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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가 살아온다 <28> 제5부 동북아 속의 가야 ④ 중국의 가야 원류
국제신문  박창희기자 chpark@kookje.co.kr  입력: 2003.05.01 19:38
 

지린성 노하심촌 인근에서 발견한 조선족 거주지의 고려방 안내판.
 
광막한 만주평원이 비행기 차창을 통해 흐릿하게 다가왔다. 흐릿함의 실체는 매연 섞인 옅은 황사였다. 북방의 가야 원류를 찾아가는 길이다.

만주땅에 가야? 쉽게 믿기지 않겠지만, 많은 학자들은 가야문화의 바탕색에 북방 색채가 배어 있다고 보고 있다. 한반도 남부의 많은 고분 발굴품들은 최소한 삼국시대까지 우리 조상들이 기마민족의 야성을 유지하며 역동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중국의 최근 발굴성과들은 이런 심증을 굳혀주고 있다.

취재진은 지난달 21일 오전 11시 20분(현지시각) 중국 지린성(吉林省)의 성도(省都) 창춘(長春)에 도착했다. 인천서 출발한지 2시간 만이었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연도에는 매화와 복사꽃이 한창 피어나고 있었다.

부여를 닮은 토성

첫날 첫 일정으로 찾아간 지린성박물관. “잘못 오셨네요. 수리중이어서 전시품이 거의 없습니다.” 30대 박물관 여직원은 낯선 관람객을 황당하게 했다.

이어 찾아간 지린(吉林)대학 옆 ‘동북아역사문화연구소’. 현지에 유학중인 이 연구소 이종수(36·지린대 고고학과 박사과정) 소장은 중국에서 간행된 도록과 고고자료를 꺼내 보이며 “뭐 좀 비슷한 게 있느냐”고 물었다. 낯익은 철검과 여러 형태의 환두대도, 철촉, 호형대구…. 바로 김해 대성동, 부산 복천동 고분에서 출토된 것들과 비슷했다. 이 소장은 “랴오닝성(遼寧省)과 지린성 일대 무덤에서 나온 것들이며 흉노나 선비, 부여 계통의 유물로 파악되기도 한다”고 소개했다.

이튿날 취재진은 만주땅의 고대 유적지 몇 곳을 직접 찾기로 했다. 행선지는 지린성 상하만(上河灣) 유적과 유수현(楡樹縣) 노하심촌(老河深村), 그리고 지린시 일대.

오전 7시. 취재진은 ‘시아리’라 불리는 빨간색 중국택시를 전세 내 타고 창춘을 빠져 동쪽으로 향했다. 자동차와 자전거, 수레를 끄는 말이 함께 뒤섞인 번잡한 도심을 벗어나자 이내 평원이 시작됐다. 평원의 경작지는 듣던 대로 지겨울 정도였다.

“전부 옥수수 밭입네다. 세계 옥수수의 20%가 여기서 난다지요.” 조선족 운전사 이정화(47)씨의 설명이다.

경작지에서 농민들은 밭갈이에 바빴다. 두 마리의 말이 채찍질 당하며 쟁기를 끄는 모습이 이채롭다.

울퉁불퉁한 2차로 포장길을 3시간 가량 달려 닿은 상하만은 전형적인 중국 농촌마을이었다. 30여호의 작은 마을에 들어서자 거름냄새가 확 풍겼다. 산인지 구릉인지 모를 곳을 향해 20여분 올라가니 보루(堡壘) 비슷한 토성이 나타났다.

“지표조사에서 부여의 방어진지로 드러난 곳입니다. 기원전후 부여 연맹체의 어떤 대가(大家)세력이 이곳에서 말갈족(혹은 읍루)을 방비했겠지요.”(이종수 소장)

창춘과 지린의 중간쯤에 자리한 이 유적은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고성으로 부여 연맹체 거점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고 한다.

전망 좋은 이 토성을 비단 부여만 사용했을까. 대흑산산맥이 끝나는 이 지역은 수천년간 켜켜이 쌓인 역사가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다. 한때는 부여, 한때는 말갈, 그 다음은 고구려, 이어 요(遼), 금(金), 원(元), 청(淸)이 주인이 되어 한시절을 호령했을 것이다.

황량한 유수 노하심

상하만을 빠져나온 취재진은 다시 두어시간을 달려 유수현 대파향(大坡鄕) 노하심촌에 도착했다. 흔히 ‘유수 노하심’으로 불리는 이곳은 제2 쑹화장(松花江) 북쪽 기슭에 형성된 분묘군. 상·중·하층으로 층을 이뤄 청동기시대부터 철기시대까지 다양한 민족의 유물이 출토됐다. 한과 부여 시기의 무덤만 129기가 발굴됐는데, 애초 선비족의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부여의 것이란 주장이 더 힘을 얻고 있다.

