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youtu.be/W16vZxOX7iE , http://youtu.be/gGgyXCyFqEk
http://blog.daum.net/santaclausly/11793496
* " 역사추적 제19회: 최강수군의 비밀 - 이순신의 사람들" 중에서 정걸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정걸
6:50 ~
~ 1:30
(전략)
(후략)
http://blog.daum.net/santaclausly/11793496
* " 역사추적 제19회: 최강수군의 비밀 - 이순신의 사람들" 중에서 정걸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정걸
6: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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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임진왜란초기 정운 장군의 전사는 조선 수군의 큰 손실이자 이순신에게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은봉전서 부산기사에는 정운 장군의 전사 순간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날이 저물어 이순신이 돌아가려 하는데 정운이 나가 싸우려 했다. 이때 정걸이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고 돼있습니다. 이순신이 가장 믿었던 정운 장군의 전사현장에 있었던 정걸. 정운을 말렸다는 정걸. 그는 또 누굴까요.
전남 고흥군 포두면. 정걸이 태어난 마을에는 지금도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종가에는 대대로 간직하고 있는 가보가 전해져 온다. 그것은 바로 교지였다. 정걸과 정걸 가문에 내려진 교지. 교지는 모두 34점. 정걸에게 내려진 6점의 교지를 포함해서 정걸의 조부모와 부모 그리고 손자 때까지 내려진 교지다.
이상훈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정걸 장군이 이제 활약을 함으로써 정걸 장군에게 교지가 여러 가지 벼슬에 승진되는 과정을 볼 수가 있고요. 그 역시 아들의 경우도, 처음에는 정걸장군의 후광으로 벼슬자리에 나가지만 또 자신의 공로에 의해서 다음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연차적으로 승진하고, 국가에 공을 세우는 그런 과정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한창이었던 1593년에 받은 가선대부교지. 놀라운 것은 이때 정걸의 나이가 이미 79세였다는 것이다.
“거의 정걸장군은 이제 노령으로 인해서 은퇴할 때가 됐지만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의 중대한 일을 맞이해서 일선에서 수군장수로서 크게 활약을 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공로를 충분히 보상하는 그런 의미가 되겠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팔순을 바라보던 정걸은 이미 경상도와 전라도의 수사를 지낸 화려한 군 경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1593년 초에 행주대첩. 정걸은 이 때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10배나 많은 왜군을 맞아 행주산성의 조선군은 적의 공격을 하루에 7차례나 막아 냈다. 그러나 전투 막바지 화살이 떨어졌다. 이때 충청수사이던 정걸이 배 2척에 화살을 가득 실고 한강을 건너왔다.10) 행주대첩에 빛나는 승리를 가능케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순신과 정걸은 어떤 인연이 있을까? 전라좌수사로 부임하던 당신 이순신은 47세였다. 당시 정걸은 이순신보다 31살이나 많은 78세. 난중일기에는 정걸이 조방장으로 처음 등장한다.11) 조방장은 장수의 자문역할이었다.
조원래 교수
“정걸의 경우는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이런 분을 조방장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죠. 따라서 조방장의 경우는 자기 휘하의 군사는 없는 셈이죠. 단독으로 주장인 현지 사령관을 돕고 자문하고 그런 역할을 했다고 봐집니다.”
이순신은 군 경험이 풍부했던 정걸이 필요했고 정걸 역시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인데도 이에 응했던 것이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정걸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기록이 무려 29번이나 나온다.
“임진왜란 전에 정걸의 경우에는 이미 병수사를 다 지냈습니다. 그리고 또 전라 좌수사를 임진왜란 전에 지냈고요. 뿐만 아니라 고흥 출신이고 그러면 해역의 사정이랄지 해전의 기술이랄지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그 원로 무장인 정걸로부터 배울 것이 대단히 많았을 겁니다.”
정걸 역시 직접 전투에 참여했다. 한산해전에서는 왜군의 총탄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 조정에선 정걸에게 상을 내려줄 것을 임금에게 요청했다. 팔순의 나이에도 전쟁에 참여하는 정걸에게 상을 내린다면 군사들이 감동할 것이라는 것이었다.12) 정걸은 실전 경험 뿐 아니라 전함과 무기 운영에도 탁월한 식견을 갖고 있었다.
제장명 교수 해군교육사 충무공리더십 센터
“정걸 같은 경우는 1555년에 있었던 을묘왜변, 달량포 왜변 이라고도 부르는데요. 이 때 직접 정걸이 참전에서 전투를 한 적도 있습니다. 그 때 왜구들의 전술 같은 것들을 봤을 것이고 그 당시에는 판옥선에 총통을 설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당히 우리가 큰 피해를 입었는데 그런 것에 대한 경험 이런 것들이 아마 이순신에게 전수 되지 않았을까.”
정걸은 전쟁이 끝나기 1년 전 83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이후 그의 아들과 손자로 전투에 참여 전사했다. 1년 반 만에 3대가 연이어 순국한 것이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조방장을 지냈던 정걸은 당시 78세의 노장. 그러니까 이순신보다 무려 31살이나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순신보다 20년 앞서서 수군절도사를 지낸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이순신의 입장에서는 그의 오랜 군 경험 특히 해군 지휘관으로서의 경험이 필요했던 것이겠죠. 그런데 정걸은 임진왜란 당시 주력함대인 판옥선을 개조하고 신무기 등을 만든 것으로 전해집니다. 정걸이 이렇게 판옥선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면 그와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선박건조 전문가이자 거북선을 만들 당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나대용장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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