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27>제13대 서천왕
때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 정말 사실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면서 또한 인간의 기록이기도 하다.
인간이 하는 일이란 아무리 완벽하게 하려고 해도 어딘가는 모자라기 마련이어서,
철저하게 써놓았다고 해도 꼭 한군데씩은 이해못할 부분이 나오기 마련이다.
역사를 쓰는 손이 어딘가 '강력한 힘'을 배후에 지고 있다면.
그래서 자신이 쓰고 싶은 것과는 상관없이, 그 힘이 지닌 의지에 따라 붓을 보내던지
아니면 자신이 그 힘을 등에 업고 있기에 차마 떼놓고 쓸수가 없는 것인지.
[西川王<或云西壤>, 諱藥盧<一云若友>, 中川王第二子. 性聰悟而仁, 國人愛敬之. 中川王八年, 立爲太子, 二十三年, 冬十月, 王薨, 太子卽位.]
서천왕(西川王)<혹은 서양(西壤)이라고도 한다>은 이름이 약로(藥盧)<또는 약우(若友)라고도 하였다.>이고 중천왕의 둘째 아들이다. 성품이 총명하고 어질어 국인(國人)이 사랑하고 존경하였다. 중천왕 8년에 태자로 삼았고, 23년 겨울 10월에 왕이 죽자 태자가 즉위하였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서천왕
역사책 볼때마다 맨날 '이렇지 않을까'하고 생각하는 일이지만,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애들이 자기네들 왕에 대해 써놓은 것은,
첫머리만 봐도 그 왕이 좋은 왕인지 나쁜 왕인지 금방 안다.
특출난 성군이 아니고, 그저그런 왕이래도 보통은 '성품이 어지셨다', '지략이 크셨다',
'도량이 넓으셨다'느니 하는 찬사를 한마디씩은 보내고 있는데,
좀 뒤끝이 안좋은 왕, 그러니까 정치 못한다고 쫓겨났거나 죽은 왕들은
첫머리부터 '성품이 어질지 못했다', '잔학하고 포악하였다', '나랏사람들이 다 싫어했다'고,
굳이 읽다 보면 다 알게 되어있는 것을 첫머리에서부터 주지를 시키고 있으니까.
첫 기록만 읽어봐도 '아, 이 왕은 성격이 좀 더러웠군.'하는 걸 알수 있을 정도랄까.
그러다가 읽다보면 '어, 이게 아닌데.'하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 종종 나오게 된다.
가령 왕의 성품이 어질다고 하면서 별로 죄도 없어보이는 사람을 죽인다던지,
왕이 엄청 폭군이었다고 말했으면서 한군데씩은 '이건 괜찮네'하는 면모도 보인다.
(때로는 보통 성군보다도 더 뛰어나다고 생각될만큼)
하여튼 단순하다. 왕조국가의 정사(正史) 기록이라는 것은.
[二年, 春正月, 立西部大使者于漱之女爲王后. 秋七月, 國相陰友卒. 九月, 以尙婁爲國相. 尙婁, 陰友子也. 冬十二月, 地震.]
2년(271) 봄 정월에 서부(西部) 대사자 우수(于漱)의 딸을 왕후로 삼았다. 가을 7월에 국상 음우(陰友)가 죽었다. 9월에 상루(尙婁)를 국상으로 삼았다. 상루는 음우의 아들이다. 겨울 12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서천왕
서부는 곧 비류나부. 만인지상 일인지하라는 국상의 자리에, 서부 출신 음우의 후임으로
그 아들 상루를 지목한 것이며. 그 비류나부의 대사자 우수의 딸을 왕후로 삼았다는건,
서천왕 시대의 왕의 보좌는 곧 비류수를 낀 서부라는 의미가 되려나.
(그러면 뭐해? 기록에 별로 확인된 활약상도 안 보이누만 뭐.)
[三年, 夏四月, 隕霜害麥. 六月, 大旱.]
