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ongik.ac.kr/~kayakim/openlec/Gimhae/Gimhae2-2.htm
김해 지방에는 신석기 시대 이래로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이 보이는데, 그들은 곳곳에 패총을 남기며 주로 어로생활을 통하여 생업을 이어왔습니다. 기원전 6~7세기 이후로는 이 지역에도 농경에 기반을 둔 지석묘-무문토기 문화가 나타났습니다.
김해 지방 가야 소국의 형성 과정
김해 지방에는 신석기 시대 이래로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이 보이는데, 그들은 곳곳에 패총을 남기며 주로 어로생활을 통하여 생업을 이어왔습니다. 기원전 6~7세기 이후로는 이 지역에도 농경에 기반을 둔 지석묘-무문토기 문화가 나타났습니다.
기원전 2세기 이후로 청동제 검, 삼각끌, 철제 도끼, 흑도장경호 등을 부장한 서북한 계통의 옹관묘, 토광목관묘 및 세형동검 관계 유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한 존재가 수로왕이 출현하기 이전의 9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들 사이에 9촌장의 합의체와 같은 것이 있었고, 그들 사이에 초월적 지배자는 없어도 일정한 서열은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서기 1세기로 넘어오면서 김해시 주촌면 양동리 일대에서 철기와 와질토기 유적이 계기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은 후기 무문토기 문화와의 타협 아래 토착화하여 발전해 나갔으며, 1세기 말, 2세기 초의 토광목관묘 유적인 양동리 55호분의 피장자는 하늘의 권위를 나타낸다는 철단검, 청동거울(銅鏡), 옥(玉)의 조합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정일치적 지배자의 면모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수로왕은 그와 같은 존재였을까요?
김해 양동리 162호분은 가야의 대형 토광목곽묘 유구로서 이른 시기인 2세기 중반 무렵의 것입니다. 이 고분의 피장자는 세형동검에서 발전한 대형 철검 6자루와 길이 60㎝의 대형 철모를 비롯한 다수의 철모를 소유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당시의 화폐인 판상철부를 목관 네 모서리에 다량 깔고 있고, 주술적 힘의 상징이라고 보이는 청동거울(銅鏡)과 많은 구슬을 꿰어 만든 화려한 목걸이로 치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양동리 162호분의 주인은 주술적인 힘과 경제적인 부 및 정치적인 권력을 모두 갖춘 소국의 수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김해 지방에서는 2세기 중반에 조그만 국가 형태가 등장하였으며, 그 이후로 가야 지역에는 그와 같은 소국들이 낙동강 유역 및 경남 해안 지방의 여기저기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 金泰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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