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54416.html

통일신라 ‘14면체 주사위’의 비밀은?
등록 : 2014.09.07 14:06 


복원된 경주 월지의 주변 건물들

유신시대의 한복판이던 1974년 가을, 신라 고도 경주는 들뜬 분위기에 휩싸였다. 70년대초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발굴했던 천마총과 황남대총 같은 시내의 신라 고분에서 금관 등 찬란한 황금보물과 고급 유물들이 잇따라 출토되는 낭보가 이어지고 있었다. 불국사, 보문단지, 불국사 등 경주 관광명소를 단장해 개발하는 관광종합개발계획도 착착 실현되는 중이었다. 이런 와중에 신라인들이 1400여년전 경주 도심 언저리에 팠던 옛 연못 바닥을 퍼내는 공사가 그해 11월 벌어지기 시작했다. 신라 왕궁터인 반월성 바로 동쪽, 경주시 인교동에 있는 안압지의 준설공사였다. 안압지는 통일신라시대 왕자가 살았던 동궁전 근처에 귀족들의 놀이터로 조성된 것으로 전해져왔지만, 당시 관리가 거의 되지 않아, 수백년간 연못에 흙이 쏠려 내려가는 등 극도로 퇴락한 상태였다. (안압지는 조선시대 묵객들이 지은 이름이다. 90년대 이후 연못 주위에서 발견된 기와 파편에서 월지라는 신라 때의 원래 이름이 확인돼 지금은 월지라고 부른다.) 준설은 박 대통령이 세운 경주종합개발계획에 따른 유적 정비사업을 위해 벌인 것이었다.

옛 경주 연못 펄바닥에서 나온 14면체 주사위 주령구 
신라귀족과 후대 한국인 사로잡은 옛 놀이문화의 정수 
보존처리 중 불타 원래 실물은 사라졌는데, 
같이 생긴 다른 주령구 실물 속속 나타나 논란 계속


복원된 경주 동궁과 월지 전경


70년대 월지 발굴 당시의 현장1. 월지 서쪽 기슭 석축이 노출된 모습이 보인다.


70년대 월지 발굴 당시의 모습2


70년대 월지 바닥 펄 속에서 막 발굴됐을 당시의 신라 주령구. 다 마시고 크게 웃기란 뜻의 `飮盡大笑(음진대소)‘란 글자가 새겨진 면이 보인다.

그런데, 이 퇴락한 연못에서 애초 생각치도 않았던 문화재대박이 터졌다. 연못 물 빼내고 펄 바닥을 뒤져보니 무려 1만5000점이 넘는 통일신라 시대의 갖가지 생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불상, 숟가락, 청동거울, 난간 조각, 벼루, 송곳, 가위, 심지어 유람용 배까지 별의별 유물들이 다 있었다. 그 속에 유난히 쓰임새가 독특한 유물 하나가 조사단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 당겼다. 1300여년전 통일신라 귀족들이 술자리 연회에서 굴리며 놀았던 14면체 주사위였다. 발굴이후 40여년이 흐른 지금 이 독특한 주사위는 통일신라만의 재치있고 독특한 놀이문화를 상징하는 국민문화재가 되었다.

통일신라 귀족들이 술자리 연회에서 갖고 놀았던 이 주사위는 문화재 용어로 ‘주령구(酒令具)’라고 부른다. 지금, 경주 반월성 옆 국립경주박물관 안압지관에 가면 볼 수 있다. 신라 상류층의 놀이문화를 보여주는 유물이란 설명이 붙어있다. 주령구란 말을 바로 풀이하면, 술과 관련된 명령을 내리는 도구라는 뜻이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또하나 궁금한 것은 박물관 진열창에 있는 유물이 복제품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원래 유물은 이제 없다는 얘기다. 이건 또 무슨 곡절이 있는 걸까.