3년(272)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6월에 크게 가물었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서천왕
서천왕 3년 여름 4월과 6월에, 뜻밖의 자연재해가 고구려를 강타한다.
고구려가 북방에 있다고는 하지만, 서리가 내릴 계절이 아닌데도
서리가 내려서 보리들이 얼어죽다니.
게다가 그 추운 대륙에서 뜨거운 태양 때문에 가뭄까지 들었다고?
[四年, 秋七月, 丁酉朔, 日有食之. 民饑. 發倉賑之.]
4년(273) 가을 7월 초하루 정유에 일식이 있었다. 백성들이 굶주렸다.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서천왕
일식이 있던 그 해에,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창고를 열어 진휼했다고.
사실 고구려 초기 폭군으로 악명높았다고 기록된 모본왕도,
나라에 가뭄이 들어서 백성들이 굶주릴 때에 이렇게 나라 창고를 열어서 백성들을 살렸다는데,
왜 모본왕은 폭군이 되고, 서천왕은 성군이라고 하는 건지 참.
둘이 한 행동은 뭐가 다른 걸까.
내가 보기에 둘의 차이란 나이나 살았던 시대,
그리고 재위 기간 중에 단지 '끝발'이 좋지 않았다는 것밖에는 없어보이는데.
[七年, 夏四月, 王如新城,<或云, 新城, 國之西北大鎭也.>獵獲白鹿. 秋八月, 王至自新城. 九月, 神雀集宮庭.]
7년(276) 여름 4월에 왕은 신성(新城)<혹은 신성은 나라 서북쪽[東北]의 큰 진[大鎭]이라고도 하였다.>으로 가서 사냥하여 흰 사슴을 잡았다. 가을 8월에 왕은 신성에서 돌아왔다. 9월에 신비로운 새[神雀]가 궁정에 모여들었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서천왕
이 시점을 기해서 신성(新城)이라는 성이 새로이 부각되기 시작한다.
부식이 영감은 이 성이 고구려의 큰 진(鎭) 곧 군사요새로 고구려의 동북쪽에 있었다고 부기했지만
사실은 동북쪽이 아닌 서북쪽에 있었다는 것이 단재 선생의 설명이다.
'《삼국사》중 동서 양자 상환 고증'이라는 논문에서 주장하신 것인데,
신성은 서천왕 이후 봉상왕 때의 고노자가 선비를 막고, 당이 고려를 칠 때 공격했다는 곳으로
이러한 여하의 사건들은 신성이 서쪽에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밖에 《삼국사》에서 중요한 지명들의 동서 방향이 대부분 바뀌어 있는 것에 대해서
단재 선생은 우리말에 동쪽을 '새', 서쪽을 '하늬'라고 하는 것에 착안해서,
신라 말년이나 고려 초년에 우리말을 한자로 바꿔 적던 승려와 문인들이 우리말로 적은
'새'와 '하늬'를 착각하고 '새'를 '서'로 적고 서쪽이라 적어야 할 것을 동쪽으로 적는 바람에
오류가 생긴 것이라고 주장하셨다. 여기서는 단재 선생의 주장을 따라 서북쪽으로 고쳐 적었다.
[十一年, 冬十月, 肅愼來侵, 屠害邊民. 王謂群臣曰, “寡人以眇末之軀, 謬襲邦基, 德不能綏, 威不能震, 致此鄰敵猾我疆域. 思得謀臣猛將, 以折遐衝, 咨爾群公, 各擧奇謀異略才堪將帥者.” 羣臣皆曰 “王弟達賈, 勇而有智略, 堪爲大將.” 王於是, 遣達賈往伐之. 達賈出奇掩擊, 拔檀盧城, 殺酋長, 遷六百餘家於扶餘南烏川, 降部落六七所, 以爲附庸. 王大悅, 拜達賈爲安國君, 知內外兵馬事, 兼統梁貊·肅愼諸部落.]
