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onam.co.kr/read.php3?aid=1361286000408372141

선조 임금, 칠천량 해전 패전 따른 대책을 논의하다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3부 - 정유재란과 호남 사람들 14 
패전 원인을 하늘의 탓으로 돌리는 선조
입력시간 : 2013. 02.20. 00:00



칠천도
 
남은 배 수습해 방어망 구축할 것을 지시
코를 베어가는 왜군의 잔학상 극에 달해

선조 임금이 칠천량 해전의 패전 소식을 들은 것은 전투가 일어난 지 6일째 되는 7월22일이었다. 추원포에서 도망친 선전관 김식은 밤낮으로 달려 선조에게 패전 보고를 한다. 

“적세가 하늘을 찌를듯하여 우리나라 전선은 모두 침몰되었고 여러 장수와 군졸들도 모두 죽었습니다. …많은 배들은 불타서 불꽃이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선조는 즉시 대책회의를 연다. 이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영의정 유성룡, 행 판중추부사 윤두수, 우의정 김응남, 행 지중추부사 정탁, 행 형조 판서 김명원, 병조 판서 이항복, 병조참판 유영경, 행 상호군 노직, 좌승지 정광적 등 이었다. 그러면 어전회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자. 

선조는 선전관 김식의 보고서를 대신들에게 내 보이면서 말한다. 

“수군이 모두 대패하였으니 이제는 어찌 할 도리가 없다. 충청과 전라 두 도에 남은 배가 있는가? 지금으로서는 남은 배를 수습하여 방어할 계책을 세우는 길뿐이다.”

대신들은 선조가 수습책을 내놓으라는 지시에도 불구하고 말 한마디 없이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자 선조는 목소리를 높여 대신들을 질책한다.

“경들은 어찌하여 대답들을 하지 않는가? 이대로 방치한 채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을 셈인가? 대답을 않는다고 왜적이 물러나고 군사가 무사하게 될 것인가.”

그때서야 영의정 유성룡이 아뢴다. 

“답변을 드리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고, 너무도 민망하고 죄송한 나머지 아무런 대책도 떠오르지 않아 미처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첩문

선조는 다소 누그러졌다. 

“수군이 전몰한 것은 천운이니 어찌하겠는가. 통제사 원균이 죽었더라도 어찌 사람이 없겠는가. 각 도의 배를 수습하여 속히 방비해야 할 뿐이다.” 

선조는 칠천량 전투의 패전을 천운으로 돌린다. 패전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있어야 대책이 세워지는 것인데, 패전을 하늘의 탓으로 돌리니 정말 어설프다. 이러하니 대책이 제대로 마련될 수 있을까? 

한편 선조가 원균의 책임론을 거론하지 않자, 이순신 교체론을 주장했던 윤두수 등은 한 시름 놓는다. 

이어서 선조는 한 마디 더 한다.

“척후병도 설치하지 않았단 말인가? 왜 후퇴하여 한산도라도 지키지 못했는가?” 

선조의 눈에도 조선수군이 경계에 소홀한 것이 확연히 드러났다.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면 후퇴를 하여 한산도라도 지켰어야 했는데 참으로 안타깝다.


 
유성룡이 다시 아뢴다. 

“한산도와 매우 가까운 칠천도에 도달했을 때가 밤 10시 경이었는데 왜적은 어둠을 이용하여 잠입하였다가 불의에 포를 쏘아 우리 배 4척을 불태우니 너무도 다급한지라 추격하여 포획하지도 못하였고, 다음날 날이 밝았을 때에는 이미 왜선이 사면으로 포위하여 아군은 부득이 고성으로 향하였습니다. 육지에 내려 보니 왜적이 먼저 도착하여 이미 진을 치고 있었으므로 우리 군사는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다시 선조가 말한다. 

“한산도를 고수하였어야 했는데 기어코 출병을 독촉하여 이와 같은 패배를 초래하게 하였으니 이는 사람이 한 일이 아니고 실로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말해도 소용없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방치한 채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은 배만이라도 수습하여 전라와 충청도를 지켜야 한다.”

그러면 조선 수군 배는 몇 척이나 전몰하였을까? 참전한 수군 배는 어림잡아 170여 척 정도이었다. 이는 삼도수군 전체 전함 190여척 중에 6월 말과 7월초에 있었던 두 번의 해전으로 행방불명된 20여척을 제외한 숫자이다. 이 중에서 경상우수사 배설 휘하의 12척은 한산도로 도망을 갔으니 158척이 피해를 입은 것이다. 

