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05555
성자산산성 따라 걸어보았습니다 (2)
연변 내 고향 여행 (10)
06.01.18 17:21 l 최종 업데이트 06.01.18 17:25 l 리광인(guangren33)
▲ 잘 남아 있는 구간의 성벽 ⓒ 상공 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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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서북쪽 정상에 올랐다. 무너져내린 옛 산성흔적이 그대로 드러났다. 산성안쪽에는 인공홈이 쭈욱 뻗어 있었고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올랐다. 새로운 세상을 본 것 같았으니 산신님은 옛 사람들의 위대한 창조라면서 찬탄을 금치 못했다. 눈이 오솔길로 다져진 것으로 보아 다녀간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였다.
일행은 남쪽으로 뻗은 산성을 따라 걸음을 옮겨놓았다. 성벽둘레의 총길이는 4454미터라고 하는데 정말이지 산등성이 아니라 옛 산성우를 따라 걷는셈이였다. 고구려 때 서기 420년 쯤이라 해도 15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산성이니 숭엄한 기분속에 빠져듬을 어찌할 수 없었다. 자연과 역사와 함께 하는 시각이 좋았다.
산성 한구간을 조이니 저앞에 나지막한 등성이와 함께 오른쪽에 홈이 나타났다. 옛 석성이 그대로 실재하는 구간이었다. 잠간 후에 일행 전체가 석성구간에 들어섰다. 모두가 놀라마지않았다. 처음에는 한미터쯤 되는 돌성벽이더니 그 앞에는 높이까지 3미터도 넘는 돌성벽이 발목을 잡았다. 진실로 자연과 역사유적이 어우러진 구간이었다.
일행의 흥분은 절정에 달하였다. 그 시각에 성벽을 자세히 관찰하노라니 깍은듯이 다듬은 돌구간은 한층한층 물려가며 쌓아 천여 년의 비바람 속에서도 그모양 그대로였다. 웃부분은 흙담이었는데 산성의 성벽을 돌로 쌓은 다음 돌담우에 흙을 무져 만들었다더니 그른 데 없었다. 성벽은 일반적으로 밑면의 너비가 5~7미터이고 높이가 1~3미터라고 했는데 실감이 났다. 상공님과 옥저님은 각기 디지털사진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완정한 성벽구간너머는 동남방 가파른 내리막 길이었다. 산과 산사이 홈채기였는데 옛 산성에는 동, 서, 남, 북에 성문이 하나씩 축조되어 있고 그중 서쪽, 동쪽, 북쪽 성문에 옹성(瓮城)이 설치되었다더니만 서쪽 옹성구간이 아닌가 싶었다. 이날 북쪽구간과 동북쪽 약간 구간을 제외한 산성 전체를 돌아보았지만 옹성이 설치되리 만치 알맞은 서쪽성문구간은 두 번 다시 찾아볼 수 없었다. 성벽 따라 안쪽에 홈이 뻗어 있고 구간구간 웅덩이가 패워있는 것이 인상적이였다.
“서쪽성문”구간 앞산에도 산성따라 오솔길이 뻗어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은 흔적을 나타내는데 크고 작은 산봉우리 두세 개를 지나며 동쪽으로 나아가니 자연과 하나되는 길이 끊기었다. 이곳 구간에서 방향을 안쪽으로 잘못 잡아서인지 한 동안은 엣 성터도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동쪽구간에 들어서서야 옛 성터가 다시 보이었는데 옛 성터 안에는 웅장한 높은 산이 따로 솟아 있었다. 해발 390미터의 주봉이 이 높은산이 아닌가 싶었다. 옛 궁정터자리에서는 느낄 수 없는 산안의 산은, 대자연은 어느것 하나 같은 것이 없다는 도리를 깨우쳐 주었다.
▲ 연분홍꽃으로 화려하게 피어나다가 강추위에 시들어 얼어붙은 진달래꽃나무 ⓒ 상공 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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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구간의 옛 산성구간은 인적이 끊긴 지대였다. 오솔길도 생기지 않아 초행길을 헤치는 우리는 가끔 나무숲 속을 헤쳐가야 했는데 나아가는 길 전체에 가랑잎이 무드기 깔려 가랑잎 밟는 소리가 그리도 정다울 수가 없었다. 소시적 고향의 산에서 뛰놀며 가랑잎과 씨름하는 기분이었다. 옥저님도 소시적 철부지시절을 떠올렸는지 가랑잎이 쌓인 산성의 한 홈구간에서 벌렁 드러눕더니 얼굴부분을 제외한 몸 전체가 가랑잎속에 묻히였다. “천진란만한” 그 모습을 사진 찍느라고 상공님이 셔터를 둘러대고 뒤따르던 일행이 몰려들어 손벽치며 폭소를 터뜨린다. 산이 알고 우리 일행이 아는 즐거운 시각이었다.
