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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50>제21대 문자명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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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에 실려있는 부여국전세도. 발해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사의 '부록'의 일종으로서 처리되었다. 북부여국 해모수와 고려국 추모왕의 이름이 보인다.>

 

월명성희(月明星稀).

달빛이 너무 밝으면 별은 밤하늘에서 사라져버린다.

 

'분가'인 고구려의 붉은빛에 밀려, 정작 '종가' 부여의 검은빛은 퇴색되어버렸다.

대무신왕과 광개토태왕이 그렇게나 정벌했지만 끝내 멸하지 않고 돌아왔던,

어찌 보면 이 고구려의 전신이라고도 할수 있는 나라, 부여.

본인들이 남긴 자체 역사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왕이 진흙창에서 죽은 뒤에도

굴하지 않고 고구려군을 압박해 대무신왕을 거의 전사 직전까지 몰고가고, 후한에서 고구려를 칠 때는

2만이라는 군사까지 내서 도왔을 정도로 군사력도 건재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중국 왕조에다

숱하게 사신도 보냈던 것 같은데, 유감스럽게도 해부루왕과 금와왕, 대소왕 이후로 왕계는 어떻게 이어졌는지.

고구려와 어떻게 지냈었는지. 다른 나라에 또 사신 보낸 것은 없었는지는 이제 와서 알 길이 없다.

 

우리 역사에서 부여라는 나라가 차지하는 영향은 옛 조선만큼이나 지대한 것일텐데,

아직 부여라는 나라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그닥 많지 않다.

우리에게 흰옷의 겨레라는 의미의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는 이름을 얻는 계기를 준 것도,

남녀노소 모두 흰옷을 즐겨입던 부여인들이었는데,

부여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어째서 고구려(고려)만큼 관심을 주지 않는 것일까?

하긴 나도 부여라는 나라에는 관심도 없었으니까.  

 

[三年, 春正月, 遣使入魏朝貢. 二月, 扶餘王及妻孥, 以國來降.]

3년(494) 봄 정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2월에 부여왕과 처자가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부여가 고려에 항복함으로서, 고려는 부여 계통의 나라들 사이에서 정통성을 확보했고,

중국의 여러 왕조에 대해서 동이족의 북쪽을 대표한다고 표방할 수 있게 되었다ㅡ는 것이

부여 투항의 의의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부여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부여의 남은 세력은 그 뒤 동해가로 가서 두막루국을 세우고

10세기까지 명맥을 유지했으며, 러시아나 왜로 들어간 사람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秋七月, 我軍與新羅人, 戰於薩水之原, 羅人敗, 保犬牙城. 我兵圍之, 百濟遣兵三千, 援新羅, 我兵引退. 齊帝策王爲使持節散騎常侍都督, 營平二州征東大將軍樂浪公. 遣使入魏朝貢. 冬十月, 桃李華.]

가을 7월에 우리 군사는 신라 사람들과 살수(薩水) 들판에서 싸웠다. 신라 사람들이 패하고 견아성(犬牙城)을 지키니 우리 군사가 이를 포위했는데, 백제가 3천 군사를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니 우리 군사는 후퇴했다. 제(齊)의 황제가 왕을 사지절(使持節) 산기상시(散騎常侍) 도독영평이주(都督營平二州) 정동대장군 낙랑공으로 책봉하였다.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했다. 겨울 10월에 복숭아와 오얏꽃이 피었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3년(494)

 

그리고 신라를 침공한 고려의 군대를 퇴각시킨 것은, 뜻밖에도 신라가 아닌 백제.

이때가 신라 소지왕 16년의 일로 신라측 장수는 실죽(實竹)이었다.

지난번에 위에서는 문자명왕에게 정동장군을 주었는데 이번에는 남제에서 정동대장군이라.

남제에서 위를 의식해서 위에서 고려에 준 것보다 더 높은 관직을 고려에게 주면서 고려를 포섭하려고 했다고 설명하면

내가 좀 섣부르게 판단한 건가?