경주 임해전 터에서 나온 국내 최고의 정육면체 주사위


경주 월지에서 발굴된 신라주령구 복원품 2


경주 월지에서 발굴된 신라주령구 복원품

우선 제원부터 살펴보자. 참나무로 만든 주령구는 직경이 5cm도 안된다. 정육면체 모양의 일반적인 주사위 꼴과는 전혀 다른 독창적인 14면체 디자인이다. 긴변 2.5cm, 짧은변 0.8cm의 육각면 8개, 가로·세로 각각 2.5cm의 정사각면 6개가 서로 정교하게 맞물려 있고, 각 면의 면적, 크기도 똑같다. 당시 신라의 발전했던 수학 지식과 정교한 세공기술을 짐작케 해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각 면에 다른 주사위처럼 숫자가 아니라 13면에 4자, 1면에 5자씩 음각으로 새긴 정갈한 해서체의 한자문구들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주사위를 굴려 위로 나타난 면에 새긴 문구의 내용대로 행해야 하는 술자리 벌칙들을 적은 것이다. 14면체 주사위는 1976년 중국 서안 진시황 무덤 부근에서 비슷한 유물이 나온 사례가 있지만, 각 면에 숫자 대신 놀이용 문구를 적은 것은 신라의 주령구가 유일하다. 후대 학자들마다 해석이 일부 엇갈리긴 하지만, 문구 내용들은 메시지가 다채롭고, 한결같이 익살스럽고 유쾌하고 창의적이다. 오늘날 한국인 술자리 문화와도 맥락이 닿아 있어 웃음이 절로 나온다.

먼저 술잔을 비우고 크게 웃는 ‘음진대소(飮盡大笑)’와 양잔즉방(兩盞則放), 술 석잔을 한꺼번에 마셔야하는 ‘삼잔일거(三盞一去)’가 있다. 요즘 직장인들이 즐겨하는 ‘원샷’에 해당한다. 노래와 춤도 빠지지 않는다. 노래 부르지 않고 춤을 춰야하는 ‘금성작무(禁聲作舞)’, 알아서 막춤을 추라는 뜻이다. 스스로 노래 부르고 마시라는 ‘자창자음 (自唱自飮)’은 신입사원 환영회 등에서 자기 소개를 할 때 한잔 하고 노래부르라고 채근하는 지금 풍경과 닮았다. 마음대로 노래 청하기인 ‘임의청가(任意請歌)’는 노래방에서 게임처럼 하는 ‘도전 100곡’류의 게임과 비슷하다. 코믹한 장난들도 있다. 여러 사람이 코를 때리는 ‘중인타비(衆人打鼻)’, 얼굴에 간질거려도 참아야하는 ‘농면공과 (弄面孔過)’, 더러운 것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추물막방 (醜物莫放)’, 스스로 도깨비를 부르는 기행까지 벌여야하는 ‘자창괴래만(自唱怪來晩)’이 있다. 덤벼드는 사람이 있어도 참고 가만히 있어야한다는 ‘유범공과(有犯空過)’는 도대체 그 벌칙의 실체가 무엇일지 야릇한 궁금증을 뭉실뭉실 피워올리기도 한다. 후대 연구자들은 신라 귀족들이 이런 문구를 적은 주령구를 월지 부근의 정자에 가지고 와서 주연을 베풀면서 굴리고 놀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도 남아있는 경주 포석정처럼 굽은 수로를 따라 술잔을 띄워놀았던 곡수연(曲水宴)을 신라귀족들이 즐겼다는 문헌기록이 전하므로 이 곡수연 때 시와 노래를 하면서 같이 갖고 놀았던 것이 아니었겠느냐는 추정도 나온다.


14면체 주사위 주령구를 평면에 펼친 전개도와 실측도. 78년 문화재관리국에서 펴낸 안압지발굴조사보고서에 실린 것이다.

이 주령구의 독특한 놀이방식은 언론 등을 통해 숱하게 알려지면서 국민적 관심을 모았다. 한 주류 회사에서는 3년전 주령구 놀이를 스마트앱에서 내려받는 기획을 내놓았고, 술자리에서 주령구 놀이를 응용해 즐기는 이들도 늘어났다. 경주시는 해마다 시민들이 참여해 주령구를 함께 만들고 함께 말판을 차려 놀이하는 행사를 열고 있고, 주령구 복제품도 선물용으로 시판중이다. 신라사를 전공한 역사학자인 최광식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장관 재직 시절 출입 기자들과의 회식 자리에 주령구를 확대한 모조품을 들고 나와 번갈아 굴리면서 벌주 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주령구는 유물 자체의 성격도 흥미진진하지만, 발굴 경위와 이후 보존과정 등에서도 드라마틱한 후일담을 갖고있다. 사실 정부가 안압지 준설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면, 그리고 앞서 71년 박정희 대통령이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을 입안하지 않았다면, 주령구는 지금도 흙속에 파묻혀있거나 영영 세상에 다시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애초 안압지 준설은 원래는 관광단지 개발을 위해 유적지 재정비가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연못 밑의 수백년 묵은 펄바닥을 퍼내고 주변을 깨끗이 정비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준설 과정에서 ‘수거’를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신라 유물들이 마구 쏟아지기 시작한다.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증언한다.

