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3>고구려 건국조 주몽(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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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주몽의 이야기로 들어가보도록 하자.
우선 주몽을 소개한 책 중 가장 잘 알려진 《삼국사》와 《동명왕편》을 대조비교 하면서,
주몽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이어가본다.
[始祖東明聖王, 姓高氏, 諱朱蒙<一云鄒牟 一云衆解>.]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은 성이 고씨(高氏)이고 이름이 주몽(朱蒙) <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하였다.>이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동명성왕 즉위전기
먼저 주몽의 탄생 이야기.
그 전에 《삼국사》 50권의 구조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하고 넘어가자면,
1권부터 28권까지는 삼국의 역사를 실은 '본기'로서
1) 1~12권은 신라, 13~22권은 고구려, 23~28권은 백제의 역사를 다루었고,
2) 29∼31권은 연표로서 삼국 제왕들의 연력을 간략하게 수록했는데
신라 중심으로, 상(上)은 박혁거세왕 즉위(BC 57)부터 미추왕 13년(274),
중(中)은 미추왕 14년(275)부터 진평왕 30년(608),
하(下)는 진평왕 30년(608)부터 경순왕 9년(935)
그리고 진훤백제의 멸망인 936년까지를 기록했다. 본기와 맞지 않는 부분이 더러 나오기도 한다.
3) 32∼40권은 지(志)라고 해서 삼국의 문물이나 지리 및 제도를 다루는데
제1권은 제사와 악(樂)을 싣되 5묘(廟)·3사(祀)에 대한 설명이 많이 차지하고 있고
악기·가악(歌樂)·무(舞)·악공의 순서대로 음악 제도에 대해 기록했으며,
제2권은 색복(色服)·거기(車騎)·기용(器用)·옥사(屋舍),
제3~5권은 신라의 지리,
제6권은 고구려·백제 지리,
(지리에 관해서 비중이 가장 많다)
제7~9권은 중앙관부·궁정관부·무관과 외직의 순서로 기록한 직관(職官).
4) 41∼50권은 열전이니, 전체 69명을 대상으로 했지만 특별히 항목을 분류하지는 않았다.
제1~3권까지는 몽땅 김유신에게 할애하고,
제4권부터 을지문덕·거칠부 등 8명의 열전,
제5권은 을파소 등 10명의 열전,
제6권은 강수·최치원 등 학자들의 열전,
제7권은 관창·계백 등 순국열사 19명의 열전,
제8권은 솔거·도미 등 11명의 열전,
제9권은 연개소문·창조리 등 반신(叛臣)의 열전,
제10권은 궁예·견훤 등 역신(逆臣)의 열전 등이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에 기록된 것은 간단하게 넘기고, 이규보의 《동명왕편》을 먼저 보도록 한다.
《동명왕편》의 서문에, 이규보는 자신이 《동명왕편》을 저술하게 된 동기를 서술하고 있다.
[世多說東明王神異之事. 雖愚夫騃婦, 亦頗能說其事.]
세상에서는 동명왕의 신통하고 이상한 일들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한다. 비록 어리석은 남녀들까지도 제법 그 일을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이다.
<동명왕편> 병서
이규보가 살던 고려 때까지도, 동명왕의 이야기는 널리 퍼진 이야기였다.
《동명왕편》에서 이규보의 표현을 빌리자면, 길거리에 사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다 자세하게 일일이 설명해줄 수 있을 정도였다.
[僕嘗聞之, 笑曰 "先師仲尼, 不語怪力亂神. 此實荒唐奇詭之事, 非吾曺所說."]
나는 일찍이 그것을 듣고는 웃으며 말하였다.
"선대의 스승 공자[仲尼]께서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는 실로 황당하고 기괴한 일이니, 우리들이 이야기할 바가 아닌 것이다."
<동명왕편> 병서
고려 말년부터 점차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유교적 합리주의는,
지금의 기독교처럼 우리 나라의 고유한 신앙과 전통적인 가치관을 잠식해 들어가면서 재래의 가르침을 부정하게 만들었고,
이규보 역시도 그러한 유교 사상에 입각해서 동명왕을 보던 유학자들의 눈으로 그저 허튼 소리라고만 생각했었다.
이규보 한 사람을 욕할 것이 못 된다. 당시의 유학자들은 모두가 그렇게 동명왕을 그저 허구의 인물로 여기고
그의 행적을 모두 헛소리라고만 생각했으니까.
[及讀魏書通典, 亦載其事.]
그러다 《위서》와 《통전》을 읽게 되었더니, 역시 그 사실이 기술되어 있었다.
