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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의 강, 두만강을 말한다(19) - 고구려시기 녀성파워의 이모저모
1. 고구려녀성의 원형―류화부인 
김관웅  2012-9-6 9:20:23

주지하다싶이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东明王, 기원전 58―기원전 19)의 어머니는 류화(柳花)부인이다.
 
시조 동명왕의 성은 고(高)씨고 이름은 주몽(朱蒙 또는 추모:邹牟, 상해:众解라고도 한다)이다. 부여왕 해부루(解夫娄)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서 산천에 제사를 드리고 후사(后嗣)를 구하였는데, 하루는 왕이 탄 말이 곤연(鲲渊)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리므로 왕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려보니 그 밑에 한 어린이가 있는데 빛은 금빛 같고 모양은 개구리 같았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나에게 자식을 준것이라” 하고 하면서 곧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였는데, 그가 크자 태자로 세웠다.
 
그 뒤에 부여의 재상 아란불(阿兰弗)이 왕에게 아뢰기를 “요사이 하늘에서 나에게 말하기를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여기에 나라를 세울것이니 너희들은 여기를 피하라. 동해기슭에 땅이 있는데, 가섭원(迦叶原)이라 부르는데 토양이 기름져 오곡을 심기에 알맞으니 가히 그곳에 도읍을 정할만하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면서 왕을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东扶余)라 하였다.
 
그 구도(旧都)에는 한 사람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지 못하나 자칭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 하며 곧 도읍을 정했다. 동부여의  해부루왕이 죽자 그 아들인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때 금와왕은 태백산남쪽 우발수(优渤水)에서 한 녀자를 만나 그녀에게 물으니 그 녀자가 말하기를 “저는 본래 하백(河伯)의 딸로서 이름을 류화(柳花)라고 하는데, 여러 동생들과 더불어 나가 노는데 마침 한 남자가 와서 스스로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저를 웅심산(熊心山)밑으로 유인하고 압록수(鸭子水)기슭의 방으로 데리고 가서 사통하고는 곧 사라져셔 다시 돌아오지 않으므로 저의 부모는 제가 중매도 없이 낯선 남자를 따랐다고 책망하여 내쫓았습니다. 하여 부득이 우발수(优渤水)에 살고있습니다” 하므로 금와왕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 데려다가 깊숙한 방에 가두어두었더니, 해빛이 류화의 몸을 비추었다. 류화가 몸을 피해도 해빛이 그냥 따라 드디여 아이를 배고 알 하나를 낳았는데, 그 알의 크기가 닷되들이만큼 했다.
 
금와왕이 이 알을 버리게 하여 개와 돼지에게 주니 모두 먹지 않고 또 길가운데 버리니 소와 말이 이를 피하고 그뒤에 들에 버리니 새들이 모여들어 날개로 덮어주므로 금와왕은 그 알을 갈라보려고 하였으나 또한 깨뜨릴수 없으므로 드디여 류화에게 돌려주었다.
 
류화가 물건으로 알을 덮어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사내애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는데 골격이 준수하고 모양이 영특하였다. 이 아이는 일곱살이 되자 재주가 남달라서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는데 백발백중이였다. 부여의 속어(俗语)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朱蒙)이라 한 까닭에 주몽이라 이름하였다.
 
금와왕에게는 아들 일곱이 있었는데, 항상 주몽과 같이 놀았으나 그 재주가 모두 주몽에게 미치지 못하므로 그 장자인 대소(带素)는 부왕에게 “주몽은 여느 사람같이 출생한 바 아니고 또한 그 사람됨이 용맹하니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가 두려우니 그를 제거함이 바람직합니다”라고 간하였으나 왕은 이를 듣지 않고 주몽으로 하여금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이 날쌘 말은 여물을 적게 먹여 여위게 만들고, 둔한 말은 오히려 잘 먹여 살찌게 하니 왕은 살찐 말만 골라 타고 여윈 말은 모두 주몽에게 주었다. 그뒤에 사냥할 때마다 주몽이 활을 잘 쏘므로 그에게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주몽이 잡은 짐승은 언제나 많았다. 여러 왕자들과 신하들은 이를 시기하여 주몽을 죽이고자 꾀하였다.
 
류화가 몰래 이 사실을 알고 “나라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이려 하니 너의 재주로 어디 간들 못살겠느냐. 이대로 머물러있다가 욕을 당하느니보다 멀리 가서 일을 도모하는것이 좋을것이다”라고 하자 주몽은 곧 오이(乌伊), 마리(摩离), 섬부(陕夫) 등 세 사람과 더불어 길을 떠나 엄체수(淹淲水)에 이르러 강을 건너고자 하였다. 그런데 다리가 없었다. 추격해오는 군사가 박두하자 주몽이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로 하백(河伯)의 외손자인데 오늘 도망하다가 추격하는 군사들이 박두하니 이를 어찌면 좋은가” 하고 부르짖자 갑자기 어별(鱼鳖)들이 수면으로 떠올라 다리를 이루어주므로 강을 건널수 있었다. 주몽 등이 강을 건너자 곧 어별들이 뿔뿔이 헤어져가니 쫓아오던 군사들은 강을 건널수 없었다. …[1]
 
이로부터 우리는 고구려 시조 주몽의 어머니 류화부인의 일생은 시종일관 자아(自我)와 세계(世界)의 첨예한 갈등과 대립으로 점철되여있음을 알수 있다.
 