“74년 준설공사가 시작될 당시 경주사적관리사무소에서 감독을 했어요. 물 빼고 펄 바닥을 말린 뒤 인부를 동원해 리어카로 흙을 퍼 날랐는데, 자꾸 기와 전돌 등의 생활 유물들이 나온단 말이에요. 그래서 수습 연구원을 보내 유물들이 반출되지 않도록 관리를 맡겼는데, 엄청나게 많은 유물들이 계속 쏟아져서 감당을 못할 지경이 됐지요. 심지어 안압지 출토 유물들이 골동상에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당시 국립경주박물관 학예관이던 미술사학자 강우방 선생이 사적관리사무소쪽에 유물 관리가 부실하다고 항의하고 언론에도 의혹이 보도되는 등 파문이 일었어요. 놀란 당국이 준설공사를 중지하고, 75년부터 문화재관리국 학예사와 황남대총 발굴단의 인력을 일부 빼내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됐어요. 주령구를 비롯한 안압지 유물은 그런 곡절 끝에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겁니다.”

주령구는 안압지 발굴조사가 한창이던 1975년 6월19일 연못 서쪽 호안 석축 바닥에서 출토된다. 수십여점의 목간(나무쪽 문서) 조각들과 함께 나왔는데, 독특한 모양새와 면마다 재미있는 놀이규칙을 담은 글씨가 새겨져 있어서 발굴 직후부터 연구자들 사이에 화제로 떠올랐다. 목간에 적힌 연호, 간지를 판독한 결과 목간의 글씨를 적은 시기가 경덕왕 6년(747년)부터 혜공왕 9년(774년) 사이였다. 사서를 보면 월지를 처음 판 것이 문무왕 14년(674)이고 그 옆의 동궁전인 임해전이 처음 세워진 것이 문무왕 19년(679)이니, 이 주령구는 통일신라 전성기로 들어가는 7세기말부터 8세기 초중엽 사이 만들어진 것으로 대략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당시 발굴에 관여했던 원로 고고학자 조유전씨(72·현 경기문화재연구원장)가 <발굴이야기>(대원사)에 쓴 회고를 보면, 발굴 당시 표면이 검게 칠해져 있었으며 오랫동안 펄 속에 있었기 때문에 보존상태가 좋지않은 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진 촬영과 실측 등 유물조사를 마치고 곧바로 서울 청와대 아래 창성동에 있던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실(현 정부종합청사 별관 1층)로 옮겨 유물 보존 처리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다.  

주령구는 오랫동안 물 속 펄바닥에 있었기 때문에 물기를 빼내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아직 국내 보존과학이 걸음마 수준이던 시절이라 습기를 제거하는 특수장비가 없었다. 그래서 토스터기 같은 일반 전기 오븐에 넣어 유물의 수분을 천천히 말리는 초보적인 방법을 써야 했다. 문제는 당시의 전력 사정이 용이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공급되는 전력의 전압이 고르지 않고 수시로 오르락 내리락했던 것인데, 이런 맹점을 고려하지 않고 오븐에 유물을 넣었다가 작동 불량으로 밤사이 전원 과부하가 걸려 주령구가 새카맣게 타버렸다. 조유전씨는 <발굴이야기>에서 당시 비화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나무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한꺼번에 강력한 빛으로 건조시키게 되면 뒤틀리게 되므로 서서히 수분을 제거시켜 원형에 아무런 손상이 없도록 처리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래서 특수하게 제작한 전기 오븐에 넣고 건조하기로 했다. 물론 자동 전기 조절이 가능하도록 하여 온도가 높아지면 전원이 끊어졌다가 낮아지면 다시 연결되도록 하여 항상 적절한 온도를 유지하도록 해서 처리를 하고자 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자동 전기 조절기가 말을 듣지 않아 과열되어 주사위를 재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

