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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부손 [所夫孫]

소부손 [所夫孫] - 민족문화대백과
집필자 신형식
 
생몰년 미상. 고구려 말의 지방관.

648년(보장왕 7) 9월에 중국 당나라 장군 설만철(薛萬徹) 등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하여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 박작성(泊灼城) 남쪽 40리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 때 박작성의 성주로 있던 소부손은 보기(步騎) 1만 여명을 거느리고 이에 항거하였다. 설만철이 우위장군(右衛將軍) 배행방(裵行方)을 보내어 보졸(步卒) 및 여러 군사들로 공격하였다. 이에 고구려군은 무너지고 박작성은 포위되었다.

그러나 박작성은 산에 의거하여 요새를 설치하고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굳게 지켜 함락되지 않았다. 한편 이러한 『삼국사기』의 기록과는 달리 중국측 사료인 『구당서』·『신당서』에는 이때 소부손을 목베어 죽이고 성을 함락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소부손(所夫孫) - 문화콘텐츠닷컴
 
648년 고구려 박작성(泊灼城)의 성주로 당과 싸운 장수.

제2차 여·당 전쟁을 일으켜 침략해온 당군에 맞서 싸워 박작성을 사수하였다. 제1차 여·당 전쟁에서 패배한 당태종은 전략을 바꾸어 지구전으로 고구려를 압박하였는데, 648년 1월 우무위장군 설만철(薛萬徹)을 청구도행군대총관에 임명하여 바닷길로 압록강 하구까지 고구려를 침입하게 하였다. 설만철이 3만여 명의 부대를 이끌고 압록강 하구를 따라 올라와 박작성에서 불과 60여리 떨어진 곳에 군영을 설치하자, 당시 고구려 박작성의 성주로 있던 소부손은 보병과 기병 1만을 이끌고 나와 성 밖에 저지선을 구축하고 이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당군과의 대결에서 점차 열세에 몰리자, 다시 성 안으로 퇴각하여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산에 의거하여 요새를 설치한 박작성의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당군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이때 마침 고구려의 장수 고문(高文)이 오골성과 안지성 등지에서 규합한 3만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지원해왔으나, 이들은 설만철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 결국 패배하였다. 그러나 설만철은 소부손의 결사적인 저항을 이기지 못하여 결국 박작성 공략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소부손은 박작성전투에서 비록 설만철의 당군을 이기지는 못하였으나 그가 요동성↔오골성↔박작성으로 이어지는 압록강의 이서 지역과 그 이동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인 박작성을 사수한 것은 고구려의 압록강 방어선을 붕괴시키려던 당군의 계획을 저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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