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0911101732415&code=900306&med=khan
샤머니즘의 메카 알혼 섬의 부르칸 산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39) 한민족의 본향 바이칼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입력 : 2009-11-10 17:32:41ㅣ수정 : 2009-11-10 17:32:41
‘시베리아 진주’ 속에 ‘고스란히 잉태된‘한국인의 DNA
이르쿠츠크 도착 서너 시간을 앞두고 벌써 끝없이 펼쳐진 창창한 바이칼 호수가 시야에 들어온다. 햇빛에 반사된 수면은 거울처럼 번뜩거린다. 열차는 내내 호숫가를 오른쪽에 끼고 자작나무 숲속을 숨바꼭질하듯 꼬리를 휘저으며 달린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실개천이 호수로 졸졸 흘러들어간다. 저 수많은 실개천이 모여 지구 전체를 2㎝ 두께로 덮고도 남음이 있을 세계 최대의 담수호 바이칼을 이루고 있다. ‘티끌 모아 태산’, 그 격언의 현장이다.
바이칼 전경
바이칼, 민족의 뿌리 찾기 일념에서 몇 번 찾아온 낯익은 고장이다. 최근에는 지난해 2월13일에 이어 1년 반 만에 다시 찾아왔다. 이번의 중점 답사지는 호수의 심장부에 자리한 알혼 섬이다.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다음날(2009년 7월8일), 시내 몇 군데를 대충 둘러보고 나서 정오 무렵 300㎞ 떨어진 알혼 섬으로 향했다. 200여㎞를 달리니 짙푸르던 초원은 반사막 고원지대로 바뀐다. 아롱다롱한 색 천을 동여맨 세르게(몽골의 오보, 우리네 서낭당)와 돌무덤인 구르칸이 자주 눈에 띈다. 행인들도 우윳빛 러시아인과는 다른 모습의 구릿빛 부리야트인들이다. 제대로 찾아가고 있다는 실감이 난다.
오후 6시35분, 알혼 섬으로 도항하기 위해 말로에 모어라는 선착장에 도착했다. 공교롭게도 배의 주유구가 고장이 나 무작정 기다리라고만 한다. 보기엔 간단한 고장인 것 같은데, 예닐곱 수리공이 부산을 피우며 수리하는 데 무려 세 시간이나 걸린다. 일행을 포함해 외국 관광객들은 초조해 물가에서 서성대지만, 현지인들은 관성(慣性) 탓인지 표정 한 점 없이 느긋하기만 하다. 백야에 저녁노을은 느릿느릿 호수 면을 물들인다. 흰 갈매기들이 먹이를 찾아 까옥거리며 호숫가를 맴돈다. 다행히 세 시간이란 사색의 여유를 안겨주었다.
‘시베리아의 진주’ ‘시베리아의 파란 눈’이라고 일컬어지는 ‘바이칼’은 부리야트어로 ‘큰(바이) 물(칼)’이란 뜻이다. 따로 ‘큰(풍요로운) 불’이란 뜻으로 화산과 관련시키며, 부리야트나 부여란 말이 이 ‘바이’에서 파생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정말로 ‘큰 물’답게 길이는 636㎞, 폭은 20~80㎞, 둘레는 무려 2000㎞나 되며 면적은 한반도의 3분의 1과 맞먹는다.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호수로서 제일 깊은 곳은 1630m나 되며, 세계 담수의 20%를 담고 있는 제일의 담수호로서 물의 양은 미국 5대호의 물을 합친 것보다 더 많다. 신기한 것은 336개의 하천이 흘러들어와 호수를 이루지만 빠져나가는 강은 오로지 앙가라 강 하나뿐이라는 사실이다. 어떻게 수량이 조절되는지는 아직껏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다.
바이칼에는 2500여종의 동식물이 서식하는데, 그 가운데 4분의 1가량은 이곳만의 특이종이다. 북극해에서 비밀수로를 통해 왔다는 민물 물개, 체질의 절반 이상이 지방이기 때문에 햇볕에 나오기만 하면 금방 버터처럼 녹아버린다는 골로미양카, 듣기만해도 이상야릇한 물고기들이다. 그러나 대표적인 어류를 꼽으라면 단연 훈제가 별미인 청어류의 오물이다. 매해 25만~30만t씩이나 잡는다고 한다. 바이칼은 40m 깊이에 있는 지름 40㎝의 쟁반을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으리만큼 세계에서 가장 맑고 깨끗한 호수이다. 알고 보니 보코플라프라라는 새우 모양의 작은 갑각류(甲殼類)의 싹쓸이 청소 때문이다. 이놈은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데, 2주일이면 사람의 뼈까지도 말끔히 없애버린다고 한다. 이러한 청정에다가 신비까지 곁들인 바이칼의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면 5년이, 발을 담그면 10년이 젊어진다고 해서 사람들은 다시 찾아오게 된다고 한다.
