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onam.co.kr/read.php3?aid=1393254000435453141 , http://blog.daum.net/kjs6565/15977696
* 울돌목의 의병항쟁(2) 사진은 기사 내용상 필요할 듯 하여 다른 곳에서 가져왔습니다.

전라도 사람들,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다.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3부 - 정유재란과 호남 사람들 36 
입력시간 : 2014. 02.25. 00:00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 충무공벽파진전첩비 - 진도군 벽파진   2. 해남우수영 공원 조각상 - 마하수 5부자
3. 해남우수영 공원 조각상, 울돌목의 의병항쟁(2) - 조응량 부자와 양응지 숙질 
 
무명의 선장과 목수들 밤낮으로 부서진 판옥선 수리
부친이 통제사 구원하다 전사, 복수를 맹세한 마씨 형제들 적 패퇴할 때까지 결사 항전 
피난선 후방 배치 전선 위장, 이름도 명예도 남기지 않고 보훈 바라지 않고 터전 지켜 

전남 해남군 문내면에 있는 우수영관광지를 간다. 명량대첩기념공원에서 바라보니 울돌목이 한 눈에 보인다. 공원에는 명량해전을 재현한 조각상들이 산책로 군데군데에 전시되어 있다. 

먼저 ‘폐선(廢船)을 명량의 전함으로’라는 제목이 붙은 조각상을 보았다. 조각상 아래에 해설이 붙어 있다. 

칠천량 패전 이후 우리에게 남은 전선은 부서진 판옥선 9척 뿐이었다. 온전한 전선이 없어 해전이 불가능했던 이 때 밤낮으로 폐선을 수리하여 마침내 명량해전을 가능케 한 사람들이 있었다.

정충량, 김세호 등과 함께 전쟁준비에 혼신의 힘을 쏟은 이들이 바로 저 무명의 선장과 목수들이었다.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칠천량 패전이후 남은 전선이 부서진 판옥선 9척 뿐이라고 적혀 있으니. 역사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명량해전에서 싸운 배는 13척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순신이 보성에서 선조에게 ‘저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나이다’라고 장계를 쓴 이후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탄 배 1척이 더해진 것이다. 

물론 칠천량 패전이후 남은 판옥선은 부서져서 많은 수리가 요구되었으리라. 그래서 해남·진도 등 전라도 연안 지역 어부와 선장 그리고 목수들이 부서진 판옥선을 밤낮으로 수리하였다. 

조금 걸어가니 울돌목의 의병항쟁이라고 적힌 조각상이 두 개 있다. 

먼저 ‘울돌목의 의병항쟁 1’ 조각상부터 본다. 바로 마하수 부자의 참전 조각상이다.

명량대첩은 해남·진도 등 해안지방 사람들이 수군과 같이 목숨을 바쳐 싸운 의병항쟁의 승리였다. 부자형제와 이웃들이 함께 참전하여 끝까지 싸웠으니 마하수 5부자의 혈전이 그 한 예이다.

부친이 적선에 포위된 통제사를 구원하다가 적탄에 맞아 전사하자 그 시신을 안고 일성통곡으로 복수를 맹세한 마씨 형제들. 그들은 적이 패퇴할 때 까지 결사의 항전을 그치지 않았다. 

마하수 5부자는 마하수와 네 아들 성룡, 위룡, 이룡, 화룡을 말한다. 마하수의 기록은 호남절의록의 ‘이순신과 함께 순절한 제공 사실’에 나온다. 호남절의록을 읽어보자.

마하수는 장흥출신으로 1564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선공감 주부를 제수 받았다. 임진왜란 때 부친이 적에게 해를 당하니 그는 복수를 맹세하였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을 장흥 회령포에서 만나니 이순신이 고을의 여러 배들을 모아 후원을 해주도록 명령하므로 그는 “마땅히 이공과 함께 생사를 같이 하겠습니다. 남자는 비록 흰머리가 되어도 마음은 건강해지는 법입니다”하였다. 

그는 백진남, 정명열, 문영개 등 십여 명과 함께 먼 바다에 배를 늘어놓고 마치 군선처럼 보이게 하여 명량 싸움을 응원하였다. 

그는 고을의 배들을 모아 바깥 바다에 배치하고 바라보니 이순신이 적들에게 포위되었으므로 칼을 뽑아들고 “대장부는 한번 죽을 뿐이지 어찌 구차하게 목숨을 구하고자 할 것이냐”하고 두 아들 성룡, 위룡과 함께 적진으로 돌진하여 힘껏 싸우다가 탄환을 맞고 전사하였다. 

한편 호남절의록에는 마하수의 아들 마성룡과 마위룡도 기록되어 있다. 마성룡은 해전 후 얼마 있다가 상처가 악화되어 죽었다. 

