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labhvi , http://blog.daum.net/kkt1594/16144041

[잃어버린 왕국을 찾아서 3] 압독국
경산 문화 잉태한 고대왕국, 임당유적 통해 세상에 첫인사
세련미 뛰어난 토기 유물 속속 '압독문화제' 열어 새로 조명을
공동기획:영남일보·영천시·경북고도읍연구회
김진욱기자  2007-04-05 07:56:20 


항공촬영한 경산시 조영동 고분 일원. 영남대 맞은편에 있는 조영동 고분은 임당·부적동고분과 함께 '임당유적'으로 불리며, 압독국의 대표적인 유적지다. 

◇ 압독국이란
 
압독국은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경산시 압량면 일원을 중심으로 한 경산시 일원과 대구시 시지지역을 근거지로 400여년간 존속했다. 
 
신라에 복속됐던 많은 경북지역의 소왕국들처럼 압독국도 언제 세워졌는지는 어떤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다. 삼국사기,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역사서의 압독국 관련 내용으로 볼 때 서기 102년 신라 파시왕때 신라에 복속됐다. 

압독국은 신라의 침공을 받고 복속된 것이 아니라 신라가 강력한 국가로 부상하자 알아서 항복했다고 한다. 그후 압독국은 느슨한 복속형태로 유지돼오다 신라가 명실상부한 고대왕국의 틀을 갖춘 내물왕(서기 261~284년 재임)때 신라의 영토가 됐다. 
이후 압독국은 신라의 압량주로 남았으며, 신라가 삼국통일을 위해 백제와 고구려와 전쟁을 치를 때 경주방어와 전투병 훈련기지 역할을 했다.

경산의 영남대 정문 맞은편 원룸촌의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면 왕릉처럼 보이는 무덤이 몇개 있다. 기자가 자동차 한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골목길을 지나서 도착한 이 무덤은 압독국(押督國·압량국이라고도 한다)의 왕과 귀족의 무덤이다. 경산시 임당동에 있다고 해서 임당고분이라고 한다.
 
임당고분의 입구에 사적 300호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지만, 사적지라고 하기엔 너무 허술했다. 이곳엔 20평 남짓한 전시장도 있었다. 출입문은 잠겨 있었다. 창문을 통해 전시장 안을 보니 발굴당시 왕릉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었다. 먼지가 많이 끼여 내부가 잘 보이진 않았다.
 
임당고분 유적 발굴에 참여했던 김용성 신라문화유산 조사단 조사연구실장은 "임당고분 전시관은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불쾌감을 주고 있다. 새로운 전시관 건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압독국 영역도

압독국의 찬란한 문화 

기록 속에 있던 압독국의 실체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2년 임당고분을 발굴하면서다. 임당고분을 도굴해 무덤 속의 유물을 해외로 밀반출하려던 도굴범이 경찰에 붙잡히면서 도굴현장에 대한 발굴이 이뤄진 것이다. 
당시 영남대박물관 등 관련단체들이 임당동뿐 아니라 인근지역의 무덤들을 발굴하고 생활유적 등을 조사하면서 압독국의 실체가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이것이 경산시 임당·조영·부적동에 걸쳐 분포하는 고분군으로 '임당유적'이라고 한다. 


김종국 경산시립박물관장이 임당고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980년대 임당고분 발굴당시 현장 모습.
 


임당동 고분군 


임당유적에 대한 당시 발굴 결과, 유물이 1만3천여점이나 발굴됐다. 이 중 주목받은 것은 토기였다. 발굴된 토기는 압독국의 토기생산기술이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관련, 김종국 경산시립박물관장은 "세련미와 정교함이 뛰어난 압독국 토기는 당시 사람들에게 중요한 상품적 가치를 지녔던 것으로 추정되며, 멀리 성주군 선남면 명포리 고분군에서도 출토되었을 정도로 유통망이 넓었다"고 했다.

임당동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철검 등의 무기류와 왕관도 있다. 압독국이 세련된 주조기술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고분에서는 순장의 흔적도 남아 있다. 왕의 권위가 절대적이었다는 증거다. 

김종국 관장은 "많게는 5명까지 순장한 흔적이 있다. 유약을 바른 토기도 출토되는 등 여러 정황을 봤을 때 압독국은 신라에 복속된 경북지역의 많은 소왕국 중 최고 수준의 문화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군사훈련지-압량유적(사적 제218호)
 
임당동 고분에서 자동차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압량면 압량리 179번지엔 신라 때 김유신 장군이 연무 훈련장으로 사용했다는 터가 있다. 대로변에서 골목으로 접어들어 폐업한 공장들을 여러개 지나면 김유신 장군 연무 훈련장에 도착할 수 있다. 경주가 아닌 경산에 김유신 장군의 흔적이 있다는 것에 놀랐지만, 이곳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없다는 게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김유신 장군 연무훈련장은 인위적으로 흙을 쌓아 주변 지역보다 높게 했다. 병사들이 훈련했던 곳이라고 했다. 앞쪽은 더 높게 쌓았는데, 장군이 군사훈련을 지휘했던 곳이라고 사학자들은 추정했다. 흙을 쌓지 않은 주변지역까지 포함하면 연무훈련장이 4천여평에 이른다.
 
김유신 장군 연무 훈련장이 압량리 유적(사적 218-1호)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진량읍 내리 389번지엔 내리유적(사적 218-2호), 진량읍 선화리 948번지엔 선화리 유적(사적 218-3호)이 있다. 이 세 곳을 합쳐 '압량유적(사적 218호)'이라 한다. 압량유적은 서로 1.2~3.2㎞ 떨어져 삼각형의 배치상을 보이고 있고, 이들 유적지 모두 인위적으로 흙을 쌓아올려 병사들이 무술을 익힌 훈련장이다. 김유신 장군이 이곳에서 군사들을 훈련시켰지만, 이 훈련장을 만든 사람은 압독국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게 향토사학자들의 해석이다. 
 
임당고분과 함께 압량유적은 압독국의 존재를 확인해 주는 대표적인 유적지다. 신라에 복속됐던 다른 소왕국들의 유적지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관리가 되고 있지만, 여전히 압독국 유물에 대한 관리나 압독문화에 대한 복원작업은 미진하다.
 
이와 관련, 김용성 실장은 "여러 곳에 흩어져 보관되고 있는 4만여점의 압독유물을 한 곳에 모아야 하며, 압독문화유적공원도 조성해 시민과 학생들의 교육장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종국 관장은 "압독문화는 경산지역 문화 중 가장 찬란했던 문화로 보여진다. 신라문화제처럼 압독문화제를 열어 압독국의 존재를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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