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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기조식 속 배흥립·송희립 등 만나며 결전 준비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3부 - 정유재란과 호남 사람들 19
이순신, 보성에서 8일간 머무르다
입력시간 : 2013. 04.10. 00:00

보성군수 관아와 객관이 있었던 보성초등학교

장인이 보성군수 역임하는 등 보성과 깊은 인연
이순신 이동 따라 흩어졌던 군사들 속속 합류
 
8월9일에 이순신 일행은 낙안에서 보성으로 향하였다. 도중에 순천부사 우치적과 김제군수 고봉상이 합류하였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이 쓴 이순신 행록에는 ‘8월3일에 진주에서 출발할 때 군관 9명과 병졸 6명 도합 15명밖에 안 된 군사가 순천에서는 60명이 되었고 보성에 이르렀을 때는 120명으로 늘어났다’고 적혀 있다. 이순신을 따랐던 장수와 병사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다. 

이 날 저녁에 이순신은 보성 조양창(보성군 조성면 조성리 유천리 고내마을)에 도착하였다. 다행히 창고의 곡식은 봉인된 채 그대로 있었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많은 군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는 군졸 4명을 시켜 조양창을 지키게 하였다. 

이후 이순신은 8월16일까지 8일간을 보성에서 머문다. 보성은 이순신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그의 장인 방진이 보성군수를 하였다. 이순신은 21세가 되던 해인 1565년에 상주 방씨와 결혼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순신 결혼에 당시 병조판서였던 이준경이 중매를 섰다는 사실이다. 이준경은 을묘왜변 때 전라도 순찰사로서 왜구를 소탕한 인물이다. 을묘왜변은 1555년 5월에 왜구가 선박 70여척으로 일시에 전라남도 남해안 쪽에 침입하면서 일어난 변란이다. 왜구들은 달량포(해남군 북평면)를 침입하였고, 해남 어란포·장흥·영암·강진 등 일대를 횡행하면서 노략질을 하였다. 이 때 절도사 원적, 장흥부사 한온 등이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은 포로가 되는 등 사태가 매우 긴박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호조판서 이준경을 도순찰사, 김경석·남치훈을 방어사로 임명하여 왜구를 토벌하였다. 또한 영의정 이준경은 명종이 돌아가실 때 명종 비 심왕후의 뜻을 보필하여 선조를 즉위시킨 원로 재상이었다. 


열선루가 있었던 보성교회

한편 이순신의 장인 방진은 이순신에게 무과시험을 권유한 사람이기도 한데, 방진의 무남독녀인 부인 방씨 또한 대단한 여장부이었다. 그녀에 대한 일화는 '이충무공전서'에 적혀 있다. 

정경부인 상주방씨는 충무공의 부인이다. 부친의 이름은 진(震)인데 벼슬은 보성군수를 지냈다. 그녀는 매우 배포가 큰 여장부이었다.

이런 일화가 있다. 그녀의 나이 12세 때 화적들이 집에 쳐들어왔다. 아버지 보성공이 화살로 도둑을 쏘다가 화살이 다 떨어 졌다. 그는 집안사람들에게 화살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도둑들이 집안 여종들과 내통하여 화살을 몰래 빼 돌렸으므로 남은 화살이 없었다. 이 때 방씨부인은 기지를 발휘하였다. 베 짜는 데 쓰는 대나무 다발을 화살인양 다락에 힘껐 던지었다. 그리고 “아버님 화살 여기 있습니다”라고 소리쳤다. 이 소리를 듣자마자 도둑들은 놀라서 도망쳤다. 명사수 보성공이 화살이 두둑하니 그들 목숨이 온전하지 못하리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8월10일에 이순신은 몸이 불편하여 김안도의 집에서 계속 머물렀다. 동지 배홍립도 같이 있었다. 배흥립은 고부 출신인데 흥양현감으로 한산대첩에 참여하는 등 이순신을 보필한 충실한 부하이었다. 

 
배흥립 표석 

8월11일 아침에 이순신은 거처를 양산원의 집으로 옮기었다. 이윽고 송희립과 최대성이 찾아왔다. 송희립은 고흥 출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송대립, 아우 송정립과 함께 이순신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1592년 5월4일에 이순신이 첫 전투인 옥포해전에 나설 때 장수들 간에 전라좌수군의 관할권 논의가 있었는데, 이 때 경상도 바다로 출전을 강력히 주장한 사람이 송희립이었다. 송희립은 1597년 9월16일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승선하여 왜적을 물리쳤고,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절명하자 이순신 대신 북을 치며 수군을 지휘하여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순천 충무사에는 이순신과 정운 그리고 송희립의 신위가 모시어져 있다.

