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 泰 植 (홍익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1. 삼국시대의 관념은 신라인의 주장
우리는 보통 한국 고대사를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라는 이름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한국 고대사를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 시기적으로 보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나라가 우리 나라의 영토를 셋으로 나누어 지탱하고 있던 것은 562년부터 660년까지의 98년간이었으므로, 삼국시대를 고집하면 시간적으로 그 이전의 천년 이상을 버리게 된다. 이는 통일신라시대라고 표현하는 순간에 대동강 이북에서 만주에 이르는 한국 고대의 영토에 대한 기억을 상실케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과연 이것을 옳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삼국시대라는 관념은 고려시대 중기의 정치가 겸 역사가인 김부식이 1145년에 편찬한 사서인 <<삼국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은 그것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나 그 이전에는 이규보가 말하는 바와 같이 고려 전기부터 <<구삼국사>>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 역사서들의 이름만 보아도, 고대의 역사를 ‘삼국’으로 정리하는 것은 일단 고려시대 사람들의 인식에서 비롯한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고려인들이 발해를 제외한 후삼국을 통일한 것을 그보다 앞선 고대까지 소급하여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고려인들의 그 인식도 실은 신라인들의 것을 계승한 것에 불과하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건국 연대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것은 최후 승자인 신라인들의 주관적인 역사 인식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이를 의심하거나 수정하려는 노력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또한 신라는 660년과 668년의 두 차례에 걸쳐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이후, 삼한과 삼국을 동일시하고 신라가 삼한을 통일한 것을 자랑하였다. 692년에 당나라가 신라 태종 무열왕의 묘호를 바꿀 것을 요구하자 신라가 이를 거절하며 당에 보낸 국서에서 신라인들의 그러한 자부심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신라 말의 최치원은 마한이 고구려가 되고, 진한이 신라로 되고 변한이 백제로 되었다고 보았는데,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최치원의 견해가 옳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인들의 역사 인식과 그를 계승한 고려인들의 인식이 현재의 관점에서 보아도 옳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우선 삼한과 삼국을 동일시하는 것도 문제가 되며, 또한 우리 역사의 터전에서 명멸했던 고조선, 부여, 가야, 발해 등을 무시하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가야만 보더라도 동쪽으로는 경상남북도의 낙동강 유역부터 서쪽으로 소백산맥을 넘어 전라남북도의 동부 지역에 이르는 옛 가야 주민들의 역사를 무시하게 된다. 이는 결국 한편으로는 우리 나라의 역사를 잘못 그르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 전체의 경험을 시간적, 공간적으로 축소시키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2. 실학자들의 확장된 역사 인식에서는 사국시대
이처럼 잘못되고 축소된 역사 인식은 민족 전체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데에 좋지 않은 기능을 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고려 후기에 오랫동안 몽고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큰 시련을 겪은 후 당시의 사상계를 이끌던 일연은 <<삼국유사>>를 저술하여 삼국시대의 관념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그는 사서의 이름을 ‘삼국의 남은 일들’이라고 하였으나, 그 속의 기이 편에는 고조선(왕검조선), 위만조선, 마한, 2부, 72국, 낙랑국, 북대방, 남대방, 말갈=발해, 이서국, 5가야, 북부여, 동부여, 고구려, 변한=백제, 진한 등을 망라하고 장문의 가락국기를 거의 그대로 게재하였으며, 왕력 편에서는 우리의 역사를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네 나라 왕들의 기년으로 정리했다.
부족하나마 이러한 확대된 역사 인식의 토대 위에서 우리 민족은 몽고 간섭기를 극복하고 조선을 개국할 수 있었다. 그 후 조선 초기의 권근은 <<동국사략>>에서 최치원의 그릇된 삼한 인식을 처음으로 지적했으나, 마한은 백제가 되고, 변한이 고구려가 되었다고 하여, 삼한과 삼국을 동일시하는 큰 틀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조선 중기에 임진 왜란을 겪고 나서 한백겸은 <<동국지리지>>에서 신라적인 삼국시대론의 허점을 지적해냈다. 즉 우리 동방은 옛날부터 남북으로 갈라져 있어서, 북쪽에서는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사군(四郡)-이부(二府)-고구려로 전개되었고, 남쪽에서는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이 각각 백제, 신라, 가락으로 계승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자라 고증을 올바로 함으로써, 그동안 잊혀졌던 가락국, 즉 가야의 존재를 밝히고, 결국은 한국 고대 시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4국이 대등하게 병존하였음을 논증한 것이다.
