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onam.co.kr/read.php3?aid=1276700400334411141
이순신, 사천해전서 거북선 첫 출전 (상)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9
여수 선소, 나주 나대용 생가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9
여수 선소, 나주 나대용 생가
입력시간 : 2010. 06.17. 00:00
여수 거북선 축제에 전시된 거북선
거북선 활약은 임진왜란 전투의 백미
최초 기록없으나 판옥선 개조한 철갑선
용두 화염에 천·지·현·황 화포 왜선 궤멸
1592년 5월 8일 전라좌수군은 옥포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여수로 돌아왔다. 그들은 잠시 휴식을 한 후 다시 출전 준비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왜군 수군 심장부인 부산포 일대에 나가 왜선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수군들은 왜군의 백병전에 대비하여 실전 훈련을 더욱 빡세게 하였고, 신예함선 거북선 출동 준비도 철저히 하였다.
5월27일에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6월3일에 여수에서 모여 함께 출전하자고 연락을 한다. 그런데 그 날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급한 전갈이 왔다. 왜선 10여 척이 사천, 곤양까지 쳐들어 왔고, 자신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접경인 노량까지 밀려 났으니 급히 출동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이순신은 이 급보를 받고 크게 당황한다. 사천은 여수에서 불과 50㎞ 밖에 안 떨어진 거리이다. 만약 왜군이 사천에 수군 진지를 구축하고 전라도로 쳐들어온다면 더욱 낭패이다. 이순신은 전라우수군을 약속 날짜인 6월3일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5월29일,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이런 급보를 전하면서 곧장 따라 오라고 전갈을 하고 전선을 이끌고 출전하였다.
한편 출전하기 전 날 밤, 이순신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그를 발로 차면서, “일어나라. 일어나라. 적이 왔다”라고 고함을 쳤다. 이순신은 깜짝 놀라 일어났다. 그리고 노량으로 출전하였다.
2차 출전에는 순천부사 권준이 중위장을 맡았다. 권준은 1차 출전 때는 전라감영에 파견 나가 있었으나 이번에는 작전 사령관 역할을 맡은 것이다. 또한 구선돌격장이라는 새로운 직책에 이기남과 이언량이 임명되었다. 구선 돌격장이란 바로 거북선 함장을 말하는데 두 사람이 임명된 것은 두 척의 거북선이 이번 해전에 출동한다는 의미이다.
이순신은 전선 23척과 2척의 거북선을 이끌고 노량 앞바다에 이르렀다. 이윽고 전선 3척을 거느린 원균이 하동 선창에 있다가 이순신 일행을 맞았다. 이순신은 원균에게 왜적의 상황을 물었다. “적이 지금 어디 있소.” “사천 등지에 이르고 있소.”
이 이야기를 하자마자, 조선수군은 곤양 쪽에서 나와 사천 쪽으로 향하는 왜선 한 척을 발견하였다. 조선수군은 왜선을 쫒아서 사천으로 향하였다. 사천 선창 쪽을 바라보니 뒷산 험준한 곳에 일본군 400여 명이 길게 진을 치고 현란한 깃발을 꽂아놓았다.
제일 높은 봉우리에는 지휘소처럼 보이는 장막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사람들이 분주히 오르내렸다. 언덕아래에는 12척의 왜선이 있었는데 지휘소의 장수가 칼을 빼들고 지휘하고 있었다.
전세는 왜적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조선수군은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형국이어서 아군에게 불리하였다. 이순신은 활을 쏘아야 왜선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하였다. 접근해서 왜선에 불을 지르려 해도 썰물 때라 연안에서 싸우는 것 역시 불리했다. 더욱이 날도 저물고 있었다.
이순신은 후퇴하는 척하면서 적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는 전술을 쓰기로 했다. 이순신은 함대를 이끌고 도망가는 체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조선 함대가 배를 돌려 채 1마장(400여 미터)도 나가기 전에 왜적 200여명이 왜선을 타고 총을 쏘면서 공격하여 왔다. 그들은 산 위, 언덕위에서도 길길이 날뛰며 조총을 퍼부어댔다.
사천만 한 가운데로 왜적이 쫒아오자 이순신은 급히 뱃머리를 돌려 거북선을 앞세우고 적선 속으로 돌진하였다. 마침 조류도 밀물로 바뀌어서 조선 수군에게 유리하였다. 가장 선두에서 거북선이 쏜살같이 돌격하였다. 거북선 앞 용머리에서는 시뻘건 불이 나오고 연달아 대포알이 날았다. 대포알은 천(天)자, 지(地)자, 현(玄)자, 황(黃)자의 이름을 붙인 갖가지 총통에서 튀어나온 것들이다. 왜적들도 거북선에 맞서 조총과 화살을 쏘아댔다. 옥포해전과는 전혀 다르게 조선 수군과 왜군 사이에 전투다운 전투가 벌어졌다.
대장선에 탄 이순신이 맨 먼저 앞장서서 돌격하자 다른 장수들도 따라나섰다. 조선 수군은 철환과 총통 등 각종 중화기를 한꺼번에 쏘아 부으며 적진 가운데로 돌진했다. 이로 인하여 많은 왜적들이 죽고 상하고 도망치는 등 아수라장이 되었다. 왜적은 조선수군의 공격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너도나도 배를 버리고 언덕으로 올라갔다. 아군은 닥치는 대로 적의 배를 부수고 불을 질렀다. 불태운 배는 모두 13척이었다. 왜적은 언덕 위에 올라가 불타는 배를 바라보고는 통곡을 해댔다. 조선수군은 왜적을 추격하려 하였으나 산에 수풀이 무성하고 날도 저물어 퇴각하였다.
