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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명량 화제, 난중일기로 만나는 '인간 이순신'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 난중일기로 만나보는 명량해전
등록 2014-08-08 22:38:53 수정 2014.08.09 13:19
[일본에 남은 해전 그림. 이순신과 함께한 조선 전함의 위용은 대단했다 / 사진=조선역해전도 朝鮮役海戰圖]
[국보 76호 난중일기 초고본. 인간 이순신의 고뇌가 담겨 있다 / 이하 사진=rippertnt]
한 사내가 있었다. 그의 절친한 친구로부터 문학에 재능이 있다고 칭찬을 들은 바 있는 그는 무인이 되었다. 정치와 아부를 모르던 그는 올곧은 성품으로 인하여 열악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북방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백의종군을 한다. 나라로부터 첫번째로 버림 받은 것이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전 국가는 갈팡질팡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능력을 알아보았던 절친한 친구의 노력으로 전라 좌수사에 임명된 그는 판옥선을 늘리고 거북선을 만들고 병사들을 훈련시켜 다가올 전쟁에 대비한다. 결국 전쟁은 터졌고, 육지에서는 속수 무책. 그러나 그는 첫 번째 승전보를 울리고 연달아 해전에서 승리, 한산도에서는 학익진으로 적군의 기세를 눌러버린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의 승전을 시기한 동료 장수와 왕, 권력 다툼에 눈이 먼 대신들에 의해 두 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된다. 조국을 구했지만 나라로부터 왕으로부터 버림받은, 민족의 성웅이기 전 평범한 사람이였던 인간 이순신을 그의 난중일기를 통해 만나보자.
이길 수 없는 싸움, 왕은 싸우지 않는다고 독촉
[유일하게 동구릉에서 개방돼 있는 선조의 릉. 선조도 그의 잘못을 알았던 것일까. 다른 릉 보다 무인상의 크기가 가장 크다]
[이순신 장군에게 늘 힘이 되고자 했던 서애 류성룡]
새벽에 비밀 교지가 들어왔다. 수륙 열 장수가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볼 뿐 계책이라도 하나 세워서 토벌하려고 들지 않는다. 고 하였다. 3년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그런 적이 없다. 여러 장수와 맹세하여 목숨을 걸고 복수할 뜻으로 날을 보내고 있지만, 험한 소굴에 웅크리고 있는 적을 가볍게 나아가 공격할 수가 없을 뿐이다. 하물며 자기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크게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루 내내 바람이 불었다. 초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나랏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데도 안으로는 구제할 방책이 없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군은 다시 쳐들어오게 된다. 정유재란이 발발 한 것이다. 일본군은 눈엣 가시였던 이순신 장군을 제거하고 싶었다. 이를 위하여 이중간첩을 보내 부산을 통해 다시 공격할 것이라는 미끼를 던지게 되는데, 연승을 했지만 지형이나 수적 열세로 인하여 부산 앞 바다에서 싸우는 것은 고래 입에 먹이를 물어주는 상황.
이순신 장군은 수군을 무모하게 잃을 수 없었고, 이에 반대 상소를 올리게 된다. 그의 절친이자 늘 응원했던 류성룡이 힘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분노한 선조를 비롯하여 이순신의 공을 시기한 일부 조정대신들로 인하여 삭탈관직 당하고 두 번째 백의 종군을 하게 된다.
백의 종군에 이은 고난의 연속. 어머니가 돌아가시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 장군이 고뇌하는 장면에서 라이트모티브처럼 사용된 부르크너의 7번 교향곡 2악장 / 영상=유튜브]
[Abruckner 사이트에도 불멸의 이순신에 대해 정보가 올려져 있다 / 이미지=Abruckner]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몹시 번잡스러워서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덕을 불러 대가 이야기 하고, 또 아들 울에게 이야기 하였다. 마음이 몹시 언짢아서 취한 듯 무엇에 홀린 듯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으니 이 무슨 조짐일까. 병환중인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종을 보내서 어머니의 소식을 알아오게 하였다. …
.. 조금 있자니 배에서 달려온 종 순화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곧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니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 하여 모두 다 적을 수가 없다.
..아침저녁으로 그립고 슬퍼서 눈물이 엉기에 피가 되었는데도 하늘은 어찌 아득하기만 하고 나를 밝혀 주지 않는가? 어찌 빨리 죽지 않는가?
난중일기를 보면 어머니를 늘 걱정하는 효심 깊은 아들, 이순신 장군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백의 종군을 할 때 그를 만나려 찾아오던 그의 어머니는 그만 숨을 거두게 된다. 나라마저 그를 버린 상황에 심적으로 의지하던 어머니의 죽음. 죄인의 위치로 어머니의 죽음을 제대로 지킬 수 없던 한 아들의 비통한 심정이 애절하게 드러난다.
