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977078.html


[단독] 일제, 독도 침탈 ‘러일전쟁’ 이전부터 준비했다

등록 :2021-01-04 04:59 수정 :2021-01-04 16:38


이상훈 육사 교수, 일 방위성 자료서

1903년 육해군 독도 측량사실 확인

그동안 학계는 1904년 시마네현 어부

편입 청원서 제출을 침탈 기점 간주

“일 군부 침탈 준비 구체적 입증 사료”


이상훈 교수가 일본 방위성 아시아역사자료센터에서 확인한 1903년 일본 해군의 동해안 훈련 작전 상황 그림인 ‘색적운동요령부도’의 일부분. 함대의 항로를 표시한 선들이 향하는 지점에 울릉도, 리안코루도(독도), 오키도 등의 섬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 이상훈 교수 제공


러일전쟁 이전인 1903년, 독도 침탈 과정에서 일본 육해군이 섬을 측량하며 불법 편입을 위한 준비 작업을 추진한 사실이 처음 드러났다.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는 최근 “일본 방위성 아시아역사자료센터의 사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일본 군부가 러일전쟁 이전에 이미 독도 측량을 진행한 사실을 보여주는 문건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가 <한겨레>에 공개한 사료는 세 종류다. 첫번째는 1903년 9월21일 일본 군함 사이엔호 함장 다지마 고레타카가 부산에 입항해 해군성에 보고한 ‘1903년 10월 행동예정표’다. 전문을 보면 “본 함은 10월3일 출발, 행동예정표에 따라 순항할 것이므로 예정표를 송부해 올린다”는 내용이 나온다. 예정표는 10월3일 부산에서 출발해 4일 울릉도를 측량하고 5일 ‘리안코루도’(リアンコルド)란 일본식 해도명으로 표기된 독도를 측량한 뒤, 군함의 고속력을 시험하는 계획을 명기했다. 실제로 배는 울릉도와 독도를 시찰하고 부산으로 복귀했다. 그해 10월9일 사이엔 함장 다지마가 부산에서 ‘울릉도 시찰보고’를 작성해 함대 사령장관에게 보고한 내용에 이런 사실이 기재됐다. 상세한 시찰 내용은 확인되지 않지만, 지세와 묘지(錨地), 민정(民情)과 인구, 물산, 기후, 교통, 노함(露艦:러시아 함정) 순시, 군수 면담 등으로 구성돼 울릉도·독도의 지형과 러시아 군함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교수는 “이 보고문을 통해 사이엔호가 러일전쟁 발발 전인 1903년 10월, 울릉도와 독도를 군사적 목적으로 측량했음이 확인된다”며 “행동예정표에 나타나듯 1903년 당시 일 군부는 독도가 울릉도 부속섬임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일본 육군이 1903년 작성해 데라우치 육군 대신에게 올린 ‘부산 주차대 보고’. 붉은 선 안에 육군 장교를 해군 함정에 파견해 울릉도, 독도 등의 실측에 참여하게 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상훈 교수 제공


또 다른 근거는 1903년 10월1일 부산주차대장 시모조 에이시로가 훗날 초대 조선 총독이 되는 육군 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올린 보고문이다. 문서의 5가지 사항 중 세번째 내용이 주목된다. 보고문에는 “육군 보병소위 야마다 이사부로를 10월3일부터 1주일 예정으로 군함 사이엔에 편승시켜 울릉도 정찰에 파견할 예정”이라고 적혀 있다. 이상훈 교수는 이 부분이 1903년 사이엔호의 울릉도·독도 시찰에 육군이 개입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라고 지적했다. 일 군부가 1903년 육해군의 조직적인 협조로 한국의 해안과 육로를 광범위하게 정찰했으며, 이 과정에서 얻은 군사 정보를 바탕으로 전쟁 준비에 나섰음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세번째 근거 사료는 1903년 6월16일 일본 육군 포병대위 에구치 야스키요가 ‘해군대연습’을 참관한 뒤 12사단장 이노우에 히카루와 당시 육군 대신에게 잇따라 보고한 내용이다. 이 보고문 속에는 ‘색적운동요령부도’(索敵運動要領附圖)란 해상 작전도가 붙어 있는데, 울릉도와 독도가 선명하게 표시돼 있다. 보고서의 ‘색적운동’이란 울릉도-독도-오키섬을 잇는 연선 이남에서 러시아 함대가 북쪽 러시아 연해주 항구로 가기 전 이를 찾아내는 작전을 뜻하는 일본식 군사용어다. 일본 연합함대는 전쟁에 대비해, 1903년 3~4월 대한해협과 동해에서 해상연습을 벌였는데, 러시아 함대 수색 훈련도 함께 실시했다. 에구치의 보고문을 보면, 1903년 동해 수색 훈련은 죽변(울진)에서 울릉도까지를 1구역, 울릉도에서 독도까지를 2구역, 독도에서 오키까지 3구역, 오키에서 일본 본토 마쓰에까지를 4구역으로 나누어 ‘포위선’을 형성하고 있다. 이 교수는 “훈련에서 지표가 되는 것은 울릉도-독도-오키섬을 잇는 연선”이라며 “독도를 측량하고 지도상 좌표를 설정해야 나올 수 있는 구상”이라고 설명했다.



동도와 서도로 나뉜 독도의 전경. 경북도 제공


학계에서는 일제의 독도 불법 편입 공작과 관련해 지금까지 1904년 9월29일 일본 시마네현 어부 나카이 요자부로가 강치수렵을 위한 편입 청원서를 제출한 것을 기점으로 간주해왔다. 독도 측량이나 군사 통신시설 설치도 1904년 전쟁 발발 이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번 사료 발견으로 일본 군부는 1904년 민간인 청원 전부터 독도의 위치와 중요성을 인지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독도 침탈사를 연구해온 한철호 동국대 교수는 “군함 사이엔이 독도를 러일전쟁 전 측량했다는 것은 새롭게 알려진 사실”이라며 “일제 군부가 러일전쟁 전부터 독도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하며 불법 편입을 준비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입증하는 사료”라고 평가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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