<동명왕편> 병서
그저 허구의 옛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던 이야기를 다시 보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인들이 기록한 동명왕의 일대기를 찾아 읽게 되면서부터였다.
대체 동명성왕 추모라는 인물은 어떤 인물이기에, 중국의 사서에까지 기록이 남게 된 것인가.
젊은 유학자는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然略而未詳, 豈詳內略外之意耶?]
그러나 간략하고 자세하지 못하니, 어찌 자기 나라의 것은 자세히 밝히고 외국의 것은 소홀히 다루려는 뜻이 아니겠는가?
<동명왕편> 병서
그가 보았던 《위서》와 《통전》의 기록은, 그가 그토록 신봉하던 유교사상에 철저했던 유학자들이 남긴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유학자인 자신이 허구라고 생각해 무시하던 동명왕의 이야기를 번듯하게 하나의 '역사'로서 기록에 남겨 전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규보에게 충격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보다 외국에서 더 인정받는 우리 문화를 보고
여태껏 촌스럽고 구질구질하다고만 여겼던 우리 문화의 가치를 다시 확인하게 되듯,
외래의 기독교에 떠밀려 '미신' 취급을 받던 우리나라의 전통 불교제의와 무속행사를 외국인들에게 재평가받게 되면서
다시금 민속학적으로 다시 연구하는 부끄러운 현실을 고려의 이규보 역시 느끼게 되었으리라.
그리고 우리가 찾아서 연구하고 제대로 뜻을 밝혀야 할 우리의 소중한 옛 이야기가 외국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면서
그 본모습을 잃어버리고 간략화되어 점차 미미해지고 있는 충격적인 순간을 이규보는 보았을 것이다.
고구려는 중국인들에겐 그저 변방의 작은 나라,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외국'에 불과했는데,
정작 고구려의 후계를 자처하던 고려보다도 더 철저하게 고구려의 역사를 찾아서 기록으로 남기고 있지 않은가.
[越癸丑四月, 得舊三國史, 見東明王本紀, 其神異之迹, 踰世之所說者.]
지난 계축년 4월에 《구삼국사》를 얻어서 그 곳에 있는 '동명왕본기'를 읽어보니, 그 신기하고 이상한 사적이 세상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를 넘고 있었다.
<동명왕편> 병서
그러던 차에 이규보는 《구삼국사》라는 오래된 역사책을 얻게 된다.
일찌기 문열공 김부식이 《삼국사》를 편찬하면서 모본으로 삼았던,
고려 초년에 옛 삼국의 역사를 모아 편찬한 우리의 소중한 기록유산을, 이규보는 떨리는 손으로 읽어내려갔다.
그것은 민간에서 설명하는 비루하고 허무맹랑한 옛 전설 수준이 아니었다.
[然亦初不能信之, 意以爲鬼幻.]
그러나 역시 처음에는 믿지 못하였으니, 귀신이나 허구로 의심[意]하였기 때문이다.
<동명왕편> 병서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유교적인 가르침을 받으며 머릿속에 유교사상이 주입된 이규보는 그 기록을 선뜻 믿지 못하고 낑낑댔다.
외래의 개독교가 우리 나라 사람들의 사상을 철저하게 세뇌시켜
우리 나라 사람들이 우리 나라의 재래신앙을 믿지 못하게 만든 것처럼,
그가 지금껏 절대적 진리라고 믿어온 유교적 합리주의와는 너무도 어긋나는 우리 나라 고대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담겨있는 《구삼국사》 속에서, 이규보는 가치관 혼동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及三復耽味, 漸涉其源, 非幻也, 乃聖也, 非鬼也, 乃神也.]
여러 번 거듭 읽고 음미하여 점차 그 근원을 찾아가니, 그것은 허구가 아니라 신성함이며, 귀(鬼)가 아니라 신(神)이었다.
<동명왕편> 병서
그가 가지고 있던 편견, 유교사상이 애써 숨기며 가리고 보지 못하게 하던 우리의 원래 모습을 발견한 순간, 이규보는 깨달았다. 그것은 부끄러워할 것도 아니고 촌스럽게 생각할 것도 아니며, 우리와 가장 깊은 연관이 있고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의 손으로 연구되고 계승되어야 하는 우리의 모습임을.
잊고 있었던 옛날의 우리 본연의 모습을 동명왕본기에서 찾았다.
[○國史直筆之書, 豈妄傳之哉]
하물며 국사(國史)란 있는 사실을 그대로 쓰는 글이니, 어찌 그 사실을 함부로 전하였겠는가?
<동명왕편> 병서
그것은 역사였다.