이순신의 뒤를 이은 원균, 불길한 조짐의 시작
[전라좌수영이 있던 여수 진남관 / 이하 사진=rippertnt]
[전라좌수영의 전선들이 있던 바다를 거북선을 탄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지키고 있다]
새벽 꿈이 매우 어지러웠다. 아침에 부사가 보러 왔다. 늦게 충청 우후 원유남이 한산도에 왔는데 원균이 못된 짓을 많이 한다고 했다. 또 진중의 장졸들이 다 그를 따르지 않으므로 앞일을 예측하기 어렵다고 했다…
…아침을 먹은 뒤 원수에게 갔더니, 원균의 정직하지 못한 점을 여러 번 이야기 하였다… 원수의 장계에는 통제사 원균이 앞으로 나가지 않고 오직 안골포의 적을 먼저 쳐야 한다고 합니다. 수군 여러 장수들은 이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원균은 안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으므로 절대로 여러 장수들과 합의하지 못할 것이므로 일을 그르칠 것이 뻔 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하게 된 후, 조정의 대신과 함께 그를 모략한 원균 장군이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된다. 부산 앞바다에서 맞서 싸우면 되겠다고 생각한 그였지만, 이순신 장군이 남긴 전략 자료와 적군과 아군의 군세와 상황을 볼 때, 그 역시도 싸움이 불가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도원수인 권율 장군이 싸움을 하지 않는 원균을 부하들 앞에서 매 타작을 가하고 조정의 압박이 늘어갔다. 그 역시 등 떠밀려 부산으로 진격하였다가 후퇴, 조선 수군의 처참한 패배의 현장인 칠천량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애써 쌓아 올린 수군, 물 속으로 수장되다
[이순신 장군을 모함하였던 원균 장군. 그의 잘못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본화 속에 남아 있는 거북선. 칠천량 해전에서 수 많은 판옥선과 함께 모든 거북선을 잃게 된다]
…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내가 제찰사와 함께 한곳에 다 달았더니 많은 시체가 널려 있기에 밟기도 하고 목을 베기도 하였다. …
… 거의 다 왜적에게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저만은 혼자서 수풀 속에 들어가 엎드려 기어서 목숨을 구하였습니다. 그리고 간신히 여기까지 왔습니다…
..듣고 나니 참으로 놀랄 일이다. 우리나라가 믿는 것은 오직 수군뿐인데, 수군이 이러하니 다시 더 바라볼 것이 없다. 두고두고 생각할수록 분하여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 모든 사람이 울며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자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으로 달아나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또한 대장의 잘못은 말로 다 할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애써 쌓아 올린 수군과 힘써 건조한 판옥선과 거북선이 처참하게 수장 당하는 것을 알았던 걸까. 그는 칠천량 해전의 대패를 꿈에서 직감하게 된다. 꿈이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그의 꿈은 현실이 되고, 가뜩이나 백의 종군 상황에 어머니 마저 잃은 상황에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었다.
잘못된 리더의 판단은 애써 쌓아 올린 조선 수군을 전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게 만들었다. 회생 불가능해 보이는 위기의 순간, 그러나 조선에는 이순신이 존재하였다.
나라는 그를 버렸지만 그는 나라를 버리지 않다
[이순신 장군의 묘. 처음 남해 충렬사에 안치됐던 시신이 광해군 6년 현 위치로 이장됐다. 우측 비각에는 정조대왕의 어제비가 남아있다]
[일본 교과서에도 실린 이순신 장군 / 이미지=KBS 방송화면 캡처]
슬프다, 국가가 믿는 것이 수군 뿐이거늘 하늘이 아직도 재화를 부족타고 하시와 적병이 다시 날뛰어 삼도대군이 한 싸움에서 다 하였으니 앞으로 바닷가 성읍을 뉘 있어 보호하며 한산도를 이미 잃었으니 적이 무엇을 꺼리리오,
위급함이 조석에 달렸도다,
지금에 할 일은 흩어진 군사와 배를 모으고 급히 요지를 정하여 큰 수군영을 지음에 있을 뿐이니 그리하면 도망한 무리도 되돌아 올 것이요, 날뛰는 적들도 막을 것이다.
이 책임을 맡을 만한 이는 위엄과 은혜와 재간이 전부터 내외에 신망을 받는 이가 아니면 어찌 감당 하리오,
그런데 경은 전번에 벌써 명성이 들어났고 또 임진년에 공을 세워 변방군사가 굳게 믿던 바로 저번 경의 벼슬을 갈아 죄명을 쓰게 한 것은 사람의 생각이 잘못되어 그러함이로다.
