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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가 살아온다 <3> 日 토기에 새겨진 가야인의 숨결
제1부 낙동강의 여명 ② 일본 속 가야 르포
지난달 26일 오전 부산~후쿠오카행 쾌속여객선. 일본 속 가야의 자취를 찾기 위해 취재진은 배편을 선택했다. 1천7백여년전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진출한 가야인의 뱃길과 그들의 복잡한 심사를 헤아려보기 위해서다.
부산서 출발한 지 1시간30분쯤 지나자 현해탄 오른쪽으로 쓰시마(對馬島)가 손에 잡힐듯 모습을 드러냈다. 넘실거리는 파도속에서 가야인들이 고대 목선을 타고 쓰시마로 들어가는 장면이 오버랩됐다.
쓰시마와 일본열도 중간에 위치한 이키(壹岐)섬은 안개에 파묻혀 있었다. 이곳 역시 가야인을 포함한 한반도 남부인들이 일찌감치 문명 교류의 물꼬를 튼 지역. 그동안 수차례의 발굴을 통해 쓰시마와 이키는 한반도 문물이 뿌리를 내린 전초기지이자 한일교류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것으로 드러나 있다.
3세기말 편찬된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는 구야한국(김해)~쓰시마~이키~규슈 북부를 경유하는 고대 항로가 나온다. 취재진은 이를 염두에 두고 행선지를 잡았다.
남은 것은 가야인이 남긴 흔적과 숨결을 만나는 일.
스에키에 감춰진 비밀
취재진은 가야의 자취를 좇아 오사카 인근 사카이(堺)시의 매장문화재협회를 먼저 들렀다. 협회 관계자는 지난 91년 발굴된 오바데라(大庭寺), 스에무라(陶邑) 유적지에서 나온 초기 스에키(須惠器)를 내보였다. 스에키는 서기 4세기말~5세기에 생산된 회청색의 토기로, 두드리면 쇳소리(스에=쇠)가 난다 하여 붙여진 이름. 이전의 적갈색 토기인 하지키(土師器)와는 제작방법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협회측이 다른 유물을 제쳐 두고 스에키를 선뜻 내보인 이유는 뭘까.
동행한 부산대 김두철(고고학과) 교수가 궁금증을 풀어준다. “스에키는 가야 각지의 영향을 두루 받은 후 일본식 토기로 변해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일본 고분시대의 편년이 여기서 만들어졌을 정도로 고고학적 의미도 크다. 스에키는 또 고대 한일간 교역관계를 푸는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이 스에키를 근거로 고고학자들은 5세기 중엽 전후 가야의 도공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제작기술을 전파하고 현지에서 생산까지 시작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어 찾아간 곳은 오사카(大阪)부립 센노쿠(泉北) 고고자료관. 여기서도 가야인들의 곰살궂은 손길을 연상케하는 스에키를 만날 수 있었다. 이곳에 전시된 7세기 중엽의 도관(토기로 만든 관) 파편을 본 취재진은 눈이 번쩍 뜨였다. 파편 표면에 ‘安留白 伊飛寅 作’이란 한국식 이름과 작자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 누구일까.
오사카부 문화재센터 보급부장 후쿠오카 수미오(53·福岡澄男)씨는 이에 대해 “일본에서 출토되는 토기나 도관에는 7세기 무렵부터 문자를 새긴 자료가 많다. 이름으로 봐서 한반도에서 온 장인이 만든 게 분명하다”고 말했다.
가야인들의 당당한 이주
일본에 정착한 한반도인이 현지에서 제작한 기물에 이름을 새겼다는 것은 그들의 위세가 당당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취재진은 사가현 요시노가리 유적지에서 일찍이 삼한시대부터 일본열도로 이주한 한반도 남부인의 정체성에 대해 한발짝 더 다가설 수 있었다.
