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21089
이성계도 못 받은 국새, 이방원은 어떻게 얻었나
[사극으로 역사읽기] 영화 <해적: 바다로 간 산적>
14.08.09 19:12 l 최종 업데이트 14.08.09 19:12 l 김종성(qqqkim2000)
▲ 영화 <해적> 포스터. ⓒ 하리마오픽쳐스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은 배우 유해진과 박철민의 코믹 연기가 은근히 웃음을 자아내는 사극 영화다. 이 영화는 명나라가 만들어준 조선 국새를 수송하던 선박이 고래 때문에 파손되고 이로 인해 국새가 고래 뱃속에 들어간다는 상상을 기초로 하고 있다.
영화 <해적>에서는 고래 뱃속에 들어간 국새를 찾는 과정에서 네 개의 경쟁 집단이 등장한다. 장사정(김남길 분)이 이끄는 산적 집단, 여월(손예진 분)이 이끄는 해적 집단, 모흥갑(김태우 분)이 이끄는 관군, 소마(이경영 분)가 이끄는 또 다른 해적 집단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이 뒤엉켜 싸우는 중에 벌어지는 코믹한 해프닝들이 이 영화의 재미를 만들고 있다.
<해적>은 조선 왕조를 창업한 이성계가 개국 3년 뒤인 1395년에 명나라에 국새를 요청한 사건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사건을 소재로 고래가 국새를 삼켰다는 상상의 스토리를 창조해낸 것이다.
당연한 말이 되겠지만, 고래가 국새를 삼켰다거나 국새가 바다에서 없어졌다거나 하는 일들은 실제로는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국새 사건'이라고 부를 만한 일은 조선 초기에 실제로 있었다.
1392년에 이성계는 고려 왕대비인 안정비(정비 안씨)의 승인 하에 공양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그 뒤 이성계는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란 글자가 새겨진 고려 국새를 명나라에 반납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 국새는 1370년에 공민왕이 명나라로부터 받은 금 도장이었다. 이 국새는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에 찍을 목적으로 주로 사용됐다.
이성계가 명나라에 국새를 반납한 것은 새로운 국새를 보내달라는 뜻이었다. 명나라가 어느 나라에 국새를 보낸다는 것은 그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겠다는 의사표시였다. 이성계는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맺고 조선의 국제적 지위를 안정시킬 목적으로 국새를 반납했다.
이성계에게 국새 내주지 않은 명나라
그런데 국새를 돌려받은 명나라는 이성계에게 새로운 국새를 내주지 않았다. 당시 명나라는 조선이 여진족·대마도·일본 등과 합세해서 명나라를 공격할지 모른다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조선 실권자인 정도전이 만주 정벌의 뜻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의 공포심은 한층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명나라는 새로운 국새를 내주지 않았다.
조선 정부는 여러 차례에 걸쳐 명나라에 국새 발급을 요청했다. 영화 <해적>에 나온 것처럼, 1395년에도 조선은 명나라에 똑같은 요청을 했다. 영화에서는, 이때 명나라가 국새를 내주었지만 그것이 고래 뱃속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명나라는 이때도 국새를 내주지 않았다.
1395년의 경우, 명나라는 '조선이 국새를 요청하면서 발송한 표전문(외교문서의 일종)에 불경스러운 문구가 있다'면서 국새 발급을 거절했다. 이것은 트집 잡기에 불과했다. 명나라가 트집을 잡은 것은 조선의 국제적 위상을 약화 시키는 동시에 이성계-정도전 정권을 흔들기 위해서였다.
영화 <해적>에서는, 국새가 제때 오지 않는 바람에 조선 정부의 문서 행정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공문서에 찍을 국새가 없어서 국가 행정에 차질이 생긴 것처럼 스토리를 전개한 것이다.
명나라가 보내준 국새는, 조선이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에 날인하는 용도로 사용됐다. 명나라는 자기네가 보내준 국새가 찍힌 외국 군주의 공문서를 진정한 공문서로 인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명나라가 국새를 보내주지 않으면, 명나라와의 외교관계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외의 경우에는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조선 군주가 신하를 관직에 임명하거나 왕명을 발포할 때에 쓰는 도장은 별도로 있었다. 이런 도장은 조선이 자체적으로 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명나라가 국새를 보내주지 않는다고 해서 문서 행정에 차질이 생길 이유는 없었다. 차질이 생기는 것은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뿐이었다.