그리하여 오늘의 패전을 당하니 또 무슨 말을 하며 또 무슨 말을 하랴…
- 칠천량 해전 대패 이후 선조의 삼도수군 통제사 재 임명 교지
수군이 칠천량에서 참패를 하자 일본군은 임진왜란과는 달리 서해 바다를 통해 육지 뿐만 아니라, 무주공산이 된 바다를 통해서도 진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라가 사라질 절제절명의 위기. 조국은 이순신 장군을 다시 찾았고, 그를 두 번 이나 버린 조국 이였지만, 다시금 국가의 부름에 응하게 된다. 하지만, 수습하고 보니 남은 배는 12척, 게다가 남은 몇몇 장수들은 싸울 의욕마저 없었다.
... 아침에 장계의 초고를 고쳤다 늦게 거제 현령, 발포 만호가 들어와서 나의 명령을 들었다. 그들에게서 배설이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모양을 전해 들었다. 괘씸하고 한탄스럽기 짝이 없다. 이런 자들이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 아첨이나 해서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지위에 올라가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치고 있건만, 조정에서 살피지를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 적선이 오지 않았다. 여러 장수들이 불러서 대책을 토의하였다. 우수사 김억추는 겨우 일개 만호직에나 맞겠으며 수사의 자리를 받을 만한 인물이 못 되는데, 좌의정 김응남이 서로 친분이 두텁다고 하여 마음대로 임명해 보냈다. 이래서야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때를 못 만난 것만을 한탄할 따름이다…
나라로부터는 지원이 없고, 무능해 보이는 장수들, 싸울 의욕이 없는 병사. 적의 수군은 1000 척이 넘는다고 들리는 상황. 이길 수 없는 싸움 이였다. 무모함을 넘어서 자살 행위에 가까웠다. 이순신 장군은 신중한 인물 이였다.
치밀하게 준비하고 계산하여 이길 수 있는, 승산이 있는 싸움만 하는 그였다. 왜 이러한 승산 없는 싸움, 이겨도 시기하는 왕과 대신들로부터 모함 받고, 지면 죽음을 맞이하는 이 싸움, 불길 속에 왜 그는 뛰어 든 것일까? 그 이유는 제 살기 급급하여 도망가기 바쁜 왕과 대신들을 대신하여 이 땅의 백성들을 지키기 위한 결연한 의지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여진다.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는 비참한 지경인데, 앞으로 이들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를 물었다…
… 아침을 먹고 길을 떠나 옥과현 경계에 이르니 피난민들로 길이 가득 찼고, 남자와 여자가 서로 부축하고 가는 모습을 차마 눈뜨고 볼수가 없었다…
… 흩어져 달아난 까닭을 물었더니, 모두들 말하기를 “병사가 적이 쳐들어 온다고 떠들면서 창고에 불을 지르고 달아난 까닭에 백성들도 흩어져 도망갔습니다.” 하였다. 관청에 들어갔더니 사람의 소리라고는 들리지 않았고 관청 건물과 창고와 병기가 모두 타 버린 뒤였다. 관리와 백성들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직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영상=유튜브]
적선이 1000여척이 넘는다는 유언비어가 조정에도 들리게 되고, 늘 이순신장군을 편에 섰던 류성룡 마저 무모한 싸움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선조 임금마저 이는 승산 없는 싸움이라고 생각하고, 무모한 싸움을 하지 말고 목숨을 보전하여 육군과 합류하라고 명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게 된다.
임진년으로부터 6년 동안에 적이 감히 충청, 전라도를 바로 찌르지 못한 것은 우리 수군이 그 길목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항거해 싸운다면 오히려 해 볼만합니다. 이제 만일 수군을 전폐한다면, 이는 적이 만 번 다행으로 여기는 일일 뿐더러 충청도를 거쳐 한강까지 갈 터인데, 신은 그것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비록 전선의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은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이충무공전서
죽으려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명량으로 쳐들어 올 시점은 서로가 알고 있었다. 조선 수군에게는 가장 불리한 물살, 즉 일본 수군에게 가장 유리한 동에서 서로 물살이 가장 빠른 시간 이였다. 거기에 선봉장은 명량과 비슷한 물살의 시코쿠 해안의 해적 출신 미다시(구르지마 미치후사). 그는 그의 형을 죽인 이순신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차였다. 결전을 앞두고 일본 수군의 동태를 듣게 된다.