 

[四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大旱.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秋七月, 南巡狩, 望海而還.]

4년(495) 봄 2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크게 가물었다. 여름 5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남쪽으로 순수하여 바다에 제사지내고 돌아왔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바다에는 왜 제사를 지낸 거지?

 

[八月, 遣兵圍百濟雉壤城. 百濟請救於新羅, 羅王命將軍德智, 率兵來援, 我軍退還.]

8월에 군사를 보내 백제 치양성(雉壤城)을 포위하였다. 백제가 신라에 구원을 청하니, 신라왕이 장군 덕지(德智)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였으므로, 우리 군사가 물러나 돌아왔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4년(495)

 

그리고 백제 왕이 사신을 보내와 고마움을 표하였다. 고 신라본기는 전한다.

이른바 나제동맹.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듯 하던 두 나라가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 돌아서서 친하게 지내고 있다. 고구려라는 하나의 나라를 주적 앞에서 뭉친 것이다.

백제야 수도를 빼앗기고 왕까지 살해당한 마당에 고려에 이를 가는게 당연하지만,

사실 내물왕 때까지만 해도 신라는 고려에 대해 그다지 반감이 없었다.

왜의 침공 앞에서 고구려 광개토태왕에게 구원요청을 해올 적에는 고려를 향해

스스로 '노객' 운운하면서 머리 90도 직각으로 숙이고 구원을 청했고,

고려도 그런 신라에게 5만 보기를 보내주었으며, 사신이 수도에 왔을 때는 대접도 융숭했다.

 

그만큼 서로의 사이는 좋았다. 라기보다는 신라가 고려를 등질 마음이 아직은 없었다.

고려가 신라의 독자성, 왕실과 사직과 백성을 아우른 신라의 국체만 유지하게 해준다면,

신라는 고려의 천하 속에서 안주할 용의가 있었고, 훗날 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우선 '살아남는 것'이 가장 급선무의 일이었으니까.

그랬기에 인질을 보내라는 말에도 순순히 보냈고,

고려왕 앞에서 자신있게 '노객'이라는 부끄러운 말을 쓰는 것도 서슴치 않았던 것.

 

그러던 어느날. 고려 장수왕이 국내성의 수도를 평양으로 옮겨온다.

고려의 중심이 신라 국경에 가까워지고, 신라 국경에는 어느때보다도 많은 고려 군사들이 배치된다.

고려로서는 자국의 수도를 적국 백제로부터 지키기 위한 군사였겠지만,

아무래도 고려군이 국경 가까이 많이 모이는 것이 신라로서는 무척 껄끄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북한군 병력이 휴전선 너머 북방한계선 가까이 잔뜩 집결해있는데

평소보다도 더 수가 많다고 하면 그 일대 군부대에는 모두 비상전투태세 들어가고 하지 않는가.

최악의 경우에는 수도와 경기도 각지에 계엄령이 선포될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우려가 확신으로 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장수왕의 군대가 백제를 공격해,

수도를 함락시키고 백제를 남쪽으로 내몰아버린 것이다. 받은 충격은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다. 

고려는 정말 신라를 그냥 놔둘수 있을까. 고려를 계속 믿고 있으면 우리 국체를 유지할수 있을까ㅡ?

 

장수왕의 평양 천도는 그러한 신라의 친고려 정책에 회의를 느끼게 했으리라.

그러한 회의는 백제가 고려에게 개발리는 걸 목격한 충격으로 당장에 '확신'이 되었고,

신라로서는 고려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국체를 지켜낼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마침 고려와 대치하면서 주변의 다른 여러 나라들과 화의를 맺을 필요성을 느꼈던 백제였고, 

두 나라 사이의 동상이몽이 나제동맹이라는 하나의 역사가 되기에 이른다.

평양 천도가 이후 한반도의 역사를 뒤흔들어놓은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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