11년(280) 겨울 10월에 숙신이 쳐들어와 변경 백성들을 살육하였다.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과인은 보잘것없는 몸으로 나라를 잘못 이어 받아서, 덕이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위엄이 멀리 떨치지 못하여, 이렇게 이웃의 적이 우리 강토를 어지럽히게 했다. 꾀많은 신하와 용맹한 장수를 얻어 적을 멀리 쳐서 깨뜨리고자 하니, 그대들은 기이한 꾀와 특이한 책략이 있어서 그 재능이 장수가 될 만한 자를 각각 천거하라.”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였다.
“왕제(王弟) 달가(達賈)는 용감하고 지략이 있어서 대장이 될 만합니다.”
왕은 이리하여 달가를 보내 적을 치게 하였다. 달가는 기이한 꾀를 내어 엄습해서 단로성(檀盧城)을 빼앗아 추장을 죽이고, 600여 가(家)를 부여 남쪽의 오천(烏川)으로 옮기고, 부락 예닐곱 곳을 항복시켜 복속시켰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달가를 안국군(安國君)으로 삼아 서울과 지방의 군대의 일을 맡아보게 하고, 아울러 양맥과 숙신의 여러 부락을 통솔하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서천왕
안국군(安國君). 나라를 편안하게 했다는 뜻.
고구려에서도 조선처럼 봉군제를 채택했던가?
공을 세운 왕의 아우를 '군(君)'으로 봉하다니.
아니면 원래 '공(公)'이었는데 부식이 영감이 고친 건가?
이번에 안국군의 칭호를 받은 달가는 왕제(王弟) 즉 왕의 아우로서,
변경에 쳐들어온 숙신을 쳐서 엄청난 전과를 거두고 돌아온 자다.
소위 '기이한 꾀'를 내어서 숙신을 엄습해,
단로성(그 무렵 숙신에게 정복당했거나 숙신이 거주하던 곳인듯)을 빼앗아 추장을 죽이고,
6백여 가나 되는 숙신의 사람을 부여 남쪽 오천ㅡ
옛날 대무신왕이 부여 대소왕을 죽인 진흙탕이 있는 곳으로 옮기며
그 부락을 고구려의 관할하에 속한 속령으로 만들고 돌아온다.
그리고 형님이신 왕에게, 국상이 갖고 있던 '서울과 지방의 군사 업무'를 할당받고
양맥과 숙신 부락을 다스리는 임무까지 겸하여 부여받는다ㅡ.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자에게 이만한 포상을 준 적이,
부분노나 밀우, 유유 때 말고 또 있었던가?
[武帝時, 頻來朝貢. 至太康六年, 爲慕容廆所襲破. 其王依慮自殺, 子弟走保沃沮. 帝爲下詔曰 "夫餘王世守忠孝, 爲惡虜所滅. 甚愍念之. 若其遺類足以復國者, 當爲之方計, 使得存立." 有司奏 "護東夷校尉鮮于嬰, 不救夫餘, 失於機略." 詔免嬰, 以何龕代之.]
무제(武帝) 때 자주 와서 조공하였다. 태강(太康) 6년(285)에 이르러 모용외(慕容廆)에게 습격받아 격파당하였다. 그 왕 의려는 자살하고 자제들은 옥저(沃沮)로 달아났다. 무제가 조서를 내렸다.
“부여왕은 대대로 충효를 지켜왔건만 몹쓸 오랑캐에게 멸망당하였다. 몹시 불쌍하게 여긴다. 만약 남아 있는 무리들 가운데 나라를 다시 세울 만한 자가 있다면, 계책을 세워 나라를 세울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
유사에서 아뢰었다.
“호동이교위(護東夷校尉) 선우영(鮮于嬰)이 부여를 구원하지 않아 기회를 잃었습니다.”
조서를 내려 영을 파면하고 하감(何龕)으로 교체시켰다.
《진서(晉書)》권제97, 사이전(四夷傳), 부여국
《진서》냐... 진짜 골치 아픈 역사책이다.
