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mLDzpU
<25>연수영 (하)
당나라에 연전연승 …고구려 해전사 빛낸 여걸
2010. 08. 19 00:00 입력 | 2013. 01. 05 05:50 수정
장산군도 해협은 연수영과 고구려 수군이 최대의 승리를 거둔 곳이다.
조선시대의 주력선 판옥선. 우리나라 고대 해군의 전함도
이와 비슷한 구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사성은 연수영이 수군 원수로서 요동함대의 본영으로 삼던 역사의 현장이다.
보장왕 1년(642)에 석성도사로 부임한 연수영은 당군의 침략에 대비, 수군의 증강부터 착수했다. 그녀는 5000명의 군사를 수군으로 양성했으며, 70여 척의 전함도 건조했다. 연수영은 실권자 연개소문의 누이동생이라는 후광이 아니라 남자 장수 못지않게 문무에서 탁월한 능력과 비상한 통솔력으로 부하 장졸의 신망을 받았다.
보장왕 4년(645)에 드디어 당군이 쳐들어왔다. 전쟁이 터지자 연수영은 당군의 수군기지인 창려도로 진격해 적함 100여 척을 불태우고, 곧이어 성산성의 적군을 쳐서 무찌르니 죽은 당군이 2만 명에 이르렀다. 연수영은 이 군공으로 석성도사에서 수군장군 겸 모달로 승진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군사를 이끌고 대흠도와 광록도 등지에서 각각 적선 50여 척을 불사르고 8000여 명의 적군을 죽였다. 하지만 아군은 연수영의 빼어난 군략 덕분에 피해가 거의 없었다.
잇달아 노백성과 가시포에서도 적선 80여 척을 불태우고 적군 5000여 명을 죽이는 전공을 올렸다. 이 전공으로 연수영은 수군군주로 승진했으며, 본진을 광록도 부근 노백성으로 옮겼다.
이 시기의 중국 측 사서인 ‘신당서’와 ‘구당서’에 당시의 해전 전황이 거의 백지상태인 것은 연수영에게 당한 참패가 너무나 치욕스러웠기 때문에 이를 은폐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역사가들이 자기네 치욕은 감추고 주변국의 빛나는 역사는 모두 깔아뭉개는 것을 역사서술의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당시 해전에서 적장 설만철은 구사일생으로 달아났고, 전함 200여 척, 군사 1만5000명 이상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연수영의 빛나는 연승 행진은 계속됐다. 창려와 성산 전투에서 적선 100여 척을 격침하고 적군 2만여 명을 죽였으며, 대흠도와 광록도 해전에서도 적선 100여 척을 격침하고 적군 8000여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뒀다.
수군의 연전연패에 대노한 당 태종 이세민은 설만철·구행엄·왕대도 등 수군장수들에게 총공격령을 내렸다. 이에 당군이 가시포와 노백성을 침공했지만 연수영의 고구려 수군에게 전선 80여 척과 군사 5000여 명을 잃고 퇴각했다.
사학자 서길수, 전영미 박사 등이 연구한 비사성 발굴 비문에는 보장왕 4년 음력 8월 15일에 벌어진 요동반도 남해안 대장산도 해전에서 당군은 1000여 척의 전함에 10만여 대군을 동원했으나 연수영의 고구려 수군에게 대패해 총 군세의 절반인 수백 척의 전함과 3명의 대장을 비롯해 5만여 명의 병력을 잃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 지역 전설에 따르면 당시 연수영이 거느린 고구려 수군의 병력은 당군의 5분의 1에 불과한 2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 다음 달에 패전보고를 받은 이세민은 이렇게 소리쳤다고 ‘구당서’는 전한다.
“적보다 5배나 많은 군사로도 이기지 못했으니 장차 어찌하랴!”