…왜놈들이 모여 의논하기를 조선 수군 10여척이 우리 배를 추격해서 많이 쏘아 죽이고 배를 불태웠으니 매우 분하다. 각처의 배를 불러 모아 힘을 합하여 조선 수군을 섬멸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곧장 서울로 올라가자!...
일본 수군은 이순신의 수군이 12척 정도 밖에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었고, 섬멸하고 나서 곧바로 서울까지 북상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사실로 판명되었다. 거룩한 전쟁이 있기 전, 그의 일기에는 그의 결연한 마음이 담겨 있다.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과 함께 진을 우수영 앞 바다로 옮겼다. 그것은 벽파정 뒤에 명량이 있는데, 수가 적은 우리 수군으로서는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서,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라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는 말이 있다.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이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하고 엄하게 약속했다.
13 vs 133, 그러나 1대 133의 싸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다
[명량해전 그림.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 이외에는 멀찌감치 물러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명량해전 당일의 일기 내용은 난중일기의 글 중 가장 길고 처절한 전투 상황을 바로 눈 앞에 보여 주는 듯이 생생히 남기고 있다. 전쟁에 참여한 전선의 수가 300 척이 넘느냐 하는 논란이 있지만, 조선 전선의 수는 12척 혹은 1척이 늘어난 13척으로 보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실제 해전의 초기에는 거의 이순신 장군 홀로 싸웠음을 난중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사극이나 영화에는 과장된 부분들이 있는지라,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원 내용을 그대로 담아 본다.
[명량 앞바다. 폭이 좁고 유속이 빨라 조수의 우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한다고 해 울돌목이라 불린다. 바닥이 불 규칙한 성격에 곳곳에서 회오리 같은 물살이 나타나곤 한다]
이른 아침에 망을 보던 자가 와서 보고하기를 “수도 없이 많은 적선이 명량으로 부터 곧바로 우리가 진 치고 있는 곳을 향해 달려옵니다” 하였다. 곧 모든 배에 명령하여 닺을 올리고 바다로 나갔더니 적선 1백 30여척이 우리 배들을 둘러쌌다. 여러 장수들은 양쪽의 수를 헤아려 보고는 모두 도망하려는 꾀만 내고 있었다.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벌써 2마장(1마장 약 1.4Km) 밖에 나가 있었다.
나는 노를 빨리 저어 앞으로 나아가며 지자, 현자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았다. 탄환이 폭풍우 같이 날아갔다. 군관들도 배 위에 총총히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 댔다. 그러자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쳐들어 왔다 물러갔다 하였다. 그러나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 형세가 어찌될지 헤아릴 수 없으니 온 배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돌아다보며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소아 맞혀라” 하였다. 여러 장수의 배를 돌아보니 이미 1마장 정도 물러났고,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멀리 떨어져 가물가물 하였다. 배를 돌려 바로 중군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목을 베어다가 내걸고 싶지만,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가 점점 더 멀리 물러나고 적들이 더 덤벼들 것 같아서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 되었다.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기를 세워 군령을 내리도록 하고 또 초요기를 세웠더니, 중군장인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배 가까이 왔으며, 거제 현령 안위의 배가 그 보다도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서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것이냐? 하였다. 그러자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뛰어들었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처형하고 싶지만 전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하였다.
그리하여 두 배가 적진을 향해 앞서 나가는데,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두척에 지시하자 일시에 안위의 배에 개매 붙듯하여 서 서로 먼저 올라가려 하였다. 안위의 격군 일고여덟 명이 물에 뛰어들어 헤엄을 치니 거의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안위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죽을 힘을 다해서 몽둥이를 들거나 긴 창을 잡거나 또는 돌멩이를 가지고 마구 후려쳤다. 배 안의 사람들이 거의 기운이 빠지게 되자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쫒아 들어가서 빗발치듯 마구 쏘아 댔다.
적선 세 척이 거의 다 뒤집혔을 때 녹도 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뒤 쫒아와서 서로 힘을 합쳐서 적을 쏘아 죽여 적은 한 놈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왜인 준사는 이전에 안골포의 적진에서 항복해 온 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바다에 빠져 있는 적을 굽어 보더니 그림 무늬 놓은 붉은 비단옷을 입은 자가 바로 안골진에 있던 적장 미다시입니다” 라고 말했다.
내가 물 긷는 군사 김돌손을 시켜 갈구리로 낚아 올렸더니, 준사가 펄쩍 뛰면서 “정말 미다시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곧바로 명령을 내려 토막토막 잘랐더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우리 배들이 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일제히 북을 올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쫒아 들어갔다. 지자, 현자 대포를 쏘니 그 소리가 산천을 뒤 흔들었고, 화살을 빗발처럼 쏘았다. 적선 31 척을 깨뜨리자 적선은 도망하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
이번 일은 참으로 하늘이 도우셨다.
