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dataType=0201&contents_id=E0045106
이억기 [李億祺]
집필자 이정일
1561(명종 16)∼1597(선조 30). 조선 중기의 무신.
대표관직(경력) : 온성부사 | 순천부사 | 전라우수사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수(景受). 아버지는 연손(連孫)이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뛰어나 17세에 사복시내승(司僕寺內乘)이 되고, 그 뒤 무과에 급제해 여러 벼슬을 거쳤다. 특히, 북방 오랑캐가 침입했을 때 경흥부사로 임명되어 적을 격퇴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무인으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아, 온성부사 등 국방상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591년(선조 24) 순천부사를 거쳐 임진왜란 때에는 전라우수사가 되어,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등과 합세해 당항포(唐項浦)·한산도(閑山島)·안골포(安骨浦)·부산포(釜山浦) 등지에서 왜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1596년에는 휘하의 전선(戰船)을 이끌고 전라좌·우도 사이를 내왕하면서 진도와 제주도의 전투 준비를 돕는 한편, 한산도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본영을 응원하는 등 기동타격군의 구실을 수행하였다. 이순신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잡혀가 조사를 받자, 이항복(李恒福)·김명원(金命元) 등 조정대신들에게 서신을 보내 무죄를 적극 변론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통제사 원균 휘하에서 조정의 무리한 진격명령으로 부산의 왜적을 공격하다가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패해 원균·충청수사 최호(崔湖)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1592년 6월 5일 당항포해전 이래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할 때까지의 공적은 이순신·원균 등에 못지 않았으나, 1592년 5월의 옥포(玉浦)·사천(泗川)·당포(唐浦) 등지의 초기 해전에 참여하지 못했던 관계로, 임진왜란 후 공신책정(功臣策定) 때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으로 되어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완흥군(完興君)으로 봉해졌다. 1600년 여수의 충민사(忠愍祠)에 이순신과 함께 제향되었다. 시호는 의민(毅愍)이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난중일기(亂中日記)』(이순신(李舜臣))
『임신장초(壬辰狀草)』(이순신(李舜臣))
『징비록(懲毖錄)』(유성룡(柳成龍))
『백사집(白沙集)』(이항복(李恒福))
『오리속집(梧里續集)』(이원익(李元翼))
『난중잡록(亂中雜錄)』(조경남(趙慶男))
『매산집(梅山集)』(홍직필(洪直弼))
『한국수군활동사(韓國水軍活動史)』(최석남, 명양사, 1965)
『임신전란사(壬辰戰亂史)』(이형석, 신현실사,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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