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ongik.ac.kr/~kayakim/openlec/Gimhae/Gimhae4-3.htm

가야 소국의 사회 구조, 제정일치적인 면모와 그 한계성, 귀금속을 선호하는 귀족 계급의 존재 여부
가야의 계급구조 
 
2~3세기 당시에 변한, 즉 전기 가야 12국은 각기 2,000호(戶), 인구 1만 명 정도를 지배하는 독립 세력이로되 상대적인 규모의 차이가 존재하는 상태였으며, 이러한 상태는 마한 50여 국이나 진한 12국의 경우에도 대략 비슷하였습니다. 지금의 경상남북도에 41개 시(市), 군(郡)이 있는 것에 비하여 당시에는 진변한 합쳐서 24개의 소국이 있었으니, 하나의 소국이 차지하는 지역 범위는 지금의 군(郡) 2개 정도를 아우른 정도였습니다.

각 소국들은 국읍(國邑) 하나와 다수의 읍락(邑落)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국 내부의 권력이 국읍에 집중되어 있지 못하고 그를 포함한 다수의 읍락에 분산되어 있어서, 국읍의 주수(主帥)가 각 읍락의 거수(渠帥)들을 잘 제어하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국읍 내에는 정치적 기능을 담당하는 주수와 달리,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는 천군(天君)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소국 지배 권력은 초기 왕권의 신권적(神權的), 또는 제정일치적(祭政一致的)인 단계보다는 발전하였으나, 아직 천군(天君)의 종교적 권위를 초월하지 못한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전기 가야 소국들은 내부 구조의 면에서 일단 권력자가 출현하고 정치적, 종교적 권위가 분화되어 있었으나, 아직 사회경제적 계급의 분화, 관료제의 제도화, 중심 세력에 의한 권력 독점 등의 요소를 구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후기 가야 소국들도 하나의 국읍과 몇 개의 읍락으로 구성되어 있고 기본적인 지배 권력은 각 소국 한기(旱岐)에게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가야, 안라, 다라 등 일부 소국은 그 발달이 미약하나마 내부에 관등 체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후기 가야 소국들도 기본적으로는 전기 가야 소국들과 거의 비슷한 내부 구조를 갖추고 있었으나, 맹주국이나 그에 버금가는 소국들의 경우에는 그보다 발전된 면모가 인정됩니다.
 


또한 『삼국지』의 기록에 의하면 삼한 사람들은 구슬을 보배로 여겨 몸에 치장하였지만 금은(金銀)은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고고학적인 유물로 보더라도, 2~4세기의 김해 양동리나 대성동 고분군 등에서 화려한 구슬 목걸이들은 다량 출토되었으나, 금은 제품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로 보아 가야 지역에서 구슬을 많이 이용하여 화려한 장신구를 소유하는 귀족 계급이 늦어도 2세기 후반에는 생겨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든 사치품에 대하여 왕성한 욕구를 갖지 못하고 구슬만을 선호했다는 것은 어떤 주술적인 사고방식에 의한 것일 수도 있으므로, 귀족 계층이라고 해도 아직은 사회경제적으로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상태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다가 5세기 이후로는 가야의 여러 나라들에서 관(冠), 귀걸이, 목걸이, 반지 등의 장신구와, 대도(大刀), 마구(馬具), 관(棺) 등의 소품들도 구슬뿐만 아니라 금, 금동, 은과 같은 귀금속으로 장식하여 사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5~6세기에는 가야 사회에 사회 경제적인 부(富)에 바탕을 두고 귀금속을 선호하는 귀족 계급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충분히 논할 수 있습니다.
 
다만 4세기 이후로는 가야 지역의 여러 고분 내부에서 신분이 높은 사람의 사후(死後) 세계의 시중을 위하여 시종들을 순장(殉葬)한다든가, 여러 고분군들 사이에 규모나 유물의 질 등의 면에서 우열의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이로 보아 가야 사회의 구조는 2세기 이후로 6세기에 걸쳐 점진적으로 계층화되어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金泰植>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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