첫째, 류화부인과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의 사랑은 원만하지 못했다. 해모수는 류화와 단 한번 정을 통하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그 이후 류화의 인생비극을 초래한 장본으로 된다.
 
둘째, 지금 말로 할것 같으면 류화부인은 해모수와 자유련애를 했다. 또 해모수와 아직 결혼도 하기전에 임신을 했으니 미혼모였다. 류화는 사사로이 낯선 남자와 중매도 없이 관계를 맺었다고 하여 아버지 하백으로부터 집에서 쫓겨나서 홀로 우발수에서 외롭게 살아가게 된다.
 
셋째, 류화부인이 동부여의 국왕인 금와왕의 궁궐에서 살았다는 표현은 실제로는 금와왕의 첩생활을 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금와왕과 류화부인의 관계 역시 불협화음으로 충만되였다. 금와왕은 홀로 사는 류화부인을 궁궐로 데리고는 왔으나 그녀를 독방에 감금시켰으며 후에 류화가 낳은 알을 거듭 밖에 내다버린다.
 
넷째, 대소를 비롯한 금와왕의 여러 아들들과 류화부인의 관계 역시 참예한 갈등과 대립으로 충만되였다. 이들은 류화부인이 낳은 아들 주몽의 재주를 시기하던 나머지 주몽을 암해하려고 하며 바로 이 때문에 류화부인은 아들 주몽더러 탈출하라고 권고하며 이로부터 류화부인은 아들과도 리별해야만 하는 비극적인 상황에 빠진다.
 
이러한 자아와 세계의 대립구도속에서 류화부인의 성격은 강인해질수 밖에 없었다. 류화부인의 성격은 자연스럽게 조화보다는 쟁투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였다. 사실 류화부인만 아니라 전반 고구려문화의 원형질을 분석해보면 둥굴둥굴한 원융형(圆融型)이라기보다는 모가 난 방정형(方正型)이라고 할수 있으며 조화보다는 쟁투를 더 희구하는 문화형태였다고 할수 있다. 고구려의 전반 력사는 그 시조모인 류화부인이나 그 아들 주몽의 일생처럼 자아와 세계의 갈등과 대립으로 점철되여있었다. 바로 자아와 세계의 첨예한 갈등과 대립속에서 고구려는 탄생, 성장했으며 종당에는 자아와 세계의 첨예한 갈등과 대립속에서 망국의 비운을 맞이하게 되였던것이다.
 
고구려에서 류화부인은 단순히 신화나 전설에 등장하는 형상에 그친 것이 아니라 오래동안 신으로 섬겨져있었다. 말하자면 고구려에서는 매년 10월에 거국적인 “동맹(东盟)”이란 명칭의 행사가 열린는데, 이 행사에서 정중하게 제사를 지내면서 기린 신은 고구려의 시조 부여신(扶余神)과 고구려 시조의 아들 등고신(登高神)이였다.[2] 고구려의 시조로 모신 부여신은 녀성으로서 바로 주몽의 어머니 류화부인이였고 등고신은 바로 부여신의 아들 동명왕 주몽이였다. 비유를 할것 같으면 카톨릭에서의 예수와 성모 마리아, 불교에서의 석가모니와 관세음보살 같은 성스러운 존재가 고구려에서는 바로 주몽과 류화부인이였다.
 
바로 이런 까닭에 동명왕전설에 등장하는 고구려의 시조모인 류화부인은 고구려 녀성의 원형(archetype)이라고 할수 있다. 신화원형비평의 창시자인 카를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원형이라고 하는것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보편적으로 찾아볼수 있는 시공(时空)을 초월한 상징형식이며 자기도 모르게 참여하는 집단적무의식속에 들어있는것”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꿈이나 신화, 마술, 제례, 예술과 같은 형식속에 새겨져있다는것이다. 그러니 루루 수천, 수백 년에 걸쳐 축적되여온 한 민족의 경험이나 감정 같은 기본적특징이 마치 씨앗처럼 해당 민족의 마음속 깊이 들어있다고 비유할수 있다. 사람은 백지상태로 이 세상에 태여나는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찬가지로 그 마음 역시 미리 유전된 형식을 타고 나오는것이며 개인의 행동속에는 몇천년, 몇백년 쌓여온 종족의 기억이 계승되여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몇천년, 몇백년 쌓여온 종족의 기억”은 해당 종족의 대부분 구성원들의 마음속에 마치도 씨앗처럼 깊숙이 묻혀있다는것이다.
 
마음속 깊숙이 파묻혀있던 이런 마음의 씨앗들은 일정한 온도, 습도, 일조(日照) 등 여러가지 환경이 조성되면 마치도 봄철을 만난 꽃씨처럼 싹 트고 자라나서 활짝 꽃이 피여난다는것이다.
 
우리는 고구려에 관한 많은 문헌자료와 구비전승자료들을 통해서 류화부인이라는 이 고구려 녀성의 원형 (archetype)이 후세에도 다양한 모습과 형태로 부단히 재현되는것을 발견할수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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