주령구가 숯덩이가 되어버린 사건은 생각치도 못한 파장을 낳았다. 건물로 화재가 번지지는 않았지만, 사고가 난 다음날 출동한 종로경찰서 형사들은 청와대를 의식한 방화가 아니냐고 의심했다. 보존과학실이 있는 건물이 바로 청와대 아래에 있어 고의적으로 오븐을 과열시켜 불을 낸 것은 아닌가를 당직자, 담당자들을 불러 추궁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당사자들의 무고함이 드러나고, 불탄 주령구는 폐기처분됐다. 사전에 정밀하게 사전을 찍고 실측한 탓에 똑같은 복제품도 만들 수 있었다. 사건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고 잊혀지는 듯 싶었다. 그런데, 15년이 지난 1989년 6월 한 경북지역 일간신문에 주령구를 문화재당국이 홀랑 태워버렸다는 기사가 1면 머릿기사로 실리면서 주령구 의 비극은 처음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큰 파문이 일었고 국립문화재연구소는 15년전 허물에 빌미를 잡혀 문화재관리를 졸속으로 하고있다는 비난에 곤혹을 치렀다. ‘국보급 신라 문화재 소실’이란 제목을 단 이 기사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연구사로 일하다 신문사로 직장을 옮긴 기자가 쓴 것이었다. 주령구의 저주라고 해야할까. 조씨를 비롯한 연구소 사람들은 주령구를 불태운 후과에 가슴이 서늘했을 터다.

이 곡절 많은 주령구는 국내 문화재보존과학 시스템의 정착과 발전 과정에서 시행착오에 따른 희생양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원래의 실물이 없어 그 뒤에도 진본의 실체를 둘러싼 논란들을 계속 낳고있기도 하다. 불타 없어진 이 주령구와 거의 똑같은 다른 주령구 유물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는 탓이다. 2011년 국립민속박물관의 장장식 학예사는 온양민속박물관 소장품 가운데 경주에서 출토된 주령구와 똑같은 모양의 주령구를 발견했다고 학계에 보고해 시선을 모았다. 문제의 주령구는 77년 온양민속박물관이 서울의 한 고미술상을 통해 수집했다고 밝힌 것으로, 75년 안압지 발굴 당시 별개의 주령구가 몰래 유출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온양민속박물관 쪽은 탄소연대측정 등 유물의 분석에 나설 용의가 있다고 밝혔으나, 이후 조사는 진행되지 않아, 정확한 진상은 여전히 드러나지 않은 상황이다. 최근에는 인터넷 경매사이트인 코베이의 9월 경매전에 한 소장가가 40년전 구입해 보관해왔다는 또다른 주령구가 출품됐다. 입수한 뒤로 죽 갖고 있었는데,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주사위와 같은 형태임을 알고 용처를 알게됐다는 설명이 코베이 사이트에 적혀있다.

이 다른 주령구들의 실체가 어떤 것일지는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경주 출토 현장에서 유출된 또다른 주령구이거나, 주령구 놀이의 전통이 이후에도 이어져 계속 놀이도구로 만들어졌거나, 아니면 경주 주령구 출토 뒤 이득을 노려 만들어낸 복제품일 가능성이다. 안압지 조사는 처음부터 유적을 겨냥한 발굴이 아니라 흙을 퍼올리는 준설에서 비롯됐다. 발굴하면서 걷어낸 흙을 제대로 분석하지 않고, 그냥 다른 곳에 버렸기 때문에 버린 흙더미 안에서 주령구 같은 유물들이 훗날 발견돼 골동품 시장 등에 떠돌아다닐 가능성이 있다. 모조품이든, 다른 주령구 유물이든 앞으로도 또다른 주령구들이 또다른 원본 논란을 빚으며 계속 나타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형편이다. 문화재동네 한켠에서는 주령구 실체를 둘러싼 혼선을 막기 위해 논란이 된 주령구들을 모아 정밀한 연대 분석과 비교 조사를 통해 가닥을 잡아야할 필요가 있지 않느냐는 의견도 나온다.

신라 십사면체 주사위의 실체에 얽힌 오랜 논란들은 첫 단추를 잘못 꿴 유적 발굴이나 소홀한 문화재 관리는 두고 두고 구설과 오해를 부른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주령구의 진짜 실체는 앞으로 얼마나 제대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까.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제공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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