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95094

조선 중기, 십만 대군도 아내가 두려웠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 다섯 번째 이야기
12.02.08 21:49 l 최종 업데이트 12.02.08 21:49 l 김종성(qqqkim2000)

▲  질투의 화신, 윤보경 왕후(김민서 분). ⓒ MBC

조선시대 전기의 사회상을 다룬 MBC <해를 품은 달>. 이 드라마에는 강력한 질투의 화신이 등장한다. 이훤(김수현 분)의 아내인 윤보경 왕후(김민서 분)가 그 주인공이다. 

보경의 질투 역사는 오래됐다. 어린 시절 그는 훤과 허연우(한가인 분)의 사랑을 몹시 질투했고, 가문의 권세 덕분에 연우를 밀어내고 훤의 아내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사랑이 없는 정략결혼을 한 탓에 보경과 훤의 삶은 남남지간보다도 못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던 차에 웬 무녀가 혜성처럼 나타나서 액받이를 이유로 밤마다 임금의 침소를 들락거리니, 보경의 가슴 속에서는 질투의 불길이 타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남편의 침소 밖에서 방 안 동정을 엿보기도 했다. 그 무녀가 그 옛날 연우라는 걸 알게 되면, 아마 보경의 심장은 타다 못해 녹아버릴 것이다.

하지만 보경은 함부로 감정을 드러낼 수 없다. 까닥하면 칠거지악 중 하나인 투기죄에 저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종의 부인인 폐비 윤씨(연산군의 어머니)의 사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일국의 왕후일지라도 투기죄에 걸리면 언제든지 이혼을 요구당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형법의 기초인 <대명률>에서는 칠거지악을 이혼 사유로 규정했다. 또 <경국대전> 같은 법령집에서는 투기로 인한 살인죄를 특별히 규정했다. 투기로 살인을 범한 여성을 종로에 끌어다 놓고 곤장을 친 뒤 유배를 보내도록 했던 것이다. 이처럼 부인의 투기를 제어하기 위한 법적 장치는 매우 엄혹했다.  

그렇다면 옛날 사람들은 왜 부인의 투기를 금지했을까? 남존여비의 이념 때문에 그랬을까? 그런 건 아니다. 과거에 남존여비의 관념이 존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실제 가정생활에서 부인이 남편한테 마냥 억눌려 지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아내를 두려워하는 자, 붉은 기로 가라"


▲  윤보경의 사랑을 외면하는 이훤(김수현 분). ⓒ MBC

조선 중기의 저명한 지식인인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자고로 순화시키기 힘든 것이 부인이다. 아무리 강심장일지라도 부인을 두려워하지 않을 남자가 몇이나 되겠는가?"라고 말했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남편한테 고분고분했을 것 같지만, 사료에서 확인되는 부부생활은 오늘날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어우야담>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이런 이야기가 유행했다. 십만 대군을 거느린 장군이 허허벌판에 붉은 기와 푸른 기를 꽂아두고는 "아내를 두려워하는 자들은 붉은 기로 가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푸른 기로 가라"고 명령했다. 

9만 9999명은 붉은 기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런데 병사 하나가 저 혼자서 푸른 기 쪽으로 뛰어가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집안에서 당당하게 사는 남편 같았다. 장군이 궁금해서 전령을 보내 질문했다. 왜 여기 있느냐고. 병사 왈(曰), 집사람이 남자 셋 이상 모인 데는 가지 말라고 했거든요, 남자는 셋만 모이면 여자 이야기를 한다고요. 

이런 이야기가 민간에서 널리 회자된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우리의 선입견과 달리 조선시대를 포함해서 과거 시대의 아내들도 남편 앞에서 상당히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다. 조선시대 문헌들에서 남편의 권위를 유독 강조한 것은 실제로는 남편의 권위가 그리 높지 않았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국가에 대한 충성의 의무가 유별나게 강조됐던 박정희·전두환 집권기에 실은 국가에 대한 저항이 엄청나게 거셌던 것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옛날 부인들의 지위가 그렇게 낮지 않았다면 애초부터 부인의 투기가 금지됐던 이유는 무엇일까? 고대 사회에서 투기죄를 처벌한 배경이 무엇인지를 조사해보면, 그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부여 편에 따르면 부여에서는 부인의 투기를 사형으로 처벌했다. 이것은 여성의 지위가 낮았기 때문이 아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여성의 지위가 꽤 높았다. 여성들이 국가의 제사사무를 주관한 사실에서도 그 점을 알 수 있다. 