요시노가리 유적지는 일본 최대의 환호 취락터를 국가사적 역사공원으로 개발한 곳. 야요이 시대의 마을이 구니(國) 중심의 취락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밝혀주는 유적지다.
이곳의 다양한 유물들은 한반도인들이 현지인과 더불어 ‘고대 도시’를 당당하게 누빈 사람들이란 것을 확인시킨다. 지난 86년 발굴조사 때 옹관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한반도인 인골 300여구는 현지인이 묻힌 중심부와 외곽지 묘역에 분산돼 있었던 것.
동행한 국립김해박물관 손명조 학예실장의 말. “한반도 남부인들은 변한시대부터 일본과 교류하며 이주를 했다. 일본으로 건너갈 때부터 상하 관계가 확실히 구분되는 집단 형태를 유지했고 그 틀은 일본에서도 존중된 것으로 보인다.”
가야인들의 일본열도 진출은 일본의 사서인 ‘고사기’ ‘속일본기’ 등에 비교적 세세하게 언급돼 있다. 서기 815년에 작성된 일본 최고의 씨족지 ‘신찬성씨록’에는 ‘임나(任那)’라 표기된 가야 계통의 씨족이 10개 부류로 소개돼 있다.
이들은 스스로 가야후손임을 자처한 셈이다.
첨단기술까지 수출
요시노가리 유적지를 관리하는 시치다 다카시(七田忠昭·사가현 교육청 문화과 전문원·50)씨는 지난 17년간 발굴에 종사하면서 한반도인의 숨결을 자주 느꼈다고 토로했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한반도형 우각형 파수 토기(소뿔 같은 손잡이가 달린 토기), 한반도 특산인 철로 만든 낫, 철정(덩이쇠) 등 다양한 유물을 보여줬다.
학계에서는 제조공정이 까다로운 철정은 대부분 가야에서 제작돼 수출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고대 한·일간에는 실물 뿐만아니라 원자재까지 교역됐다는 것을 말해준다.
취재진의 다음 행선지는 이키섬. 동서 15㎞, 남북 17㎞인 이키섬의 하루노쓰지 유적은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 언급된 이키코쿠(一支國)의 수도로 밝혀졌다.
여기서 발굴된 주조 쇠도끼, 삼한계 회백색 연질토기 등은 모두 한반도와의 활발한 교역을 증명하는 유물들. 출토 유물 가운데 토기가 유독 많은데 이는 한반도인의 ‘도래 규모’가 그만큼 많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진정한 가야찾기 지금부터
일본 속 가야의 흔적은 도처에 늘려 있었다. 이를 해석하는 한일학계의 시각차도 엄존했다. 일본학계는 가야인들의 일본행을‘귀화’ ‘도래’로 표현하지만 한국학계는 ‘진출’로 이해한다. 자국 중심의 역사관은 쉽게 용해될 것 같지 않았다.
김두철 교수는 “한반도의 선진문물이 무조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식의 논의는 이제 지양돼야 하며 교류사적 관점을 따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취재 중 만난 후쿠오카대 다케스에 주니치(武末純一·고고학) 교수는 “고대 한일교역은 쌍방향으로 이해해야 한다. 한반도의 선진 토기와 철기가 일본에 유입된 것은 분명하지만, 일본 쪽에서 거꾸로 영향을 준 것도 있다”고 말했다.
동의대 정효운(일어일문학) 교수는 “이제는 가야사의 입장에서 가야인을 주체로 내세워 고대 일본 진출문제를 적극 연구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가야인을 포함한 고대 한반도인의 일본 이주 배경, 이주 규모, 현지에서의 역할이나 삶과 죽음 , 삶과 죽음 등은 앞으로 자료발굴 등을 통해 밝혀야 할 과제다.
취재진은 일본 속 가야는 비교적 풍부한 자료와 자취에도 불구, 그 실체는 여전히 안개속에 가려져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 오사카=박창희기자
/ 규슈=서동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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