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knOgik

<13>을지문덕 (중)
2010. 05. 27   00:00 입력 | 2013. 01. 05   05:37 수정

살수대첩을 그린 민족기록화.


제1차 고수전쟁을 승리로 이끈 강이식 장군 영정. 강이식 장군은 진주강씨 시조다. 
 

강이식 장군 묘가 있는 중국 심양 원수림에 남아 있는 석물들.

이에 격노한 수 문제는 그해 6월에 즉각 30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 정벌을 명령했다. 마침내 제1차 고수전쟁(高隋戰爭)이 터진 것이다. 수 문제의 명령을 받은 그의 넷째 아들 한왕(韓王) 양량(楊諒)과 원수 왕세적(王世積)은 육군을 이끌고 임유관을 지나 요동으로 진격했으나 홍수와 군량 보급의 두절에 질병까지 돌아 대부분의 군사가 죽었다. 한편 주라후(周羅喉)가 이끄는 수군도 동래를 출발해 평양으로 향하다가 발해에서 풍랑을 만나 숱한 군선이 침몰하는 바람에 대부분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래서 그해 9월에 30만 대군 중 살아서 돌아간 자는 불과 1, 2만 명뿐이라고 했다. 

이렇게 수나라의 제1차 고구려 원정은 참패로 끝났는데, 이러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9년 조의 내용은 ‘수서’의 기록을 요약한 것에 불과하고,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그 실상이 다른 것으로 나타난다. 단재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서곽잡록’과 ‘대동운해’라는 책을 인용해 당시의 정황을 이렇게 썼다.

- 영양대왕이 수 문제의 모욕적인 글을 받고 대로하여 군신에게 묻자, 강이식(姜以式)이 “이 같은 오만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회답함이 가하다”고 적을 칠 것을 주장, 대왕이 이를 기꺼이 좇아 병마원수로 삼아 5만 정병을 임유관으로 보내고, 먼저 예(濊)의 병력 1만으로 요서를 침공해 수나라 군사를 유인하고, 거란병 수천으로 바다 건너 산동반도를 공격하여 1차 고수전쟁이 개시되었다. -

따라서 이 기록에 따르면 이때 수나라 대군을 물리친 고구려의 원수는 진주 강씨 시조인 강이식 장군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강이식 장군의 무덤은 중국 심양현 원수림에 있다고 전한다.

수나라의 1차 침공을 대승으로 마무리한 고구려는 한숨 돌릴 겨를도 없이 이번에는 남쪽 후방의 우환거리인 신라와 백제 응징에 나섰다. 또 다시 수나라가 침략해 올 경우 배후에서 있을지도 모를 공격을 미리 차단해 놓기 위해서였다. 

영양왕은 전쟁 2년 뒤인 재위 11년(600) 정월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외교 교섭을 모색하는 한편,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으로 하여금 고구려의 역사서를 5권으로 간추린 ‘신집’을 편찬하게 했다. 지금은 실전(失傳)됐지만 이 ‘신집’에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빛나는 사실이 실려 있었을 것이고, 이는 왕권을 강화하고 백성의 자부심을 높이는 데에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영양왕은 재위 14년(603)에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주를 치게 하고, 18년(607)에는 백제의 송산성을 공격해 포로 3000명을 잡아왔으며, 다시 그 이듬해에는 신라를 공격해 포로 8000명을 잡아와 모두 고구려 지역에 배치함으로써 혹시 있을지 모를 신라와 백제의 북진을 미리 차단했다. 그런데, 그동안 수나라에서는 정변이 있었다. 604년 7월에 수 문제의 둘째 아들 양광이 아비와 형을 죽이고 제위를 찬탈해 수 양제로 등극했던 것이다. ‘제2의 시황제(始皇帝)’ 소리를 들은 양제는 즉위하자 낙양에서 오늘의 북경인 탁군에 이르는 대운하를 건설하고, 아비 때 실패한 고구려 원정의 기회를 노렸다.

610년부터 본격적인 고구려 원정 준비에 들어간 양제는 611년 2월에 전국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612년 정월에 마침내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 ‘수서’는 이때 양제가 동원한 군사가 24군에 113만 3800명이라고 전한다. 그뿐만 아니라 군량 등 물자 수송에는 그 2배의 인원이 동원됐다고 하니 이는 거의 300만에 이르는, 중국 역사상 아니, 세계사상 최대 규모의 원정군이었다.