그 이듬해인 보장왕 5년(646)에는 산동반도 봉래포 해전이 있었다. 당나라 본국을 원정한 이 해전에서도 연수영은 대승을 거뒀고, 그 전공으로 수군원수가 됐다. 그러나 또 해가 바뀐 647년 7월. 이세민은 우진달을 청구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산동성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 공격토록 하고, 이세적을 요동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육로로 침공토록 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연수영과 고구려군의 맹렬한 반격에 아무 소득도 없이 패퇴했다. 그 이듬해에도 설만철이 청구도행군대총관이 되어 3만 명을 이끌고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 박작성을 공격했지만 고구려군의 결사적 응전에 퇴각했다. 연수영은 즉각 보복공격을 가해 적선 수백 척을 불태우는 전과를 올렸으나 군비(軍備)가 바닥나는 바람에 부득이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남을 시기하고 모략하는 부류의 인간이 있게 마련이다. 연수영의 등에 비수를 박은 사람은 어이없게도 그녀의 둘째 이복오라비 연정토였다. 648년 7월, 연정토 일당의 참소로 연수영은 파직되고 부여성으로 유배당했다. 수군원수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연정토였다. 연정토는 수군총수가 되자마자 군공을 탐내 그해 9월에 당의 수군기지인 신성도 협량곡을 공격했다가 참패를 하고 말았다.
그러자 동생들의 군권 다툼에 노한 연개소문이 연정토를 파면해 옥에 가두고 그의 일당에게 철퇴를 가했다. 그리고 억울하게 귀양살이하던 연수영을 다시 등용해 수군군주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고구려는 내분에 휩싸여 국론이 분열되고 국력이 약화된다.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나라가 망한 것은 예외 없이 내우외환 때문이다. 부국강병과 국리민복을 제쳐둔 채 집안싸움이나 하는 나라는 망한다는 진리를 역사는 교훈으로 일러주고 있다.
보장왕 19년(660) 8월에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그해 12월에도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 소득이 없었다. 보장왕 21년에 당군은 정월부터 또다시 고구려를 침공했다. 머리끝까지 노한 연개소문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해 사수싸움에서 당군 총사령관인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 및 전군을 몰살시키고, 평양을 침공하던 소정방까지 패퇴시켰다.
연개소문은 보장왕 23년(664)께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58세쯤 됐을 것이다. 맏아들 남생(男生)이 막리지를 세습해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겨우 3년도 안 돼 세 아들이 권력투쟁을 벌여 결국 고구려를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 보장왕 27년(668), 고구려의 내분을 둘도 없는 호기로 삼은 당은 반역자 남생을 길잡이 삼아 5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했다. 설상가상으로 연정토까지 12개 성을 들어 신라에 항복했다. 신라도 20만 대군을 동원해 당군과 합세, 고구려를 공격했다. 남건·남산 등이 죽을 힘을 다해 도성을 지켰지만 이미 때는 늦어 그해 9월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로써 동명성왕이 개국한 대제국 고구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일세의 여걸 연수영의 최후에 관해서는 오고성에서 발굴된 비석이 이렇게 전해주고 있다.
- 개화(開化) 12년 신해 8월 태대형 연정토, 을상 선도해, 대신 계진 등이 태대사자 연수영이 모반을 도모한다고 참소하니 태왕도 연수영이 다른 뜻을 품었다고 의심했다. 태왕이 고심하다가 연수영을 파면했다. 풍문에는 연수영이 반역을 꾀했다는 참소로 사사됐다고도 하고, 전리로 방출돼 행방이 묘연하다고 했다. 나라사람들은 연수영의 무죄를 믿었기에 이를 매우 통탄했다.… -
이래도 역사책에 나오지 않는다고 연수영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곤란하다. 중국이 연개소문이나 연수영을 고구려의 인물로 인정해 그들의 숨결과 자취가 서린 청석관과 석성, 비사성 등 유적을 유네스코에 등록할 것으로 보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고구려는 ‘중국 변방의 지방정권’이고, 고구려인은 ‘중국 변방의 소수민족’이라고 역사를 왜곡하고 탈취하기 위해서다. 사정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실증주의의 탈을 쓰고 일제 식민사관과 중화 사대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사학자들은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또 아직도 한국사의 영역이 압록강·두만강 이남에 국한된다느니, 이제 민족이란 개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느니 하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내뱉는 민족적 자존심도 주체성도 없는 일부 사학자가 여전히 강단에서 활개 치는 사실도 참으로 개탄스럽다.
다음은 산동성을 공파(攻破)해 당나라를 떨게 한 발해의 대장군 장문휴(張文休)를 소개한다.
<황원갑 소설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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