우리가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하고 그대로 믿으며 전하고 전해온 우리의 소중한 옛 이야기.
[金公富軾重撰國史, 頗略其事. 意者公以爲國史矯世之書, 不可以大異之事爲示於後世而略之耶?]
김공 부식이 국사를 다시 편찬할 때 그 사적을 너무 간략하게 다루었다. 생각컨대 공은 국사를 세상을 바로 잡는 글로 여겨, 지나치게 이상스런 일을 후세에 보여주는 것은 안되겠다고 하여, 그것을 줄여버리지 않았겠는가?
<동명왕편> 병서
그리고 김부식이 《삼국사》에서 그 옛 이야기들을 줄여버린 이유에 대해서 이규보는 생각해보았다.
역사란 후대에 교훈을 주기 위한 것. 너무 황당하거나 괴이한 이야기는 후대에 아무 교훈이 되지 못한다는
유교적인 합리주의에 입각해 그 이야기들을 빼고 줄여버린 김부식을 과연 어떻게 봐야 하는가?
[按唐玄宗本紀, 楊貴妃傳, ○無方士升天入地之事. 唯詩人白樂天恐其事淪沒, 作歌以志之. 彼實荒淫奇誕之事, 猶且詠之, 以示于後.]
당의 《현종본기》와 《양귀비전》을 살펴보면, 어느 한 군데도 방사(方士)들이 하늘에 오르고 땅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없다. 오직 시인 백낙천만이 그러한 사적이 없어질까 두려워하여, 노래를 지어서 그것을 기렸다. 그것은 사실 황당하고 음란하며 기괴하고 근거 없는 일인데도, 오히려 노래로 읊어서 후세에 보였다.
<동명왕편> 병서
백낙천의 《장한가》는 당 현종과 양귀비의 이야기를 시로 읊고 있는데,
유교사상을 가진 선비임에도 불구하고 백낙천은 자신이 보고 들은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이야기들을
모두 빠짐없이 한 편의 아름다운 노래로 지어 후세에 전했다.
하늘에서는 비익조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될 이야기들을 기록해 남긴 시는
비록 황당하고 음란하며 기괴하고 근거없다는 유학자들의 비판을 들으면서도,
그 자체로서 아름다운 문학작품이 되어 후세에 남았고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오르내리며 많은 극찬을 받았다.
[○東明之事, 非以變化神異眩惑衆目, 乃實創國之神迹, 則此而不述, 後將何觀.]
하물며 동명왕의 사적은 변화가 신기하고 이상한 것으로 여러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킬 일이 아니요, 실로 나라를 창건한 신성한 자취인 것이니, 이러한 사적을 기술해두지 않으면 훗날 무엇을 볼 수 있을 것인가?
<동명왕편> 병서
동명왕의 이야기는 백낙천이 읊었던 《장한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다른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나라가 있기 이전에 우리 나라의 조상들이 살았던 이야기로서,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는 소중한 역사이다.
머릿속을 지배하던 외래의 유교사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이규보는 그것을 깨달았다.
[是用作詩以記之, 欲使夫天下知我國本聖人之都耳.]
이런 까닭에 시를 지어 이를 적고, 모름지기 천하로 하여금 우리나라가 본디 성인(聖人)의 터임을 알게 하려 할 따름이다.
<동명왕편> 병서
천하가 우리나라를 성인(聖人)의 땅이라 알게 하겠다ㅡ상당히 민족적인 발상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주장한 낭가 사상과 어느 정도 통하는 데가 있는 것 같다.
《위서》와 《통전》을 보고 이규보 선생이 간략하다고 비판하면서,
'어찌 자기 나라의 것만 자세히 밝히고 외국의 것은 소홀히 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어찌보면 지금 고구려사를 중국 동북지방 변방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의 패권주의 중화사상을
꿰뚫어 비판하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자.
海東解慕漱 해동의 해모수는
眞是天之子 진실로 하늘의 아들이시라.
[本記云, 夫余王解夫婁老無子, 祭山川求嗣所, 御馬至鯤淵, 見大石流淚. 王怪之, 使人轉其石, 有小兒金色蛙形. 王曰 "此天錫(賜)我令○乎." 乃收養之. 名曰金蛙, 立爲太子... ]
<본기에 말하기를 부여왕 해부루가 늙어서도 자식이 없어 산천에 제를 지내 후사를 구하러 가는데 부리던 말이 곤연에 이르러 큰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서 그 돌을 옮기니 금색의 개구리 모양의 작은아이가 있었다. 왕이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나에게 주신[賜] 아들(?)이로구나."
하면서 거두어 길렀다. 이름을 금와라 하고 태자로 삼았다.