그 당시 칠천량 전투에는 거북선도 5-7척 있었다 한다. 이 거북선도 모두 침몰되었다. 2008년 6월부터 경상남도는 침몰된 거북선을 찾기 위하여 수년간 탐사를 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거북선을 찾았다는 소식이 보도되지 않고 있다. 

이윽고 병조판서 이항복이 아뢴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통제사와 수사를 차출하여 계책을 세워 방어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선조는 “그 말이 옳다”고 하면서 다시 묻는다.

“왜적의 수가 매우 많았으니 당초에 풍파에 쓸려 죽었다는 설은 헛소리였다. 그들을 감당하지 못하더라도 한산으로 후퇴했더라면 형세가 좋고 막아 지키기에도 편리하였을 것인데 이런 요새를 버렸으니 매우 잘못된 계책이다. 원균이 일찍이 절영도 앞바다에는 나가기 어렵다고 하더니 과연 이 지경에 이르렀다. 도대체 왜적의 배가 전보다 대단히 크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선조의 물음에 우의정 김응남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일본은 풍신수길의 특명으로 조선을 다시 침략하고자 전선을 건조하였다. 조선의 판옥선에 대항하기 위하여 배를 크게 만들었는데 그 배가 바로 아타케부네(안택선)이다. 길이 70척, 너비 40척의 큰 배는 대포도 쏠 수 있었다. 

이어서 선조는 탄식한다.

“풍신수길이 항상 말하기를 ‘먼저 수군을 격파한 다음에야 육군을 노획할 수 있다’고 했다 하더니 과연 그렇게 되었다.”

지금까지 조선 수군은 왜군에게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조선 수군은 명나라도 인정하는 막강 군대였다. 그런 조선 수군이 일본의 기습 전략에 허둥대다가 모두 죽고 말았다. 너무 자만한 탓이었을까. 선조 말대로 천명이었을까.

하기야 천하무적이라는 스페인 함대도 1588년에 해적 출신 드레이크가 이끄는 영국 함대의 기습 작전에 패하였다. 이로 인하여 영국은 유럽의 해양강국이 되었다. 

선조는 조선 수군의 전몰이 믿기지 않은 듯 병조판서 이항복에게 다시 묻는다.

“전군이 모두 패몰되었는가, 혹 도망하여 살아남은 자도 있는가?”

이항복은 대답한다. 

“넓은 바다라면 패전하였더라도 혹 도망하여 나올 수 있지만 지금 이 상황은 그렇지 않아 비좁은 지역에 정박하였다가 갑자기 적선을 만나 궁지에 몰려 하륙하였으니 대체로 전군이 패몰되었을 것입니다.”

선조는 해도(海圖)를 살펴보며 이항복에게 가리켜 보이면서 말하길, “후퇴해 나올 때, 견내량에 이르기 전에 고성에서 적병을 만나 이와 같이 패배를 당했단 말인가? 저쪽을 경유하였다면 한산으로 쉽게 퇴진하였을 것인데 이곳을 경유하여 패배를 당하였는가?” 

이항복은 “그렇습니다” 하였다. 

다시 유성룡이 아뢴다.

“한산을 잃는다면 남해는 요충지인데 지금 이곳도 필시 왜적에게 점거 되었을 것입니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견내량을 통과하여 한산도로 향하였다. 배설은 한산도에서 섬 주민을 육지로 피신시키고 군량과 무기창고 등을 모두 불태운 뒤에 남해 쪽으로 도망하였다. 한산도를 손아귀에 넣은 왜군은 운주당을 불태우고 미처 도피하지 못한 남녀노소 백성들을 모두 살육하였다. 

왜군의 잔악상은 극에 달하였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을 읽어 보자. 

당초에 풍신수길이 금오를 보낼 때에 명령하기를, “해마다 군사를 보내어 그 나라 사람을 다 죽여 빈 땅을 만든 연후에 일본 서도의 사람을 이주시킬 것이니, 10년을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사람은 귀는 둘이고 코는 하나뿐이니 사람 한 명 죽인 것을 표시하는 의미로 코 하나를 베어 바치고, 코를 한 되씩 채운 뒤에야 생포하기를 허락한다. 운운”하였으므로, 왜군은 이번에 조선에 나와서는 사람만 보면 번번이 코를 베었다. 그 뒤 수십 년간 조선에서는 코 없는 사람을 매우 많이 볼 수 있었다.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