국내 고대사 전공자들이 북방문화를 논할 때 단골메뉴로 거론하는 이 유적은 가야와도 직·간접 관련이 있다는 보고가 있다.

북방문화의 한반도 영향에 대해 지린대 고고학과 위존성(魏存成) 교수는 “후연의 수도였던 랴오닝성 조오양(朝陽)에서 출토되는 철제품과 길림성 일대의 금속제품들이 주민의 집단이동 등에 의해 한반도로 흘러들었을 개연성이 있다”고 했다.

어렵게 찾은 노하심 유적지는 황량함 그 자체였다. 내용물을 모두 빼먹고 껍데기만 남겨둔 꼴이랄까.

노하심촌 인근에서 취재진은 ‘고려갱산(高麗坑山)’ ‘고려방(高麗房)’이라 적힌 이색 안내판을 발견하고 사진을 찍었다. 모르긴 해도, 만주땅에 뿌리내리고 사는 한민족의 생생한 자취일 것이다.

고구려의 힘

지린시 용담산성(龍潭山城)에 도착한 것은 22일 오후 2시께였다. 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는 용담산은 입구부터 ‘고구려 냄새’가 물씬 풍겼다. ‘이곳 산성은 토성혼축으로 높이 2∼10m에 길이 2.4km이다. 고구려 호태왕 때 축조됐다…’. 지린성 문물보호당국이 세운 안내판에는 ‘고구려’란 글자가 이례적으로 명기되어 있었다. 고구려의 힘은 1천4백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그들의 북쪽 변경, 그러니까 국내성이 있는 지안(集安)에서 400여㎞ 떨어진 이곳까지 확실히 미치고 있었다.

용담산에는 돌을 정교하게 쌓아올려 만든 수뢰(水牢·축수지), 땅을 파들어간 뒤 둘레에 돌을 쌓아 범죄자나 포로를 가두는 데 쓴 한뢰(旱牢) 등 고구려인의 예지가 번뜩이는 유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용담산의 산책로 정상부는 훌륭한 전망대였다. 쑹화장을 낀 지린시와 주변 형세가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잡혔다. “저 앞쪽에 솟은 야산이 동단산입니다. 3단의 토성과 옹성이 있지요. 저 부근에서 부여 왕궁터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굴됐습니다. 동단산 뒤편은 남성자고성, 왼쪽에 길게 누운 산자락은 모와산(帽瓦山) 유적입니다.”

동행한 이종수 소장은 북부여를 설명하고 있었다. 도도히 흐르는 쑹화장과 주변의 유순한 지형을 보고 있자니 문득 해모수, 영고, 순장같은 단어가 떠올랐다.

북방 민족들의 삶의 자취가 켜켜이 퇴적되어 있다는 모와산 유적지를 답사하던 취재진은 인근 농가에서 뜻밖의 유물 하나를 발견했다. 철로 된 항아리, 바로 철복(鐵腹)이었다. 한쪽 모퉁이가 깨져 구멍이 난 이 철복은 김해 양동리에서 출토된 것과 형태가 거의 같았다.

3세기 후반, 중국 동북지역에는 소수 민족들의 격렬한 에너지가 분출됐다. 285년 모용씨의 부여공격, 서진의 내분을 틈탄 흉노·선비의 중원진출 등 당시 국제정세는 한반도 남부의 가야지역까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부여족의 일파가 남하해 김해의 금관가야를 세웠을 수도 있다. 논란이 따르지만 부산대 신경철(고고학과) 교수는 오래전부터 ‘부여족 남하설’을 주장하고 있다.

중국 고고학을 전공한 단국대박물관 복기대 박사는 “가야의 원류를 이른 시기에서 찾으려면 랴오닝성 조오양의 유적을 주목할 필요가 있고, 교류차원에서 보면 3세기 이후 선비문화에 초점을 맞출수 있다”며 “인류학적 관점에서 부여족 남하설을 부정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부여와 가야. 맥이 닿을 것 같지 않은 두 나라는 과연 무슨 곡절로 민족적 인연을 가진 것일까. 고대 동북아의 국제정세를 살피면 이 의문의 실마리가 풀릴 것도 같다.

취재진이 찾아간 북방(北方)은 결코 먼 곳이 아니었다. 북방의 문물이 물결쳐 한반도 남쪽으로 흘러들고 남쪽의 것이 또 북방으로 스며든 것이 고대사의 정황일진대, 우리는 그동안 북방을 막연히 먼 곳으로만 알고 ‘마음의 3·8선’을 친 것이 아닌지. 

중국 지린성(吉林省)=박창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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