중국의 25사 중에서도 가장 엉성하고 사실 왜곡 심한 바이러스투성이 역사책.
그게 바로 《진서》다. 그런데 내가 이 책을 왜 인용하냐구? 당빠, 딱히 볼만한게 없으니까.
3세기 전반부터, 한 이래로 부여가 거느리고 있던 읍루에 대한 부여의 지배력이 점차 약해져갔고,
위와 고구려가 부여의 정치적 동지였던 요동의 공손씨 세력을 협공하는데도 부여는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부여가 점차 쇠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부여는 서천왕 16년(285)에 모용씨와의 싸움에서 대패해서,
부여왕은 자살하고 지휘부는 옥저로 도망쳐서 겨우 목숨만 부지했다.
그것은 부여가 멸망할 정도의 엄청난 타격이었다.
이때의 일에 대해서 단재 선생은 말하신다.
모용외가 침입해왔을 때, 부여의 의려왕은 수비가 허약해 막아내지 못할 줄 알고 칼을 빼어 자살함으로써 나라를 망친 죄를 국민에게 사과하고, 유서로 태자 의라(依羅)에게 왕위를 전하여 나라의 회복에 힘쓰게 하였다. 의려왕이 국방을 힘쓰지 못하여 나라가 위태롭게 한 죄는 없지 아니하나, 항복하느니보다 차라리 죽으리라는 의기(義氣)를 가져 조선의 역사상 처음으로 순국한 왕이 되어 피로써 뒷사람의 기억에 남겼으니, 어찌 성하(城下)의 맹세를 맺어 구차하게 목숨을 보전하려는 용렬한 임금에 비하랴.
아무튼 의려왕이 죽은 뒤, 의라가 도망친 옥저ㅡ단재 선생이 말한 서갈사나(西曷思那)로
지금의 개원(開原) 부근의 숲속으로 달아나 결사대를 모집해서 선비의 군사를 쳐서 물리치고,
험한 곳을 지키며 그곳에서 부여의 명맥은 간신히 이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의 여파는 씻을 수 없을 만큼 컸다.
부여성에 보관되어 있던 많은 보물과 문헌들, 신지(神誌)의 역사며, 이두문으로 적은 풍월,
단군의 아들 부루가 하우에게 가르쳤다는 금간옥첩(金簡玉牒)에 적은 글들이, 모조리 불타 없어져버렸다.
그걸 모두 불태워 없앴다. 선비족의 침략자들이....
부여왕 의려의 왕자였던 의라를 데리고 간신히 옥저로 도망친 부여 왕실은
서진의 도움을 받고서야 겨우 나라를 회복할 수 있었고, 그 뒤에도 계속해 모용씨의 침공에 시달려야 했다.
[十七年, 春二月, 王弟逸友·素勃等二人, 謀叛. 詐稱病往溫湯, 與黨類戱樂無節, 出言悖逆. 王召之僞許拜相, 及其至, 令力士執而誅之.]
17년(286) 봄 2월에 왕제(王弟) 일우(逸友)ㆍ소발(素勃) 등 두 사람이 반역을 꾀하였다. 거짓으로 병을 칭하고 온탕(溫湯)에 가서 자기 무리들[黨類]과 무절제하게 놀며 패역한 말을 지껄였다. 왕은 거짓으로 재상을 시켜주겠다며 이들을 불렀다. 도착하자 역사(力士)를 시켜 잡아 죽였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서천왕
그런데.....
왕족, 왕의 친동생으로서, 안국군 달가처럼 마냥 충성스러울 수는 없는 것.
왕의 아우나 친족으로서 왕의 자리를 노리는 일은, 비단 이때뿐이 아니라
우리 역사가 진행되는 내내 흔히 보이고 있는 일이다.
고구려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조선 태종이 그러했듯 자기 형제를 향해 두 아우가 반기를 든다.
특이하게도 '온탕' 즉 온천에서 무리들을 모아 놀면서 패역한 말을 했다고.