최대성은 보성 출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을 따라 옥포·합포·웅포 해전 등 여러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최대성은 아들 언립·후립과 가노(家奴)까지 총동원하고 의병 수천 명을 모아 모의장군이란 기치를 달고 의병장으로 나섰다.

그는 순천·광양·고흥·보성 등 20여 곳에서 송대립·전방삭·김덕방·황원복 등과 함께 여러 전투에서 이겨 백성들을 구출하였다. 안타깝게도 그는 1598년 6월 전라도 보성의 안치전투에서 전사하였다. 

8월12일 아침에 이순신은 장계의 초안을 작성하면서 보성에 머물렀다. 늦게 거제현령 안위, 발포만호 소계남이 와서 이순신의 명령을 들었다. 이순신은 그들에게서 배설이 겁을 먹고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모양을 전해 들었다. 이순신은 괘씸하기 짝이 없다고 탄식한다. 이런 자들이 권세 있는 자들에게 아첨이나 해서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자리에까지 승진하여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치고 있건만 조정은 이를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13일에 거제현령와 발포만호가 인사하고 돌아갔다. 우후 이몽구가 전령을 받고 왔는데 여수 본영의 군기들을 하나도 싣고 오지 않았다. 이순신은 크게 화가 나서 곤장 80대 때려 보냈다. 다른 군인들은 그렇다 치고 이순신과 생사고락을 같이 한 장수도 이렇게 혼이 나갔으니 참으로 한심하다. 

이윽고 하동현감 신진이 와서 이순신에게 전황을 보고하였다. 초 3일 이순신이 떠난 뒤에 조선군은 진주의 정개산성과 벽견산성을 모두 포기하고 빠져 나갔고 스스로 불을 지르기까지 하였단다. 이순신은 매우 통탄스러웠다. 

한편 8월12일에 선조는 후궁과 왕자를 먼저 해주로 피난시키라는 명을 하달한다. 이에 대하여 사헌부와 승정원, 홍문관이 일제히 피난 명령을 중단하라고 간언하였다. 민심이 요동치고 있는데 왕실이 먼저 피난하면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8월15일에 선조는 별 수 없이 후궁과 왕자의 피난계획을 중단시킨다. 참, 무책임한 임금이다. 

8월14일 아침에 이순신은 여러 내용을 담은 장계 일곱 통을 봉하여 윤선각을 시켜 보냈다. 이 날 저녁에 이순신은 어사 임몽정을 만나려고 보성군에 당도하였다. 밤에 비가 크게 왔다. 이순신은 숙소를 옮겨 열선루(列仙樓)에서 잤다. 

열선루는 보성 관아 바로 뒤에 있는 누각이다. 보성군청 바로 뒤에 보성초등학교가 있다. 보성초등학교로 들어가서 뒷길로 올라가면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 보성교회가 있다. 이 교회가 바로 열선루가 있었던 자리이다. 

보성군청은 보성관아 자리이고, 보성초등학교는 보성군수 관사와 객관이 있던 자리였다. 원래 열선루의 이름은 취음정(翠陰亭)이었는데 1486년(성종 17년)에 군수 신경이 중건을 하고 열선루로 이름을 고치었다. 

1544년에 사량진 왜변이 일어나자, 판옥선을 만들 것을 상소한 청백리 송흠(1459-1547)도 1504년부터 1506년까지 3년간 보성군수를 하였다. 그의 문집 '지지당 유고'에는 송흠이 열선루에서 지은 시가 남아있다. 

산양의 열선루에서 차운함 
 
왜적은 은덕을 아예 저버리고 웅천을 침노하고 있고 
대장은 군사를 뱀나루 가에 주둔시켰네. 
노심초사하여 몸소 생각하여 보니 
임금의 은혜를 갚고자 하는 마음뿐일세. 

이 시를 읽으면 송흠이 얼마나 왜구의 침범에 노심초사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순신도 마찬가지였다. 민족 명절인 추석 대보름이 바로 내일인데 나라가 이렇게 큰 위험에 처하였으니 어찌 잠이 올 것인가.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한국폴리텍대학 강릉캠퍼스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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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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