이순신 함대는 사천 땅 모자랑포로 물러나와 캄캄한 그믐날 밤을 보냈다. 군사들을 점검하여 보니 상당수 장졸들이 부상을 입었다. 군관 나대용과 이설도 부상을 당하였다. 이순신은 부상자들을 일일이 챙기고 위로하였다.
사실 이순신 자신도 왼쪽 어깨에 총알이 박히는 상처를 입었다. 피가 발꿈치까지 흘러내렸으나 이순신은 활을 쏘면서 전투를 독려하였다. 그는 전투가 끝난 다음에야 통증을 느끼었다. 칼끝으로 살을 쪼개고 탄환을 꺼내었는데 깊이가 두 치나 되었다. 그는 태연하게 웃고 부하들과 이야기 하는 등 주위를 안심시켰다. 그렇지만 이순신은 이 부상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고생한 것으로 보인다. 1593년 3월에 이순신이 가장 친한 친구 유성룡에게 보낸 편지를 보자.
'비록 죽음에 이를 만큼 다치지는 않았습니다만 연일 갑옷을 입고 있는 데다 다친 곳에 구멍이 넓게 헐어 고름이 줄줄 흘러 아직도 옷을 제대로 입을 수 없습니다. 밤낮을 잊고서 혹 뽕나무 잿물로 혹 바닷물로 씻어 보지만 아직 별로 차도가 없어서 민망합니다.'
여기에서 눈여겨 볼 것은 사천해전의 일등공신은 바로 거북선이라는 점이다. 거북선이 적의 진중을 헤집고 다니면서 총통을 쏘고 왜적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승리한 것이다. 이순신이 임금에게 올린 장계에는 거북선의 활약 이야기가 나온다. 이를 읽어보자.
'그런데 신이 일찍이 왜적이 쳐들어 올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거북선이란 것을 만들었는데, 앞에는 용머리를 설치하고 그 입으로 대포를 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게 했습니다. 그래서 비록 수백 척의 적선 속이라 하더라도 돌진해 들어가서 대포를 쏠 수 있게 했는데, 이번 전투에는 돌격장이 타고 왔습니다.
그래서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적선들 속으로 돌진해 들어가서 천·지·현·황 등 각종 대포를 쏘도록 지시했습니다.'
1592.6.14 당포파왜병장 장계에서
거북선. 거북이 모양처럼 생긴 돌격선. 백병전에 약한 조선 수군의 취약점을 보완하고 적선에 근접하여 적을 교란시키기 위하여 만든 신예 전투함. 이 배는 판옥선에다 덮개를 씌우고 등에는 쇠못을 꼽았다. 선체를 시커멓게 칠하고 거북이 모양으로 만들었다. 검은 거북은 동양의 전설에서 불로장생으로 알려진 바다의 영물이다. 절대로 죽지 않은 불멸의 바다신이다. 이런 거북선이 사천해전 왜선에 바로 근접하여 포를 쏘면서 적을 교란시키고 지휘부를 괴멸시켰으니 왜적들이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다행히도 거북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이순신이 전쟁 중에 쓴 일기 '난중일기'를 보면 1592년 3월 27일과 4월12일에 거북선에서 대포 시험 발사를 한 기록이 있다.
'3월 27일 날씨가 맑고 바람조차 없었다.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도 시험해 보았다. 4월 12일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 배를 타고 거북선에서 지자포, 현자포를 쏘아 보았다.'
거북선이 언제부터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순신이 1591년 2월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후에 전라좌수영에서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원래 거북선은 태종 임금 때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만든 배이었다. 태종실록 (1413년 2월 5일)을 보면 '임금이 임진나루를 지나면서 거북선과 왜선이 서로 싸우는 훈련 모습을 구경하였다' 하였고, 태종 15년(1415년 7월16일)에는 탁신이란 병조의 관리가 '거북선은 많은 적선들을 들이받지만 적선들은 거북선을 해칠 수 없으니 승리를 보장하는 좋은 계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정교한 전함을 만들기를 건의합니다' 라는 기록도 있다.
태종은 왜구 정벌을 위하여 수군 전력 강화에 힘썼고 그 무렵 전선의 수가 500여척에 달하였다. 이후 세종이 집권하자 대마도 정벌에 나선다. 과학을 중흥시킨 세종은 화포 개량에도 힘썼는데 무려 28년의 세월이 걸리었다. '총통등록'이라는 책자에는 화포 제조 기술이 수록되어 있는데 당시에 조선의 주물 기술은 가히 동양 최고였다.
조선의 전선 건조 역사를 살펴보면 세종 때에 이미 백병전에 능한 왜구들이 쉽게 배에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높이가 높은 배를 만들었고, 세조 때 신숙주는 전선 개량에 힘썼다. 이후 1555년 명종 때에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조정은 소나무 판자로 만든 함포실겸 노꾼실을 갖춘 2층 배를 만들었는데 이 배가 판옥선이다. 그리고 판옥선을 개조한 돌격선이 바로 거북선이다.
김세곤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조선 > 해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량 설민석 스페셜 2탄 : 기적의 승리 - 설민석 (0) | 2014.08.08 |
---|---|
사천 해전 - 엔하위키미러 (0) | 2014.08.08 |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8) 전라좌수사 이순신, 옥포 해전에 첫 승리를 하다 (하) - 무등일보 (0) | 2014.08.08 |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7) 전라좌수사 이순신, 옥포 해전서 첫 승리를 하다 (상) - 무등일보 (0) | 2014.08.08 |
[이순신 正論 3] 명량해전 이후 조선수군과 일본수군의 행적 - 임원빈 (0) | 2014.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