2월에 요하에 이른 수나라 대군은 부교를 가설, 요하를 건너려고 했으나 고구려군과의 첫 접전에서 선봉장 맥철장(麥鐵杖)과 전사웅(錢士雄), 맹차(孟叉) 등이 전사함으로써 초전부터 여지없이 사기가 꺾이고 말았다. 그러나 요하를 건넌 수군은 요동성을 포위했다. 고구려 군사와 백성은 용감히 싸워 성을 잘 지켜냈다. 6월이 될 때까지 요동성 하나를 함락시키지 못 하자 양제는 자신이 직접 요동성으로 달려와 독전을 했으나 그래도 성은 요지부동이었다. 초조해진 양제는 가장 신임하는 장수 우문술(宇文述)과 우중문(于仲文)에게 30만5000명의 정예군을 주고 평양성을 직접 공격토록 명령했다.

한편 내호아(護兒)와 주법상(周法尙)이 이끈 해군은 황해를 건너 대동강 입구에서 고구려의 방어군과 접전을 벌였다. 이들 수군은 평양을 공격하는 우문술·우중문의 대군과 합류, 그들에게 군량과 무기를 보급하기 위해 해로로 평양을 공격한 것이다.

첫 전투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내호아의 수군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성까지 단숨에 이르렀으나 성은 텅 비어 있었다. 이는 평양방어군 총사령관인 고건무(高建武)의 탁월한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건무는 영양왕의 이복동생으로서 뒷날 영류왕으로 즉위한다. 수군은 고구려군의 유인책에 말려들어 허겁지겁 평양성으로 난입했는데, 이때 성 밖에 매복하고 있던 고구려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대패하고, 내호아는 간신히 목숨을 구해 도망칠 수 있었다.

양제의 특명을 받은 우문술과 우중문은 요동성을 우회, 압록강에 이르렀다. 그런데 기습작전을 펼쳐야 할 군사들이 모두 100일분의 식량과 무기를 지니고 있었으니 처음부터 진격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까닭에 “군량을 버리는 자는 목을 베겠다!”는 엄명을 내려도 너무 무거워 몰래 땅에 파묻는 자가 많아 군량이 이내 떨어져버렸다. 

고구려의 대신이요 총사령관인 을지문덕 장군이 우문술과 우중문의 수나라 군대 본영에 나타난 것이 그 무렵이었다. ‘삼국사기’, 사실은 ‘수서’의 기록이지만 사서는 당시의 일을 이렇게 전한다. 

을지문덕 장군은 적진으로 찾아들어가 우문술과 우중문 등에게 항복하겠노라는 뜻을 전했다. 사실은 항복이란 거짓이고, 항복한다는 핑계로 적군의 허실을 탐지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우중문은 출전에 앞서 양제로부터 “고구려왕이나 을지문덕이 오거든 반드시 사로잡으라”라는 밀명을 받고 왔기에 을지문덕이 제 발로 찾아오자 이게 웬 떡이냐면서 속으로 기뻐하며 을지문덕을 붙잡아 놓으려고 했다.

그런데 위무사로 종군한 상서우승 유사룡(劉士龍)이 “항복하겠다고 제 발로 찾아온 적장을 생포한다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고, 또 대국의 체면도 말이 아니다”면서 한사코 반대했다. 우중문은 할 수 없이 을지문덕을 돌려보냈다. 물론 틀림없이 왕을 모시고 와서 항복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놓아준 것이다.

그런데 을지문덕을 그대로 돌려보낸 뒤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듯했다. 나중에 황제가 이 일을 알면 내 목이 달아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곧 을지문덕에게 사람을 보내, “꼭 할 말이 있으니 빨리 돌아오라”고 했다. 

하지만 범의 아가리에서 벗어난 을지문덕이 그런 잔꾀에 넘어갈 리가 만무여서 돌아보지도 않고 금세 압록강을 건너가 버렸다. 다 잡은 적장, 제 발로 걸어온 을지문덕을 놓쳐버린 우문술과 우중문은 속이 편치 않았다. 게다가 군량마저 동이 나 버렸다. 우문술은 퇴각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우중문과 의논하니 우중문이 펄쩍 뛰며 반대했다.

“장군은 수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하찮은 적군을 쳐부수지 못 했으니 장차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뵙겠소이까?”

우중문이 황제까지 들먹이며 나서자 우문술도 할 수 없이 그의 주장에 따라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을지문덕의 뒤를 쫓았다.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왔다. 

<황원갑 소설가·역사연구가>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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