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daum.net/jirisanlove/9512079http://bit.ly/1mvSDYKhttp://vadada.tistory.com/354 
* 사진은 너무 작아서 문화재청에서 비슷한 사진으로 가져왔고 기마인물형 토기는 내용상 뒤로 뺐습니다.

가야가 살아온다 <5>
제1부 낙동강의 여명 ④ 신라 문화의 자양분 / 
삼국통일의 자양분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동 만옥정공원. 비화가야의 옛땅인 이곳 기슭에는 ‘진흥왕 척경비’(眞興王 拓境碑·국보 제33호)가 우뚝 서 있다. 이 비석은 우연히 발견됐다.
 

경남 창녕의 진흥왕 척경비. 이 늠름한 비석은 신라 전승의 기록인 동시에 가야 망국의 표식이기도 하다.

“1914년 초봄이었다고 해요. 창녕보통학교 학생 하나가 창녕읍 말흘리 화왕산 기슭(송현고분 근처)에 소풍을 갔다가 논두렁에서 큰 비석을 발견했다지. 이를 전해들은 일본인 교장이 본국에 신고해 조사가 됐는데, 이게 진흥왕 척경비 였어요. 발견전까지는 주민들이 돌다리로 사용했다는 소리도 있지요.”

가야사 연구자 김세호(85)옹의 술회다. 김옹은 가야사 저술활동을 통해 고대 창녕이 분명한 가야 영역임을 주장해온 향토사학자다.

비석이 세워진 때는 서기 561년(진흥왕 22년), 대가야 멸망 1년전이다. 554년 관산성(충북 옥천) 대첩으로 한강유역을 장악한 진흥왕은 이듬해 창녕의 비화가야를 병합하고 척경비를 세워 가야 서쪽지역 진출의지를 과시했다.

비석에는 진흥왕을 따라온 군신 42명이 관등에 따라 적혔는데, 그 중에는 금관가야의 왕자 김무력(金武力)도 보인다. 이에앞서 금관가야의 구해왕은 532년 신라의 압박과 회유에 못이겨 나라를 신라에 들어바쳤다. 김무력은 구해왕의 아들이자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의 할아버지다.

이 비석은 신라의 전승기록이자 비화가야의 멸망 표식이다. 이를 계기로 창녕 땅에는 가야식 미학이 퇴조하고 신라식 미학이 자리잡는다. 통일신라기에 세워진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국보 제34호)이 불국사 석가탑을 빼닮은 것은 이를 잘 말해준다.

삼국사기’의 승자적 기록

금관가야의 멸망원인에 대해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이렇게 쓰고 있다.

‘법흥왕 19년(532년)에 금관국주 김구해(金九亥)가 비(妃)와 삼자(奴宗, 武德, 武力)와 함께 보물을 가지고 내항하매, 법흥왕은 예로 대접하고 금관국을 식읍으로 주었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이와 다르다. ‘신라 진흥왕이 군대를 일으켜 금관국을 쳤는데, 구형왕이 병력이 부족하여 대적할 수 없어 왕자들과 함께 항복했다…’.

반면 ‘일본서기’에는 ‘남가라(금관가야)는 (신라의 침공에) 미리 준비하지 못하고 의탁할 곳을 몰랐기 때문에 멸망했다’고 기록했다.

학계는 이같은 사료를 근거로 금관가야는 멸망기에도 무시못할 세력이었으나 자진귀속의 형식을 취하자 신라가 파격적인 대우를 한 것으로 풀이한다.

562년 신라의 대가야 병합으로 한반도는 비로소 삼국시대가 되는데 이 시기는 불과 98년 밖에 안된다. 따라서 가야를 빼고는 삼국시대를 제대로 이야기하기 어렵다.

해양교역 주도권 이양

부산 복천박물관은 부산아시안게임에 맞춰 ‘만남-고대 아시아 문물교류전’(9월 17일~11월17일)을 열고 있다. 한반도에서 출토된 외지산(外地産) 유물 220여점은 고대의 문물의 흐름을 읽게 하고 당시 신라의 서라벌이 국제도시였음을 웅변한다.

이와관련 학계 일각에서는 황남대총에서 나온 페르시아풍의 금제팔찌와 로마풍 유리잔 등은 남방해로를 통해 신라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남방해로는 가야 제국이 일찌기 닦아놓은 남해안 해상교역로를 포괄하는 바닷길이다.

여기서 간과되어선 안될 것이 가야의 숨은 역할이다. 법흥왕 19년(532) 신라의 금관가야 병합은 해양 주도권의 방향을 신라쪽으로 전환시킨 분수령이었다. 이를 계기로 신라는 동북아 해양 문화교류의 네트워크에 본격 동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 원동력을 흔히 한강유역 확보에서 찾는 경우가 많은데, 가야 제국이 만든 국제화의 토양 역시 단순히 보아서는 안된다는 지적이다.