그리고 서천왕이 이 계획을 미연에 입수하고서, 꾀를 써서 불러들였다가 처치했는데,
이때 서천왕이 쓴 방식을 두고, 조선 유학자들이 제법 비난을 했다.
《삼국사절요》의 편찬책임자 권근은 서천왕의 행위에 대해서,
형제 사이는 형체는 다르나 핏줄은 같으므로 비록 조그만 노여움이 있어도 천륜(天倫)을 끊을 수 없는 것이다. 상(象)이 날마다 순(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순은 천자가 되자 그를 유비(有庳)라는 땅에 봉하여 그를 부귀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므로 맹자(孟子)의 말에 어진 사람은 형제간에 노기를 품지 않고 원망을 오래하지 않으며 친애할 따름이라 했으니, 이것이 하늘의 도리와 인정의 지극한 것이다. 왕이 의심하고 꺼리는 마음을 품고서 우애의 은의(恩誼)를 엷게 했기 때문에, 두 아우가 내심 불안하여 원망하는 말을 하게된 것 뿐이지, 반란을 도모하고 찬탈을 꾀하면서 신하로서의 도의를 지키지 않은 증거를 볼수 없었는데도, 왕은 결국 유인해 죽였으니, 어질지 못한 것이 심하다. 육친간에도 이런데, 다른 사람이야 누군들 (왕을) 의심치 않겠는가? 왕도(王道)는 인친(仁親)을 근본으로 삼고 신의를 중하게 여기는 것인데, 일거에 이를 폐하였으니, 정치를 잘하려고 한들 될 수 있겠는가.
조선 태종이 자기 형제들까지 죽이는 왕자의 난에서 태종 편에 가담해,
태종에게서 1등 좌명공신이라는 칭호까지 받은 당신이 할 비판일까?
뭐, '형제간에 노기를 품지 않고 원망을 오래하지 않으며...'라고?
'너나 잘하세요'~~~~~.
사(史)에, 왕을 총명하며 어질다고 했는데, 두 아우를 꾀어 죽인 것은 잔혹하기가 너무 심하니, 어진 자가 정말 이러할수 있겠는가? 사(史)의 믿지 못할 것이 이와 같구나.
안정복 영감의 말마따나, 물론 방법이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긴 하지.
재상, 즉 국상 자리를 준다는 핑계로 불러들인 뒤 잡아 죽였다.(좀 치사하기는 하다)
하지만 서천왕을 이렇게 형제를 죽인 왕이라고 비판하면서,
중천왕이 자기 아우를 반역죄를 물어 죽인 것은 어째서 비판하지 않는걸까?
조선 태종이나 세조는 또 어땠던가? 배 다른 어린 아우 두 명에, 자기 피를 나눈 친형까지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자기 처가와 며느리 집안까지 쑥대밭을 만들면서까지 권력을 손에 쥔 태종은?
자기 조카에 동생 하나 더 보태어 죽이고, 세종대왕이 모아둔 수많은 신하(두뇌)들을 죽이면서
권력을 잡고 통치했던 세조는 어진 왕이란 소린가?
아무리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이 역사라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평가를 하려면 좀 공정하게 하란 말야.
뭐 이랬다가 저랬다가 같은 사실을 두고도 이렇게 평이 달라.
이래서야 나같은 머리나쁜 사람이 제대로 이해를 할수 있겠냔 말야.
안정복 영감의 말 중에 옳은 소리는 이거다.
"역사의 믿지 못할 것이 이와 같구나."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 힘겹게 샌드위치 신세처럼 살다가,
결국 납작하게 눌려죽고 말았다는 대방이라는 나라의 슬픈 사연이지.(뭐 그냥 그렇다고.)
그리고 이 무렵 부여에서는....
[明年夫餘後王依羅遣詣龕, 求率見人還復舊國. 仍請援. 龕上列, 遣督郵賈沈以兵送之. 廆又要之於路, 沈與戰, 大敗之. 廆衆退, 羅得復國. 爾後每爲廆掠其種人, 賣於中國. 帝愍之, 又發詔以官物贖還, 下司冀二州, 禁市夫餘之口.]