<동명왕편> 서장(序章)
이와 비슷한 내용이 《삼국사》고구려본기에 실려있다.
[先是, 扶餘王解夫婁老無子, 祭山川求嗣, 其所御馬至鯤淵, 見大石, 相對流淚. 王怪之, 使人轉其石, 有小兒, 金色蛙形<蛙一作蝸> 王喜曰 “此乃天賚我令胤乎.” 乃收而養之, 名曰金蛙. 及其長, 立爲太子.]
앞서 부여(扶餘)의 왕 해부루(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제사를 드려 대를 이을 자식을 구하였는데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서로 마주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서 그 돌을 옮기니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蛙]<개구리를 또는 달팽이[蝸]라고도 했다.> 모양이었다. 왕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하늘이 나에게 자식을 준 것이다.”
하고는 거두어 길렀는데,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였다. 그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삼국사>권제13, 고구려본기1, 동명성왕 즉위전기
여기서 몇 가지 부분적인 차이를 빼면 내용이 별반 차이가 없다.
이것은 《삼국사》와 《동명왕편》, 모두 《구삼국사》를 원전으로 삼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其相阿蘭弗曰, "日者天降我曰, '將使吾子孫, 立國於此. 汝其避之.' 東海之濱有地, 號迦葉原. 土宜五穀, 可都也." 阿蘭弗勸王移都, 號東夫余. 於舊都, 解慕漱爲天帝子來都.]
그 나라의 재상 아란불이 말하기를
"일전에[日者] 하늘이 나에게 감응하여[天降我] 말씀하시기를, '장차 나의 자손을 시켜 이곳에 나라를 세울 것이다. 너는 그것을 피하라. 동해 바닷가에 땅이 있어 가섭원(迦葉原)이라 합니다. 땅에 마땅히 오곡을 길러[宜(有)五穀] 도읍을 할 만 하다.'라고 하였습니다."
했다. 아란불이 왕에게 권하여 도읍을 옮기고 동부여라 하였으며, 옛적 도읍에는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로 와서 도읍하였다.
《구삼국사》인용
<동명왕편> 서장(序章)
아시는분도 있겠지만, 아란불이니 가섭원이니 하는 것은 사실은 그 당시 이름이 아니다.
모두 불교적인 윤색의 흔적이다.
아란이나 가섭은 석가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불경에나 나오는 양반들인데
우리나라에서 불교를 4세기에 받아들였다고 하는 공식기록에 의거한다면
그 이전인 기원전 1세기에, 어떻게 불교적인 이름이 존재할수가 있겠는가.
우리나라가 그렇게 숱한 전쟁을 겪다보니까,
깊숙히 보관했던 역사책이 죄다 싸그리 불타 없어져 버려서 남은 것이 없었는데,
승려들이 적어놓은 것은 바위동굴 속에서 가까스로 보존되어 후세에 전해져 오게 된거다.
나중에 부식이 영감이 옛날 《고기》를 모아서 《삼국사》를 지으려고 해도,
딱히 참조로 해서 적을만한 것이 없다보니, 답답해하다가 결국 이걸 엮어 넣는 수도 있었다고.
단군의 할아버지인 환인을 제석천이라고 하는 것이나, 동부여의 수도를 가섭원이라고 부르는 것,
가락국을 가야(伽倻)라고 하는게 다 그따위들이다.
《고기(古記)》에 나오는 ‘환인제석(桓因帝釋)’이라는 칭호는 《법화경(法華經)》에서 나왔고, 그 밖의 칭호도 다 중들 사이의 말이니, 신라ㆍ고려 때에 불교[異敎]를 숭상한 폐해가 이렇게까지 된 것이다. 동방이 병화(兵火)를 여러 번 겪어서 비장(秘藏)된 국사(國史)가 죄다 없어져 남은 것이 없었으나, 승려가 적어 둔 것은 암혈(岩穴) 가운데에서 보존되어 후세에 전할 수 있었으므로, 역사를 짓는 이들이 적을 만한 것이 없어서 답답한 끝에 이를 정사(正史)에 엮어 넣는 수도 있었다. 세대가 오래 내려갈수록 그 이야기가 굳어져서, 한 인현(仁賢)의 고장으로 하여금 말이 괴이한 데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통탄함을 견딜 수 있으랴!
<동사강목> 제1상(上), 조선 기자 원년, 주(周) 무왕(武王) 13, B.C. 1122, 기묘
그렇게 적어놓은 것이 세대가 오래 내려갈수록 그 이야기가 굳어져서,
나중에는 그 당시에도 그렇게 불렀던 것처럼 굳어지게 되었다ㅡ는게, 안정복 노인네의 주장이다.