몸으로 나라를 구한 이순신, 명나라도 일본도 감복하다
이순신 장군의 라이벌이기도 한 일본 수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 적으로써 이순신 장군을 죽이고 싶어했지만, 인간적으로 그를 흠모하였던 부분은 그가 남긴 글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 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장수 정도였을 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몇일 몇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 하는 장수로서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 련지 의문이 갔다 ...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모하는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싶은 사람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 와키자카 야스하루 /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신
명나라 수군 제독으로 참전한 진린은 처음 파병 시 조선 수군을 업신 여기고 민폐를 끼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럼나 이순신 장군은 그러한 진린을 전장에서 부하의 목숨을 희생하여 그를 구해 주었다. 수군에게 있어서 목숨과도 같은 배를 선물하는 모습, 부하들을 대하는 것과 전장 터에서의 그의 모습을 보고 이순신 장군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조정으로부터 모함을 받아서 싸울수록 그의 입지가 불안함을 알게 된 그는 어떻게든 이순신 장군을 살리고 싶었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싸울 필요가 없었던 노량 해전에 참가하여 의리를 다하고,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주검 앞에 누구보다도 슬퍼하였다. 그가 얼마나 이순신장군을 흠모하고 살리고 싶었는지는 노량 해전에 임하기 전에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글에서 잘 나타난다.
황제 폐하!
이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게 하소서..
신(臣)이 본 이순신은 그 지략이 매우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 성품과 또한 장수로 지녀야 할 품덕을 고루 지닌바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 명(明)국의 화근인 저 오랑케(훗날청國)를 견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저 오랑케의 땅 모두를 우리의 명(明)국으로 귀속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 (중략)
통제사 이순신은 모함과 멸시에도 굴하지 않고 국왕에게 충의 보였으니 이 어찌 장수가 지녀야 할 가장 큰 덕목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조선국왕은 원균에게 조선통제사 지휘권을 주었으나 그 원균이 자만심으로 인하여 수 백척에 달한 함대를 전멸케 하였고 단 10여척만이 남았으메 당황한 조선국왕은 이순신을 다시 불러 조선수군통제사에게 봉했으나, 이순신은 단 한번의 불평 없이 충의를 보여 10여척의 함대로 수 백척의 왜선을 통쾌하게도 격파하였나이다.
허나 조선의 국왕과 조정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또다시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고 있나이다. 만일 전란이 끝이 난다면 통제사 이순신의 그 목숨은 바로 풍전등화가 될 것이 뻔하며, 조정대신들과 국왕은 반드시 통제사 이순신을 해하려고 할 것입니다.
황제폐하 바라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 구명해주소서.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 이순신 장군이 주는 메시지
[보물 440호 충렬사 팔사품. 명나라 황제 신종이 충무공 이순신의 전공을 높이 평가해 선물한 여덟가지 선물 / 사진=통영충렬사 홈페이지 (http://www.tycr.kr/installation.php)]
23전 23승 불패의 신화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 조선 전함의 우세, 뛰어난 화포등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의 절친한 벗인 류성룡의 징비록에서 그 비밀에 대한 답을 알려 주고 있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머무르고 있을 때 운주당이라는 집을 지었다. 그는 그곳에서 장수들과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투를 연구하면서 지냈는데, 아무리 졸병이라 하여도 군사에 관한 내용이라면 언제든지 와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했다. 그러자 모든 병사들이 군사에 정통하게 되었으며,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는 장수들과 의논하여 계책을 결정하였던 까닭에 싸움에서 패하는 일이 없었다. – 류성룡 ‘징비록’ 중
요즘 위기라는 목소리가 많다. 저가와 대량으로 물 밀듯이 시장을 잠식하는 중국, 군국주의로 회귀하는 일본, 실리콘밸리를 필두로 S/W 와 서비스로 세상을 장악하는 미국. 그 어느 때 보다 우리나라 경제를 위협하는 외부의 위험 요소들이 많은 시기이다.
2009년 골드먼삭스는 2050년 1인당 GDP 세계2위의 나라를 대한민국으로 내다 보았다.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이를 실현가능케 하기 위해 지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2m의 긴 칼에 담긴 이순신 장군의 의지일 것이다.
[2m에 달하는 이순신 장군의 검. 손잡이 부근에 명문이 새겨져 있다 / 사진=rippertnt]
삼척서천산하동색(三尺誓天山河動色)
일휘소탕혈염산하(一揮掃蕩血染山河)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로 산하를 물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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