한백겸의 이론은 그 후 많은 실학자들의 지지를 얻으며 확산되면서 삼국만을 강조하는 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우리 동방의 역사는 장구하여, 단군이 1048년, 기자에서 마한까지가 1071년, 백제가 678년, 고구려가 705년, 신라가 992년, 가락국이 491년, 고려가 475년이라고 정리하였다. 이는 곧 우리 나라의 역사를 고조선-사국(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고려로 정리하는 인식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그 후에 유득공 같은 사람이 나와서 발해를 포괄해서 고대 후기를 남북국시대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주장이 타당함은 물론이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한백겸의 설을 받아들이면서도 삼한 정통론을 세워 예맥, 옥저, 가락, 가야 등은 소국의 반열로 편입시킨 한계성은 있으나, 한나라 건무 18년(서기 42)조에서 “가락국 시조 김수로 원년인데, 이 해 이후 대국(大國)이 셋이고 소국(小國)이 하나로 모두 네 나라이다.”라고 하여 사국시대를 인정했다. 한치윤과 한진서는 <<해동역사>>에서 가야와 임나에 관한 모든 사서의 기록들을 종합하여 이를 상호간에 관련지어 이해하려고 했다. 정약용은 <<강역고>>에서 김해의 가락국이 가야제국의 총왕(總王)이었고, 가야는 해운을 잘 이용했으므로 같은 시대에 신라보다 훨씬 더 발달할 수 있었다고 하여, 근대적인 가야사 연구의 단서를 열었다.
3. 가야사에 집중된 잘못된 생각들의 기원
고려 후기 이후 수백 년에 걸쳐 선조들의 역사 경험이 넓어지고 연구가 심화되면서 신라 중심적인 협소한 역사 인식은 수정되어왔다. 그래서 이제 대부분의 역사 개설서에서는 우리 역사의 연원을 고조선부터 찾고 있고, 고구려의 개국 연대를 신라보다 높이 올려보고 있으며, 발해가 개국한 698년 이후의 역사를 남북국시대라고 일컫고 있다. 그러나 가야사에 대해서만은 실학자들의 연구 동향을 계승하지 못하고, 오히려 ‘약한 나라’, ‘작은 나라’, 그리고 결정적으로 수치스럽게도 ‘다른 나라들의 통치를 받기만 하던 나라’로 생각하고 있다. 가야사에 대한 이러한 선입견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실학자들의 올바른 연구 경향이 왜곡된 것은 일제 강점기를 전후하여 우리에게 강요된 식민사학의 결과이다. 19세기 말부터 일제의 역사가들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공황후 삼한 정벌 설화를 비롯한 여러 가지 왜곡된 사료들을 토대로 하여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다. 즉 369년부터 562년까지 약 200년간 고대 왜 왕권이 가야 지역을 정벌하여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백제와 신라를 영향력 아래 두어 남한을 경영하였다는 논리이다.
일제 시기에 그들이 우리에게 가르친 역사 교과서는 신공황후와 왜 왕권의 위대성을 선전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우리의 국권을 되찾은 이후에 교과서는 바뀌었으나, 가야사 부분은 거의 삭제되거나 극도로 축소되었다. 이는 그동안의 일제의 선전에 어느 정도 물들어 스스로 그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열등감에 빠진 탓도 있고, 또 우리 손에 의한 가야사 연구가 부족하여 그에 대한 대항 논리가 준비가 안 된 탓도 있다. 그래서 모두들 가야사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모르는 척 하면서 50년이 넘게 흘렀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고고학이 발달하고 역사에 대한 이해가 증가하면서 가야의 풍부하고 수준 높은 유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반성으로 일본에서는 일본의 고대 문명이 한반도 남부 가야 지역에서 건너온 기마민족에 의하여 건설되었다는 설이 나오고, 북한에서는 가야를 포함한 삼국의 주민들이 일본 열도에 많은 소국들을 건설하여 본국과 주종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설이 나왔다. 반면에 남한에서는 가야는 고대 일본의 지배를 받은 것이 아니라 백제의 지배를 200년간 받았다는 해석이 나오고 말았다.