다음 해(286)에 부여의 후왕(後王) 의라(依羅)가 하감에게 와서, 현재 있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옛 나라로 돌아가겠다고 하면서 이어 구원해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하감이 위에 보고하고는 독우(督郵) 가침(賈沈)을 파견하여 군사를 보내었다. 모용외가 중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가침의 군사를 요격하였는데, 가침이 싸워서 크게 격퇴시켰다. 모용외의 군사가 물러가자 의라는 나라를 다시 세웠다. 그 뒤에도 모용외가 번번이 부여 사람들을 잡아다가 중국에다 팔았다. 이에 무제는 이를 불쌍히 여겨 또다시 조서를 내려서 관가의 물품으로 속(贖)한 다음 돌려보냈으며, 사주(司州)와 기주(冀州) 두 주에 조서를 내려 부여 사람들을 사고 팔지 못하게 하였다.
《진서(晉書)》권제97, 사이전(四夷傳), 부여국
'선조 때부터 나라가 피폐해진 적이 없었다'고까지 했던 부여다.
틀린 말은 아니다. 대무신왕 때에 부여를 쳐서 대소왕을 죽이기는 했지만,
오히려 반격을 걸어서 고구려군을 포위해 대무신왕이 거의 죽다 살아나왔으니.
때로는 한과 합공해 고구려를 군사적으로 견제할 정도로 국력이 회복되기에 이르렀고.
그런 부여가 격파당했다. 그것도 모자라 전연은 수시로 부여 사람들을 잡아다
서진에 노예로 팔아먹곤 했다고(인간 사고파는 놈들은 다 죽여야지 하여튼) 전한다.
그래서 그걸 서진 조정에서 일일이 나랏돈으로 환속시켜서 부여로 돌려보내고 그러면서
'부여 사람은 사고 팔지 말라'고 법까지 내렸다지만, 제대로 지켜졌는지 어땠는지는 의문스럽다.
이래서 하여튼 약한 나라에 태어나면 자기만 손해라는 말이 생겨난 모양이다.
아마 옥저로 도망간 부여 사람들 중에는 아예 거기서 정착해 영영 돌아오지 않은 사람도 있었을 거라고.
소위 말하는 '동부여'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十九年, 夏四月, 王幸新城. 海谷太守獻鯨魚. 目夜有光. 秋八月, 王東狩, 獲白鹿. 九月, 地震. 冬十一月, 王至自新城.]
19년(288) 여름 4월에 왕은 신성으로 행차하였다. 해곡(海谷) 태수(太守)가 고래를 바쳤다. 눈이 밤에 빛이 났다. 가을 8월에 왕은 동쪽으로 사냥나가서 흰 사슴을 잡았다. 9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겨울 11월에 왕은 신성(新城)으로부터 돌아왔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서천왕
서천왕 19년의 신성 행차에서는 별별 일이 다 있었다.
해곡이라는 고을의 태수가 밤에 눈이 야광스티커처럼 빛이 나는 고래를 바치고,
신성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하얀 사슴 잡고 또 지진.
이 해의 역사는 신성 안에서 펼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신성에서 진기한 것도 많이 보고 기상현상도 많이 겪은 왕이셨다.
[二十三年, 王薨. 葬於西川之原, 號曰西川王.]
23년(292) 왕이 죽었다. 서천(西川)의 들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서천왕이라고 하였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서천왕
재위 기간은 23년.
신성이라는 새로운 국경의 수비진을 강화하시고,
숙신이라는 세력의 침공을 격퇴하신 왕.
그분의 시대가 이제 갔다.
그리고 또다시, 고구려의 역사 속에서 새로운 드라마 한 편이 펼쳐지려고 하고 있다.
서천왕의 뒤를 잇게 될 왕들의 손에서.
[출처]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27>제13대 서천왕 |작성자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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