과 고분벽화를 토대로 보면 가야인의 머리모양은 신라나 백제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가야 여성도 다른 고대사회의 여성처럼 출가전에는 머리를 뒤로 한갈래나 양갈래로 묶어 내린 모양이 일반적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가야시대에는 평민들이 변진시대부터 팔이나 어깨에 문신을 하고 금제 악세사리로 몸을 치장할 정도로, 멋을 부릴 줄도 알았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왜 가야인가
‘보아라 신라 가야 빛나는 역사…’. ‘옛 가야 선 나라 유서깊은 내고장…’
‘낙동강의 노래’와 ‘경남도민의 노래’ 일부다. 가야의 옛땅에 사는 주민들은 곧잘 유서 깊은 가야를 들먹이며 목청을 높인다. 하지만 정작 가야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가야의 역사도 모른 채 가야를 노래하는 것은 넌센스가 아닌가.
가야는 아직 온전한 자기 지도(地圖)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 여러 대·소국이 존재했지만 성립시기, 영역, 정치체제, 멸망과정 등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연구성과를 보면, 가야는 대체로 김해 부산을 중심으로 한 금관가야권, 함안지역 중심의 아라가야권, 고령 및 서부경남의 산악지역을 아우른 대가야권, 창녕 중심의 비화가야권, 경북 성주지역의 성산가야권 등으로 크게 분류된다. 이들 대지역권은 다시 소지역권으로 나뉘어 복잡한 분립상황을 보인다.
본지는 ‘가야사 복원 프로젝트’를 통해 가야의 온전한 지도를 그려나갈 계획이다. 실체 규명작업과 함께 가야인의 삶을 되찾는 것도 관심사다.
가야사가 박대당하는 현실도 파헤칠 계획이다. 고교 교과서에서 가야는 지난 70~80년대에 0.5쪽 정도로 서술되다가 90년대 들어 2~3쪽으로 늘어났다. 이는 최근 왕성한 발굴성과 때문이지만, 절대적 서술면수는 여전히 부족하다.
‘왜 700년인가’ 하는 것도 파고들 문제다. 가야의 성립시기와 관련, 학계는 △기원전 2세기(이병도) △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정중환, 김태식, 이영식) △기원후 1세기(김정학, 이현혜) △3세기 후반(신경철) 등 다양한 견해를 내놓고 있다.
초기 신라와 마찬가지로, 가야의 전신인 변진이 기원전 2세기말~1세기초에 서북한 지역으로부터 철기와 회색토기를 받아들여 문화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본지는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 가야사를 700년으로 설정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가야인들은 무덤에 자신들의 삶의 자취를 풍성하게 남겨 현대인으로 하여금 말을 걸게 하고 있다. 역사는 말을 시키는 자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법. 옛 가야의 문화인들은 오늘 갖은 편견과 오해속에서 ‘명예회복’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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