그랬다. 명량해전에는 피난선 100여척이 조선 수군 본진 뒤에 배치되어 전함으로 위장하였다. 이들은 실제 전투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후방 지원을 하기도 하였다.

1597년 9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에는 명량해전 시 피난선이 조선 함대 후방에 배치되어 전선처럼 위장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정사 正史도 전라도 사민 士民들의 공로를 인정한 것이다. 

이순신이 진도에 도착해 병선을 수습하여 10여 척을 얻었다. 이때 배를 타고 피난해 있던 연해(沿海)의 사민(士民)들이 이순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하였다. 이순신은 길을 나누어 그들을 불러 모아 군대 후면에 있으면서 군사의 형세를 돕도록 했다. 

이 해상 의병들이 백진남·마하수·오익창·김성원·문영개·변홍원·백선명·김택남·임영개·정운희·정명열·김안방 등이다. 

백진남은 해남군 옥천면 출신으로 삼당시인인 옥봉 백광훈의 아들이다. 그는 1594년 초에 고봉 기대승의 아들 기효증이 선조가 계시는 의주에 보낸 양곡을 지원하였고, 명량대첩에도 이순신을 도와 식량과 의복을 내놓았다. 백진남은 명량해전 이후에도 이순신을 여러 번 만났다. 10.9, 10.23, 10.26, 12.2일자 난중일기에 그 사실이 적혀 있다. 

무장출신 오익창의 역할도 컸다. 그는 전투가 시작되자 본진과 피난선사이를 오가면서 여러 배에서 솜이불 백 여 개를 거두어 이를 물에 적신 후 배에 걸어두니, 적의 탄환이 이를 뚫지를 못하였다. 또 오이(東瓜)를 모아 배 한 척에 가득 실어두고 병졸들 중 목마른 이에게 나누어 주어 갈증을 풀게 하였다. 이순신은 탄복하여 오익창에게 말하기를 “내 군사들이 거둔 이번 승리는 오상사의 힘이 크도다”하였다. 

오익창은 ‘호남절의록’에 기록되어 있는데 최근에는 문집 ‘사호집’이 국역되어 관심을 끌었다. 그의 신위는 고창 죽산사 竹山祠(전북 고창군 아산면 성산리 죽산 마을 소재)에 모시어져 있다.

이어서 ‘울돌목의 의병항쟁(2)’ 조각상 해설을 읽는다. 

임진·정유년에 왜적의 침공을 받아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하니 이 지역 백성들이 분연히 일어나 의병으로 참전하였다.

조응량 부자와 양응지 숙질도 이 지역 백성들과 함께 의병으로 참전하여 명량해전에서 낮과 괭이 등 연장으로 적을 무찌르다가 승리를 눈앞에 두고 전사하니 보는 이들이 모두 슬퍼하였다.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의병이 마하수뿐만 아니었다. 그런데 조응량 부자와 양응지 숙질이 누구인가. 언젠가 진도군 고군면 벽파진에 세워진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에서 본 명량해전 전사자 명단이 생각났다. 

“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여기더니라. (중략) 이천구, 김수생, 김성진, 하수평, 박헌, 박후령과 그의 아들 인복, 또 양응지와 그의 조카 계원, 그리고 조탁, 조응량과 그의 아들 명신 등 많은 의사들이 목숨까지 바쳐 천추의 호국신이 되었다. (후략)” 

그렇다, 조응량 부자는 조응량과 그의 아들 조명신을 말하고 양응지 숙질은 바로 양응지와 그의 조카 양계원을 일컫는다.

한편 공원 한 쪽에는 해남출신 의병 오극신·오계적 부자가 싸우다가 전사한 조각상도 있다. 

전라도 의병들은 비단 조각상에 새겨진 의병들뿐만 아니었다. ‘호남절의록’에 보면, 진도군수 송덕일의 삼촌 송지와 군관 송희립의 친척 송계현·송계량·송계창도 의병을 일으켰고,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동생 김응추도 명량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육상 의병들의 활동도 괄목할 만하다. 영암의 전몽성, 유장춘과 나주의 박문립 등은 수군과 협력하여 명량 해협 인근의 해안지대에서 유격전을 펼쳤다. 이 당시에 나베시마 나오시게 휘하 별동대 2만5천명이 배를 타고 서해안으로 가기 위하여 해남 어란진 근처에 대기 중이었다. 

이처럼 호남의 민초들은 몸을 아끼지 않고 왜적과 싸웠다. 이름도 명예도 남기지 않고 보훈도 바라지 않고 자신의 터전을 지켰다. 무명의 용사들은 정말 위대하였다. 호남사람들, 정말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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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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