부여, '돌싱' 경제력 문제로 일부다처 허용

부여에서 투기를 처벌한 것은 일부다처제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조카들을 책임지는 형사취수 제도가 있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부여에서는 한 남자가 여러 아내를 두는 것을 사회적으로 공인했다. 

형이 형수를 맞이하는 것은 오늘날의 감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당시로는 그것이 일종의 사회복지를 위한 제도였다. 고대에는 몇 해가 멀다 하고 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에, 미혼 남자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미망인이 재혼 상대방을 찾는 일은 결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돌싱'들이 경제력을 갖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을 버려둘 경우에는 사회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삶의 터전이 없는 백성이 늘어나는 것만큼 위정자에게 고민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형사취수 제도는 그런 여인들이 생활 터전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였다. 이렇게 하자니, 자연히 일부다처를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같은 시기에 동아시아에서 일부다처가 꽤 유행했다는 점은 일본의 사례에서도 드러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왜국 편에 따르면 당시 일본의 귀족들은 네댓 명의 부인을 데리고 살았고 평민 중에도 부인 두셋을 데리고 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  이훤이 사랑하는 여인, 허연우(한가인 분). ⓒ MBC

현대에는 국가 간의 경쟁이 주로 상품·서비스 수출입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고대로 갈수록 그것은 주로 전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래서 자연히 남자가 귀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을 구할 수 없는 여성들을 배려하자면 일부다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다처는 바람직한 문화는 아니지만 그것을 허용한 시대에는 그 시대 나름의 절박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일부다처를 유지하자니, 인간의 감정 중 하나를 제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부인 상호 간의 질투를 법으로 규제해야 했던 것이다. 부여에서 투기죄를 사형으로 처벌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한 집에 여러 명의 부인이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형만으로는 투기를 없앨 수 없을 거라 판단했는지, 부여 위정자들은 투기로 인해 사형을 당한 여인의 사후 명예까지 깎아내리는 조치를 취했다. 사형당한 여인의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냥 산에 갖다 버리도록 했다. 투기한 여인의 결말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부인의 투기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한 여성을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시신까지 까마귀의 밥으로 만든 것은 분명히 야만적이고 반인간적인 처사다. 고대의 위정자들은 그렇게라도 해서 짝없는 여성들이 가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하려 했으니, 이는 그 시대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투기죄, 남성보다 여성 배려하는 측면에서 생겨

이처럼 원래의 투기죄는 남성보다는 여성을 배려하는 측면이 더 컸다. 이랬던 제도가 나중에는 남성의 권익을 보장하는 수단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첩을 들이는 남자들이 이런 제도를 악용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서민 남성들은 <어우야담>에 설명된 것처럼 아내의 잔소리를 두려워하며 살았다. 이들은 투기죄 같은 것을 운운할 필요도 없었다. 첩을 들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상류층 남성들도 아내를 두려워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그들 역시 첩을 들일 때는 아내의 저항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이 별채에서 다른 여자와 한이불을 덮고 있는 장면을 상상하기 어려운 것은, 오늘날의 부인들이나 조선시대의 부인들이나 그 이전의 부인들이나 다 마찬가지다. 

이런 상류층 남성들이 의존한 수단이 투기죄 규정이었다. 그들은 '투기한 여인은 엄벌에 처한다', '투기한 여인은 이혼을 당할 수 있다'는 등등의 법규를 내세워 축첩을 정당화하고 아내의 저항을 제압했다. 투기죄에 걸리면 정당한 절차 없이 이혼을 당하거나 돈 한 푼 못 받고 쫓겨나는 수가 많았기 때문에, 투기죄 규정은 상류층 남성들이 억센 부인을 제압하는 수단이 되었다. 

투기죄는 처음에는 좋은 의도를 갖고 출발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처럼 '남성권익 보장'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 제도가 가장 많이 악용된 시대는 조선 시대였다. 여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자 출발한 제도가 나중에는 여인들의 눈물을 빼는 악의 제도로 타락했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시리즈에서 다루었으면 하는 주제가 있으면, <오마이뉴스> 쪽지나 이메일(jkim0815@naver.com) 혹은 트위터(@jkim0815)를 통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기사가 되기에 적합한 소재라고 판단되면, 1~2주 이내에 기사로 작성해서 발표하겠습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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