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qvIZwR
<24>연수영 (상)
唐 무찌른 우리 역사 최초 여장군
2010. 08. 12 00:00 입력 | 2013. 01. 05 05:49 수정
연수영이 처음 성주로 부임해 수군을 양성한 요동반도 남해안 석성 유적.
연개소문과 연수영 남매를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돈황석굴의 벽화.
우리 역사에는 여왕도 있었다. 또 여왕에 못지않게 권력을 휘두른 태후와 왕비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남자들 못지않게 맹렬히 활약한 여장부도 많았다. 그러면 여성 장군도 있었을까? 대답은 ‘그렇다’다.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따르면 가야시대에는 여성으로만 구성된 여군부대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가야시대 고분에서 투구와 갑옷을 입고 무장한 상태의 여성 시신이 발굴됨에 따라 이를 근거로 여성 군사지휘관의 존재를 추정하게 된 것이다.
동명성왕 고주몽(高朱蒙)을 도와 고구려를 건국하고, 나중에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두 아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망명해 새 나라를 세운 백제의 국모 소서노(召西努)도 여자의 몸으로 군사를 거느렸으며, 때로는 전투에 앞장섰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정규군 장수도 있었을까? 있었다. 고구려의 연수영(淵秀英)이 바로 그렇다. 그녀는 정규군 장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1300여 년 전 고대에 해군 최고지휘관이었다. 연수영은 다름 아닌 당시 고구려의 최고집권자인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누이동생이었다.
비록 사서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고구려 말기 해군기지가 있던 발해만의 비사성과 석성 등지에서 연수영의 존재를 증명해 주는 비석이 발굴된 것은 근래. 비록 금석문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고구려 말기에 연수영이란 여장군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요녕성 청석관 유적에서 연수영에 관한 비문을 처음 발굴한 사람은 1940년대에 개주 현장을 지낸 신광서라고 하며, 우리나라 학자로는 1995년에 건안성과 청석관 일대 연수영의 유적을 답사하고 비석의 사본 일부를 구해 온 고구려사 연구가인 한민족역사연구소 김금중(錦中) 소장으로 알려졌다. 이어서 당시 고구려연구회 이사장인 서경대 서길수(徐吉洙) 교수, 고구려 해양사를 연구한 동국대 윤명철(尹明喆) 교수 등이 현장을 답사했는데, 현장에 서 있는 것은 중국 측에 의해 새로 세워진 안내판에 불과했다고 한다. 내용도 하나같이 이러저러한 전설이 있다는 식이었다.
연수영이란 존재를 우리 학계가 주목한 것은 2003년에 중국 측이 청석관 유적지를 유네스코에 등록한 것이 계기였다. 그동안 국내에선 연수영 관련 비문 발굴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다가 유네스코 등록을 계기로 비로소 공론화한 것이다. 현지 전설이나 비문에 고구려와 당의 해전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심지어는 연수영의 사당까지 있다는 사실도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학계는 아직도 연수영의 존재를 우리나라와 중국의 그 어떤 사서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연수영 관련 유적은 현재 중국의 해군기지가 됐고, 비문 등도 중국정부에서 기밀로 엄중하게 관리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접근할 수 없는 실정이다.
한편, 중국의 야사인 ‘서곽잡록’과 ‘비망열기’라는 책에도 연수영의 전설이 실려 있다. 연수영의 이름이 연소정 또는 개수영으로 나오는 자료도 있다. 하지만 사서에 나오지 않는다고 엄연한 사실(史實)을 무시하거나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중국의 사서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대표적인 정서로 인정하는 ‘삼국사기’에도 수많은 오류가 있지 않은가. 사서의 기록보다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인들의 손으로 새겨진 비문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지금도 고구려의 크고 작은 성들이 있던 요동지방에 가면 여러 곳에 연개소문과 연수영의 전설이 생생하게 서려 있다. 특히 연개소문과 연수영 남매가 머물던 곳에서는 우리 동포 조선족이 아닌 중국인들도 당태종보다 연개소문을 신장(神將)처럼 추앙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연수영은 610년 무렵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일설에는 연수영의 아래로도 연수진이란 여동생이 더 있었다고 전한다. 집안이 대대로 무장을 배출한 만큼 연수영도 어려서부터 무술을 수련했을 것으로 보인다.
연개소문이 비뚤어진 나라를 바로잡고자 혁명을 일으킨 것은 영류왕 25년(642) 9월이었다. 연수영도 오라비가 주도한 이 혁명에 자신이 거느린 낭자군(娘子軍)들을 이끌고 참여했을 것이다.
연수영이 고구려의 전략적 군사요충인 석성 도사(성주)로 부임한 것은 오빠와 함께 혁명을 일으키고 보장왕을 새 황제로 내세운 직후였다. 연수영이 중앙정계를 떠나 변경의 지방관으로 내려간 이유는 분명치 않다. 연수영이 도사로 있던 석성 소장루에서 발견된 비문 내용을 소개한다. ‘소장루는 연개소문이 자기 누이 개수영(연수영)을 위해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원래 있던 누각은 없어졌고 지금 있는 것은 원래대로 고친 것이다. 연수영은 여자 장수라 다른 장령들과 내성에서 함께 살 수 없기 때문에 홀로 이 누각에서 산 것이다. 개수영은 문예·군략·무예가 뛰어났기 때문에 성을 지키는 으뜸 장수가 됐다. 연수영은 나라를 연 이래로 수군의 장수로는 다른 장수들을 능가해 가장 뛰어났다. 이곳 소장루는 날마다 군무를 처리하는 중요한 곳이었다.’
연수영의 정확한 생몰연대는 미상이며, 활약상도 주로 642년에서 651년의 10년 정도에 불과하다. 이는 고구려가 당에 멸망했고, 그 시기의 역사는 중국인의 손으로 쓰여 온전한 고구려의 역사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아 있는 명문(銘文)의 편린을 통해서나마 연수영이 남성 못지않게 문무의 재능이 탁월하고, 지략과 리더십이 출중했다는 사실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녀가 혁명 이후 중앙의 요직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할까. 자신의 지분(持分)을 포기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혹시 연개소문 (이복)남매 간에 무슨 내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평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적군(당군)이 쳐들어오면 육지보다 바다에서 막아야 한다. 바다는 하늘이 내린 요새이니 이 바다를 지키는 장수가 되고 싶다.” 그래서 그녀는 수군 장수가 됐고, 당나라와 전쟁이 벌어지자 눈부신 활약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연수영은 요동반도 남해안 장산군도 지역에 여러 성곽을 개축하고, 전함을 수리 건조하고,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등 수군 양성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것이 643년 무렵. 이에 따라 고구려의 해군력은 이전보다 훨씬 증강하게 됐다.
연개소문이 혁명을 일으켜 황제를 바꾸고 최고 권력자가 됐다는 보고를 받은 이세민은 고구려정벌군을 일으켰다. 보장왕 4년(645) 4월에 요하를 건넌 당군은 요동성·개모성·백암성을 점령하고 안시성을 포위했다. 당시 안시성 성주는 지용을 겸비한 출중한 장수 양만춘(楊萬春)이었다.
그러면 고당전쟁(高唐戰爭)에서 연수영은 어떤 활약을 했던가. 지금까지 알려진 금석문의 기록들을 토대로 살펴본다.
<황원갑 소설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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