태고부터 숱한 신비를 간직해 온 바이칼은 단순한 자연의 큰 물구덩이 아니라, 천혜의 인종을 잉태한 태반이고, 다양한 문화를 융합시킨 허브이며, 숱한 민족의 수구지심(首丘之心)을 불러일으키는 본향이기도 하다. 태반과 허브, 본향, 이 3통(通)이 있기에 바이칼과 한민족은 여러 면에서 끈끈한 유대로 상관되어 왔다. 우선 지질학적 변천에서다. 빙하기 때 바이칼은 고립된 오아시스와 같은 열수(熱水) 광산이었다. 당시 구석기인들은 혹독한 추위 때문에 열수가 치솟는 온화한 바이칼 주변에 머물고 있다가 해빙기에 큰 홍수가 일어나자 남하해 한반도 일원에까지 정착하게 된 것이다. 바이칼은 지금도 지진활동을 하고 있는 내륙단층지대로 남아 있다. 빈번한 기후 변동과 그에 따른 해수면의 변화나 지형적 변천을 면밀히 추적해 보면 두 지역을 이어준 민족이동 통로를 밝혀낼 수가 있을 것이다.
샤머니즘의 메카 알혼 섬의 부르칸 산
다음으로 생태학적 관련성도 점차 밝혀지고 있다. 최신 연구에 따르면 ‘조선’이나 ‘고려’는 순록을 뜻하는 ‘코리’나 ‘고올리’에서 유래된 말로서, 바이칼 동쪽에서 순록을 기르면서 살아온 코리족(야쿠트)을 비롯한 순록유목민 일파가 순록의 먹이인 이끼의 길을 따라 대·소흥안령을 넘어 만주지역으로 이동한다. 여기서 목축이 농업과 결합해 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 제국의 경제와 생태적 토대를 이루고, 더 남하해 한반도에 이르러서는 농업구조로 전환하면서 한반도 내 고대국가들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작금의 체질인류학적 연구도 상관성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잇따라 내놓고 있다. 지역이나 민족 간의 상관성을 밝혀내는 데 가장 중요한 유전학적 지표는 Y염색체 DNA와 미토콘드리아 DNA 두 가지다. 이러한 유전학적 지표에 근거해 동아시아인들의 초기 이주경로를 추적해보면 약 6만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현생인류(호모 사피엔스)가 동남아시아나 시베리아 쪽으로 이동해 오늘날의 동아시아인 집단을 형성한다. 한편 혈액 속의 감마항체를 만드는 유전자를 조사하는 방법으로 혈통을 연구해 온 일본의 한 학자는 몽골로이드는 다른 인종과는 달리 ab3st라는 감마유전자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 유전자는 바이칼을 중심으로 사방에 확산되었는데, 그 비율이 몽골·만주·한국·부리야트를 비롯한 동시베리아인에게는 높을 뿐만 아니라 서로가 아주 가깝다. 또한 미국 에모리대 연구소의 세계 종족별 DNA 분석 자료에 의하면 바이칼 주변의 야쿠트인과 부리야트인, 아메리카의 인디언, 그리고 한국인의 DNA가 거의 같다고 한다.
바이칼의 명물인 ‘오물’을 파는 여인
끝으로, 지금까지도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상관성은 문화면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보게 된다. 바이칼 주변 사람들의 정신적 근간은 인간과 주변의 자연환경에 대한 관계를 중시하는 친환경주의 사상의 결정체인 샤머니즘이다. 샤먼의 주문이나 무구(巫具)에서 보다시피 한국 무속의 원류는 이 시베리아 소산의 샤머니즘이다. 두 지역에 전승되고 있는 전통복식을 살펴보면 모두 앞섶이 열린 이른바 전개형(前開型, 카프탄)이란 공통성이 있다. 그리고 구비전승에서도 상당한 상관성을 엿볼 수 있다. 바이칼 주변의 코리인이나 부리야트인은 순록을, 몽골인은 늑대를, 한국인은 곰 같은 짐승을 시조로 삼는 이른바 수조(獸祖)전설이 신통히도 일맥상통한다. 시베리아는 구비문학의 보고이다. 자고로 세시풍속이나 각종 의례 등 삶의 주요 계기마다 특유의 음감(音感)을 가진 전문적인 이야기꾼을 초청해 경청하며 감상하곤 한다. 주제는 전설이나 신화, 동화, 수수께끼 등 다양한데, 그런 이야기 속에서 한국문화에 녹아있는 여러 구비전승 요소를 고스란히 발견하게 된다. 일례로 부리야트의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를 들 수 있는데, 그 내용이 우리네 것과 진배없다. 그 밖에 솟대와 서낭당 같은 공유성 유물들도 처처에서 만나게 된다.이 모든 사실들은 알혼 섬에 공간적으로 응축되어 있다. 그러니 그곳으로의 도항을 앞두고 가슴이 설레지 않을 수 없다. 드디어 9시35분, 대기 세 시간 만에 차량 20여대와 승객 100여명을 태운 여객선은 나루터를 떠난다. 노을 비낀 수면을 15분간 미끄러지더니 얇게 드리운 야음 속에 조심스레 닻을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바이칼 호 중앙 서쪽에 좀 치우쳐 있는 알혼 섬에 다다랐다.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메카 알혼의 원래 발음은 ‘아이홍’인데, 17세기 러시아인들이 이곳을 정복하면서 ‘올콘’으로 잘못 발음한 데서 유래된 와전어이다. 이말의 뜻에 관해서는 ‘(하늘로부터) 가까운’ ‘작은 숲’이라고도 하지만, 현지 안내원은 ‘나무 없는’(메마른) 뜻이라고 소개한다. 이것이 원주민어인지 몽골어인지가 분명치 않다.