남들이 먼저 인정해주는 가야의 힘을 우리가 가장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십 년간 가야 지역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거기에서 고대 왜국의 지배라든가 백제의 지배, 또는 신라의 지배를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풍부한 부와 기술, 특히 제철 능력에서 나오는 무력과 토기 문화의 선진적인 면모 속에서 오랜 기간에 걸치는 가야 문화의 독자적인 성격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이제는 늦게나마 가야사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을 바꿀 때가 되었다.
4. 사국시대의 필요성은 절대적
가야는 문헌 기록에서 서기 42년에 건국하여 562년에 멸망했다고 나오고 있지만, 실제로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기원전 2세기 말 내지 1세기 초에 서북한 지역으로부터 철기 및 회색 토기를 기반으로 하는 발달된 문화가 들어와 각각의 지역에서 성립되기 시작했다. 즉 가야는 처음 시작부터 신라에게 조금도 뒤진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신라와 마찬가지로 2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소국이 형성되고, 3세기에 들어와 김해와 경주를 중심으로 완만한 연맹체를 조성했으며, 3세기 후반 이후로는 김해의 구야국과 경주의 사로국이 좀더 강한 연맹체의 중심으로 대두하기 시작했다.
그 시기에 고구려와 백제는 한반도 서북부에 들어와 있던 중국 군현과의 대항 과정에서 보다 빨리 성장하여 이미 중앙 집권적인 고대 국가로서 대외적인 정복 활동을 벌였다. 그리하여 4세기 초에 고구려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하고 백제와 국경을 접한 이후로는 서로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4세기 중후반에는 백제가 우세를 점했고, 4세기 말 이후로는 고구려가 대세를 주도했다. 그 시기에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고, 가야는 백제와 연결하여 왜와의 중개 교역을 이루었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쟁패가 그에 연결된 하위 세력인 신라와 가야에도 영향을 미쳐, 결국은 고구려의 직접적인 무력 개입으로 400년에 김해 가락국을 중심으로 한 전기 가야 연맹이 해체되고 말았다.
5세기 후반에 가야 연맹은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다시 부흥한 뒤 6세기 초까지 소백산맥 서쪽의 호남 동부 지역까지 포괄하며 발전했다. 그러나 이 후기 가야 연맹은 체제 결성의 시기가 늦어서 중앙 집권화의 정도가 약했었는데, 6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고구려가 내분에 휩싸이며 약화되자 신라와 백제가 경쟁적으로 이를 위협 또는 공격하여 흡수하려고 했다. 그런 와중에 532년에 김해의 금관국을 병합하고 나서 신라는 비로소 약소국에서 벗어났고 562년에 고령의 대가야국을 병합한 후로는 당당한 삼국의 일원으로 고구려 및 백제와 겨룰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국 고대 시기의 대부분은 고구려와 백제의 2강과 신라와 가야의 2약이 서로 뒤엉켜 세력의 균형을 이루며 전개되었다. 가야를 포함한 사국시대의 관념은 한국 고대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관건이며, 임나일본부설의 망령을 당당하게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다. 게다가 5세기 초에 전기 가야가 해체될 때에는 수많은 이주민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일본에 제철 기술과 단단한 도질토기인 스에키 제작 기술을 전해주기도 하였으며, 일본의 고대 문명은 거기서 비롯되었다. 가야는 비록 완성되지 못하고 멸망된 아쉬운 문명이지만, 한국 고대사의 수치가 아니라 자랑이며 신라가 훗날 삼국 통일을 이룰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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