명나라가 국새 발급을 지체하는 동안에, 조선에서는 정도전을 중심으로 만주 정벌이 추진됐다. 두 나라 사이에는 무역분쟁도 발생했다. 이 분쟁은, 조선은 해마다 세 번 무역을 하자고 하고 명나라는 3년에 한 번만 무역을 하자고 하는 바람에 생긴 것이다.
황제국과 신하국이 무역을 하면 황제국이 적자를 봐주는 게 관행이었기 때문에, 조선은 이것을 노리고 1년 3차례 무역을 주장하고 명나라는 조선의 의도를 알고 3년 1차례 무역을 주장했다. 타협점을 찾지 못한 탓에 양국의 무역관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명나라가 국새 발급을 지체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 조선왕의 도장이 찍힌 칙명서(관직 임명장). 사진은 1895년 갑오경장 이후의 칙명서. 흥선대원군의 조카인 이준용을 중추원 1등 의관에 임명하는 칙명서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이방원, 명나라의 국새 사용한 최초의 조선 군주
조선과 명나라가 신경전을 벌이는 상태에서, 1398년에 조선에서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했다. 이성계와 정도전이 이끄는 정권이 이방원의 쿠데타에 의해 전복된 것이다. 명나라 입장에서 볼 때 이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명나라와 가까운 이방원이 정권을 잡자, 국새 문제에 대한 명나라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국새를 보내주는 쪽으로 분위기가 바뀐 것이다.
이방원이 둘째형 이방과(훗날의 정종)를 왕으로 추대한 뒤인 1400년에 명나라에서는 국새를 보내주었다. 그런데 이방과는 국새를 받기 전에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방원의 은근한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이방원에게 왕위를 넘긴 것이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명나라는 이방과가 물러났다는 소식을 듣고 국새 발급을 취소했다. 명나라는 국새를 들고 떠난 사신을 급히 소환했다. 진상을 확인한 뒤 국새를 넘겨주기 위해서였다.
이듬해인 1401년 명나라는 사태를 파악한 뒤 이방원에게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라 쓰인 국새를 내주었다. 명나라를 좋아하는 이방원이 왕위를 넘겨받았으니, 국새를 내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조선은 건국 9년 만에 명나라로부터 국새를 받게 되었다. 제3대 주상 이방원은 명나라가 보내준 국새를 사용한 최초의 조선 군주였다.
2년 뒤인 1403년에 이방원은 명나라로부터 새로운 국새를 받았다. 이 국새는 그 후 62년간 사용됐다. 조선은 세조(수양대군) 때인 1465년에 새로운 국새를 받았다. 이 국새는 조선이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받든 해인 1637년까지 사용됐다.
위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명나라가 내준 국새가 도중에 없어진 적은 없었다. 그래서 영화에서처럼 소동이 벌어진 적은 없었다. 또 명나라가 국새를 보내주느냐 마느냐가 조선의 국가적 정체성에 영향을 준 적도 없었다. 그런 게 없어도 조선 임금은 여전히 임금이고, 그런 게 없어도 조선이란 나라는 여전히 나라였다.
만약 영화에서처럼 국새가 사라졌다면, 조선보다는 명나라가 훨씬 더 곤혹을 겪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조선-명나라 관계가 오랫동안 단절됐다면, 조선은 명나라보다는 여진족·대마도·일본·오키나와와 훨씬 더 가까워졌을 것이다. 참고로, 당시 대마도는 독립적인 정치 집단이었고 오키나와는 독립적인 왕국이었다.
당시 명나라가 가장 싫어하는 종족은 여진족이었다. 여진족은 명나라가 보기에 악의 축이었다. 만약 조선이 그런 악의 축과 가까워졌다면, 명나라는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행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명나라의 패권은 조명동맹에 기초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래가 국새를 삼키는 일이 실제로 발생했다면, 그것을 꺼내느라 혈안이 되었을 쪽은 조선이 아니라 명나라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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