우리 일행을 더욱 희한케 하는 것은 동쪽의 산성구간에서 때 아니게 피여난 무더기 진달래꽃이였다. 일전에 원 연변텔레비라지오방송국 부주필 김대현선생이 연변일보에 실은 한편의 기사에서 양력설 밑에 성자산에 올랐다가 양지바른 곳에서 소담히 피어난 진달래꽃을 보았다더니만 과연 그러했다. 다른 점은 요즈음 강추위에 얼어서 옹송 그린 애절한 진달래꽃 모습이라 할가. 일행은 한겨울에 피여난 진달래꽃은 처음 본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게다가 해란강과 부르하통하의 합수목이 발아래에 펼쳐지고 평지성이 저 강너머여서 더 흥이 났다. 이러구려 일행이 나아가는 옛 산성길은 즐거움과 호기심과 환희로 넘친 답사의 시각시각이었다.
필자와 함께 시종 앞에서 새 길을 헤쳐가는 이는 연우산악회의 봇나무님과 산신님. 옥저님과 더불어 누구보다도 성자산성답사에 빠져든 봇나무님과 산신님이 돋보이었다. 여성의 몸인 봇나무님은 남자들에 못지 않게 잘도 산을 탔다. 때로는 옛 산성 따라, 때로는 옛 산성안 홈을 따라 나아가는 봇나무님은 랑자군(郞子軍)을 거느리는 여장수를 방불케 하였다.
▲ 성자산 동문터가 내려다 보인다 ⓒ 상공 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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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산성은 다시 동북쪽으로 사리여든다. 이 구간은 때때로 가파른 내리막이 이어지고 단나무가 빽빽이 들어설 때가 많아 길을 바꾸어야 했다. 어느덧 우리 일행은 동쪽의 성문을 가까이에 둔 구간에 이르렀던 것이다. 산성을 따라 걸은 길만도 이미 6~7리는 잘되었으니 동쪽 동문가까이서 보는 타원형의 둥그런 산성이 또 다른 모습을 토해냈다.
성자산성 동쪽의 계곡을 따라 내리니 옹성이 설치되었다는 동쪽의 성문구간이다. 산과 산사이 두 비탈에는 뻗어내리고 뻗어오른 옛 성터자리가 완연했는데 계곡 따라 올라오는 오른쪽 옛성터 밑에 돌을 깍아세운 “성자산산성” 표시패가 조선어, 한어로 나뉘어 서있었다. 길림성문화유물보호단위인 성자산산성은 길림성인민정부에서 1961년 4월 13일에 공포하고 도문시인민정부에서 최근 10년 안팎에 세운 것으로 보이었다. 세멘트판으로 되어 글씨가 다 지워진 북쪽의 북문표시패에 비해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표시패 아래 계곡어구는 도문시 장안진 마반촌 7대로 불리우는 산성리마을이다. 길가에서 한 노인을 만나 잠간 이야기를 나누니 워낙 30여 세대를 이루던 조선족마을이 지금은 15세대 쯤 밖에 안되여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도시화의 흐름은 이곳에서도 막을 수가 없는 시대적인 추세인가 본다.
일행은 산성리 부근에서 얼어 붙은 강을 지나 천년송 세 그루가 서고 있는 하룡촌에서 따뜻한 점심상에 마주 않았다. 때는 이미 점심 12시반이라 오늘 답사산행은 장장 세시간이 훨씬 넘었는데 안내자가 없은데서 성자산의 평지성인 하룡고성을 지척에 두고서도 답사할 수가 없었다. 어찌하든 기쁘기만 한 즐거운 하루라는 일행이다. 대자연속에서 연우산악회와 함께 하는 성자산산성 주말산행이 그리도 좋더란다.
서로 나누며 자연과 함께 하는 산행이 그래서 좋다고 하는걸가, 우린 성자산산성 따라 쭈욱 걸어보았습니다.
덧붙이는 글 | 리광인(리함) 기자는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학술교류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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