신라·백제에 뒤지지 않아

가야문화가 선진적이었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는 그릇류다. 같은 시기 신라 백제에서 나타나는 것보다 제작기술이 뛰어나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기원전후 한반도에 토기혁명을 가져온 김해식 토기(삼한시대)가 처음 출현하고, 1천℃ 이상의 고온에서 구운 회청색 경질토기가 꽃을 피운 곳도 가야지역이다.

부산 복천동에서 출토된 동물장식 그릇받침이나 함안에서 나온 수레바퀴모양 토기와 화염형 투창고배 등은 장식미와 세련미의 절정을 보여준다.

5세기대로 접어들면서 낙동강을 경계로 동쪽은 신라토기권, 서쪽은 가야토기권으로 구분되지만, 가야 각국은 멸망때까지 이른바 김해식, 함안식, 고령식, 창녕식 등 지역색이 강한 독특한 토기문화를 형성했다.

그러나 6세기 중반 이후 가야 제국이 정치적으로 신라에 복속되면서 가야토기는 신라화되기 시작해 7세기대에는 통일신라 양식으로 바뀌어 버린다.

가야의 철기문화가 신라에 끼친 영향도 과소평가될 수 없는 부분. 홍익대 김태식(역사교육과) 교수는 “5세기초의 경주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주조 쇠도끼, 쇠삽날, 쇠스랑 등은 고구려의 남정(南征) 이후 신라가 가야 계통의 제철 및 철기제작 집단을 획득한 후 그들을 다시 편제, 급증한 철기생산 능력을 철제 농기구 분야에 집중시킨 결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가야사 연구자들은 “가야가 없었다면 과연 신라문화가 화려하게 피어났을까”라면서 가야의 문화적 힘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임나흥망사’를 정리했던 일본학자 스에마쓰(末松保和)는 ‘가라(加羅)’의 문화를 신라 백제와 비교해서 저급한 수준이라고 규정했으나, 이는 단견이거나 의도적 폄하다. 

최근 학계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전성기의 가야는 군사·사회·문화적으로 신라 백제에 결코 뒤지지 않으며 그 저력은 삼국통일의 자양분이 됐다는 것이다. 

/박창희 기자 / 특별취재팀

출처 : http://vadada.tistory.com/354 
* "가야가 살아온다 <5> 신라 문화의 자양분 - 국제 (http://tadream.tistory.com/11543)"의 딸린 기사 또는 박스기사인 듯.

<5> 가야문화의 진수, 기마인물형 토기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가야 기마인물형 토기.

말 탄 인물의 표정이 꽤 심각하다. 갑옷에다 투구(갑주), 방패, 목가리개(경갑)까지 두른 완전무장이다. 창끝이나 화살촉 하나 비집고 들어올 틈새가 안보인다.

한바탕 기마전을 치르러 전장으로 나가는 인물은 아마 가야의 우두머리일 것이다. 방패 뒤로 얼굴을 살짝 감추었지만 눈은 전장을 바라보고 있다. 이마 쪽으로 치켜 올라간 눈썹에서는 용맹이 우러나온다.

호마인듯 키가 휜칠한 말도 무장을 했다. 꽤 무거워 보이는 말갑옷(마갑)은 함안 도항리에서 출토된 것과 흡사하다. 머리가리개(마면주)는 씌우지 않았다. 숨을 쉬고 있는듯 정교하게 다듬은 말머리의 조각솜씨를 자랑하기 위해서일까.

다소 회회적인 바리모양의 투구, 전형적인 가야 양식의 나팔형 고배, 말 엉덩이에 갖다붙인 뿔잔 두개가 인상적이다. 전투의 나날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으려는 가야인의 생활태도를 엿보는 듯하다.

‘전(傳)김해 출토’로 알려진 이 기마인물형 토기는 대구에서 의사로 활동했던 이양선씨(작고)가 지난 90년초 경주박물관에 기증했고, 93년 1월 국보 제275호로 지정됐다. 높이 23.2㎝, 너비 14.7㎝.

김해시는 시청 경내에 이를 대형 조형물로 복원해 시 상징물로 삼고 있다.

경주박물관 김홍주 학예연구실장은 “소장자의 전언과 토기양식으로 볼 때 김해 출토물이 틀림없다”면서 “가야시대 무구류, 마구류, 기마병 연구에 둘도없는 소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부산대 박물관 정징원 관장은 “도굴품인 관계로 출토배경 등 중요한 고고학적 정보가 소실된 점이 아쉽다”고 지적했다.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