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treeId=010101&tabId=01&levelId=hm_003_0030

고구려의 5부와 대가

本有五族, 有涓奴部‧ ……(中略)…… 絶奴部‧順奴部‧灌奴部‧桂婁部. 本涓奴部爲王, 稍微弱, 今桂婁部代之. ……(中略)…… 王之宗族, 其大加皆稱古雛加. 涓奴部本國主, 今雖不爲王, 適統代人, 得稱古雛加, 亦得立宗廟, 祠靈星‧社稷. 絶奴部世與王婚, 加古雛之號. 諸大加亦自置使者‧皁衣‧先人, 名皆達於王, 如卿大夫之家臣, 會同坐起, 不得與王家使者‧皁衣先人同列.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고구려에는 본래 5족(族)이 있었는데, 연노부(涓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계루부(桂婁部)이다. 본래 연노부가 왕을 하였지만 차츰 미약해져 지금은 계루부가 이를 대신한다. ……(중략)……왕의 종족(宗族) 가운데 대가(大加)는 모두 고추가(古雛加)라고 부른다. 연노부는 본래 국주(國主)였으므로 지금은 비록 왕이 되지 못하지만 적통대인(適統大人)은 고추가라고 칭할 수 있으며, 또한 종묘(宗廟)를 세우고 영성(靈星)과 사직(社稷)에 제사 지낼 수 있다. 절노부는 대대로 왕과 혼인하였으므로 고추가의 칭호를 더해 준다. 여러 대가(大加)는 또한 스스로 사자(使者)·조의(皁衣)·선인(先人)을 두고 명단을 모두 왕에게 보고하는데, 중국 경대부(卿大夫)의 가신(家臣)과 같으며, 회동(會同)의 좌석 차례에서는 왕가(王家)의 사자·조의·선인과 같은 대열에 앉을 수는 없다.

『삼국지』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해설

이 사료는 고구려 초기 국가·정치체제를 알려 주는 가장 중요한 사료의 하나라고 할 수 있으나, 학자마다 해석의 차이가 커서 이를 두고 많은 논쟁이 있었다. 논의의 초점은 5부(部)와 대가(大加)의 성격에 있었다.

먼저 5부의 경우 국가 형성 및 국가 체제와 관련하여 주목하였다. 5부가 국가 형성의 단위 집단으로 3세기까지 나름의 독자성을 유지하였을 뿐 아니라, 국정 운영의 핵심적인 정치 단위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고, 이와 달리 늦어도 3세기 무렵에는 왕권의 통제를 받으며 정치적 기능을 거의 상실해 가고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여러 논의는 대부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보이는 여러 나(那)·나부(那部)와의 비교하에 이루어진다. 즉 이 사료의 연노부(涓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가 「고구려본기」에 보이는 비류나부(沸流那部)·연나부(椽那部)·환나부(桓那部)·관나부(貫那部)와 대응한다고 파악하고, 이를 통해 5부의 성격과 그 변화 과정을 이해하였던 것이다.

이때 양자의 대응 관계는 음가나 사료 속의 내용을 통해 설정되었다. 예컨대 연노부는 『한원(翰苑)』에 인용된 『위략(魏略)』 및 『후한서(後漢書)』 「동이전」에는 소노(消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소노부라고 읽을 수도 있는데, 이 경우 비류나부와 대응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비류나부는 비류국의 송양(松壤)으로부터 기원하는데, 송양의 양은 나(那)·노(奴)와 그 뜻이 통하기 때문에 송나·송노로 볼 수 있으며, 그렇다고 할 때 비류나부(송나·송노)는 소노부와 그 음이 통하는 것이다.

또한 『삼국지』 「동이전」의 절노부는 대대로 왕과 혼인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모습은 「고구려본기」에 보이는 연나부와 일치한다. 연나부에서는 고국천왕(故國川王)에서 서천왕(西川王)에 이르는 3세기 동안 대대로 왕비를 배출했다고 파악된다. 이처럼 특정 나부에서 왕비를 고정적으로 배출한 것은 고구려만이 아니라 백제와 신라도 마찬가지였는데, 모두 왕권 강화와 관련이 있었다는 점이 공통된 의견이다. 즉 삼국의 왕실은 미약한 왕권을 보완하기 위하여 특정 세력과 결합하였던 것이다.

다만 5부를 이해하는 문제에서 차이는 대가의 성격 문제로 이어진다. 대가는 소가(小加)와 대응하는데, 가(加)란 간(干)·간지(干支) 혹은 한(翰) 등과 통하는 수장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5부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대가는 5부의 지배 세력으로 고구려 초기 정치 운영의 주도 세력으로 파악한다. 반면 왕권의 통제를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이들이 적어도 3세기 무렵에는 이미 관료적 존재로 변화하였거나 혹은 지배 세력에 대한 범칭으로 본다. 고추가(古雛加) 역시 마찬가지이다. 전자의 경우 대가 중에서도 정치 권력의 핵심에 가까운 존재로 보지만, 후자의 경우 단순히 우대하기 위한 특별 호칭으로 이해한다.

이처럼 5부와 대가에 대한 시각의 차이는 「동이전」에 보이는 5부와 대가가 독자성을 지닌 한편, 왕권의 통제를 받았던 두 가지 모습이 상존한 데서 비롯된다. 이 점은 이 사료의 마지막 구절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대가들은 스스로 사자·조의·선인이라는 신료를 둘 수 있었다고 하지만 왕에게 보고해야 했고, 동일한 명칭을 지닌 왕의 신료와 같은 대열에 설 수는 없었으므로 그 위상이 낮았던 것이다.


참고문헌
 
노태돈,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999.
이기백, 『한국고대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97.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이종욱, 『고구려의 역사』, 김영사, 2005.
임기환,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2004.
전해종, 『동이전의 문헌적 연구』, 일조각, 1980.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d/jo_004r_0010_0030_0020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