여기서부터는 전용관광차를 갈아타고 다녀야 한다. 약 50분 걸려 중심 마을인 후즈르에 자리한 니콜스 관광숙박소에 도착했다. 1~2층으로 된 나무 귀틀집 20여채가 옹기종기 붙어있다. 12동 b호(1층)에 여장을 풀고 호밀 밥에 돼지비계로 저녁을 때우고는 전통목욕인 반야를 하고 자리에 들었다. 향긋한 나무 진 냄새 속에 노독이 말끔히 가셔진다. 이튿날 아침식사도 호밀 죽이다. 알혼 섬은 제주도의 절반쯤 되는 크기의 섬으로서 바이칼 호 한가운데 남북으로 길게 놓인 절해고도다. 숙소로부터의 관광코스는 북행이다. 30분쯤 가니 섬 언저리에 자리한 그 유명한 부르칸 산이 나타난다. 치안 때문에 ‘특수장비’를 갖추고 가야 한다는 뜬소문과는 달리 평온하다. 일렬로 도열한 세르게(오보)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침의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부르칸은 문자 그대로 선경이다. 동북아시아 곳곳에 숱한 기원적 전설을 갈무리하고 있는 부르칸니즘(不咸文化)의 모태인 이 부르칸의 자태는 자못 신비롭기도 하고 숭엄하기도 하다. 섬 인구 1500명 가운데 에벵키족이 다수를 점하고 있지만, 제주(祭主)만은 아직까지도 전설의 주인공인 코리족 남자어른이 담당한다고 한다.
여기서 다시 30분 정도 가면 불타버린 선착장과 생선공장 자리가 남아있는 유배지 이샨카 마을이 나타난다. 지금은 휴게소로 커피숍 한 채만이 덩그러니 남아 그 옛날의 쓸쓸한 풍광을 과객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다시 한 시간 가니 트리브라테라는 삼형제바위가 또 하나의 샤먼 전설을 토해내고 있다. 옛날 아들 삼형제가 아버지처럼 샤먼이 되고 싶어 했는데 아버지는 극구 말린다. 그러자 세 아들은 몰래 이곳에 와 샤먼이 되려고 정진 기도하던 끝에 이렇게 세 바위로 굳어졌다고 한다. 샤먼에 대한 숭앙을 그려낸 전설이다. 석화인(石化人) 전설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신기한 것은 이끼가 화석화되어 돌이 붉은 색을 띠고 있다. 다시 15분쯤 가니 ‘송곳’이란 뜻의 ‘하보이’, 즉 섬의 끝(북단)에 이른다. ‘밝음’이 아닌 ‘붉음’이란 부르칸(不咸) 뜻이 실감나게 붉은 방울송이가 알알이 맺힌 잣나무와 적송이 빼곡하다. 그리고 샤머니즘의 메카답게 섬의 끝머리를 대형 세르게로 장식하고 있다. 돌아오는 길에는 후즈르박물관에 들러 맷돌 같은 우리와의 유사품들을 여러 점 확인하고, 다시 선착장에 돌아와 알혼 섬에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멀어져 가는 섬을 바라보니 저도 모르게 상념에 젖기 시작한다. 물이나 돌밖에 없는 알혼 섬이나 바이칼 호를 굳이 찾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라는 자문부터이다. 한마디로 그 답은 시쳇말로 ‘뿌리 찾기’이다. 이 길은 참 나를 찾는, 내 속으로 순례하는 길이다. 뿌리 없는 나무는 자라서 가지를 치고 꽃피우며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자칫 너 나를 넘나드는 국제화 시대에 무슨 고루한 소리인가고 핀잔을 던지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나라는 존재는 본래부터가 남과 남의 만남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나와 남은 어울림 속에서 공생함으로써 나를 찾는 길은 곧 남을 찾는 길과도 잇닿아 있다. 차제에 한 가지 덧붙이면, 유전적으로 한민족의 20~30%는 남방계에 속하며, 우리 속엔 남방 문화유전자도 분명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북방만이 아니라 남방에서의 ‘뿌리 찾기’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균형 감각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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