대개 《삼국유사(三國遺事)》란 고려의 중[僧]이 지은 것이요, 《고기》 또한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으나 신라 이속(俚俗)의 호칭에서 나와 고려 때 이루어졌으니, 역시 중의 편집일 것이다. 그러므로 허황한 말을 부질없이 많이 하여 그 인명ㆍ지명이 불경(佛經)에서 많이 나왔다. 여기에 이른 '환인제석' 역시 《법화경》에서 나왔는가 하면, 기타 이른바 아란불(阿蘭佛)ㆍ가섭원(迦葉原)ㆍ다바라국(多婆羅國)ㆍ아유타국(阿踰陁國)의 따위가 모두 중의 말이다. 신라ㆍ고려 시대에는 불교를 존숭하였기 때문에 그 폐단이 이와 같은 데까지 이르렀다. 역사를 쓰는 사람이 그 기록할 만한 사실이 없음을 민망하게 여겨서 심지어는 이같은 것을 정사에 엮어, 한 구역 어진 나라를 모두 괴이한 무리로 만들었으니 너무나 애석한 일이다.
<동사강목> 부록 상권 중(中), 괴설변증(怪說辨證)
하긴 그것 때문에 우리가 엄청나게 피를 본것이,
단군의 이야기만 해도 우리 나라에서는 13세기《삼국유사(三國遺事)》에 가장 먼저 실려서 전하고 있는데,
이걸 지은 일연은 고려의 불교승이다. 그가 참조한《고기(古記)》 또한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불교가 수용된 이후에 지어졌을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서 이 일연이란 이 망할 땡중이,
환인을 덥석 '제석천'이라고 적어놓은 것이다.
(실제로 이때문에 1930년대 일본 식민사학자들은 단군을 13세기 승도들의 날조라고까지 몰아붙였고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제석천이란 곧 샤크라데벤데라, 즉 불교의 신인 석제환인다라(釋帝桓因陀羅)의 준말인데,
단군이 존재했던 기원전 2333년엔 우리나라에선 그런 이름을 듣지도 못했다.
그런데 왜 그가 갑자기 단군의 할아버지가 됐느냐고?
간단하다, 일연이라는 이 땡중이 아무 것도 모르고서
그냥 《고기》에 환인(桓因)이라고 있는 단어를 보고 이건 제석천인가 싶어서
아무렇게나 무책임하게 끼워맞춰버린거지 뭐.
고대의 환인은 곧 하늘의 제석천(불교의 신)이시다. 이런 식으로.
이걸 두고 식민사학자나 왜놈 쪽발이들이 '승도들의 날조'어쩌고하면서
단군을 신화상의 인물로 치부해버렸던 쓰디쓴 전례가 우리에게 있는 게다.
그러게 사료를 택할 때 판단을 잘 해서 적어야지 자칫했다간 낭패보는 일이 부지기수인거다.
안정복 영감을 괜히, '5백년을 역사 한 가지에만 노력한 빈한한 선비'라고 단재 선생이 칭찬한 게 아니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쳐도, '아란불'이나 '가섭원' 같은 단어들이 가리키는 부여의 재상이나 동부여의 수도,
그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고 단지 글자를 승려들의 잣대로 비슷한 발음의 한자를 고쳐놓은 것에 불과하기에,
불교 승려들이 바꿔서 적기 이전의 '아란불'과 '가섭원'의 원래 이름을
정작 부여 시대에는 어떻게 불렀는지 알 길이 막막하다.
이때 옮긴 동부여의 수도 가섭원의 위치에 대해서,
조선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아방강역고》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북부여 지역은 동쪽으로 4천리 쯤 가면 큰 바다에 닿는데<영고탑에서 동쪽으로 바다까지는 3천리가 된다>, 땅이 거칠고 날씨가 추워 사람이 살수 없으므로,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아직 마을이 없다. 어찌 오곡이 있겠는가? 아란불이 말한 동해 바닷가라는 것은 마땅히 함흥 이남의 바닷가에서 찾아야지 딴 곳에서는 찾을 수 없다. 또한 살펴보건대 가섭원은 하슬(何瑟), 하서(河西)와 그 소리가 서로 가까우니<우리나라 고음(古音)은 대개 '하(何)'를 '가(迦)'와 같이 읽는다> 가섭원은 지금의 강릉이다. 동해 바닷가의 땅이 오곡이 나오기 마땅한 곳이 강릉이 아니고 어디를 생각하랴? 《한서》나 《위지》에서는 개마의 고개 동쪽 사람을 모두 예인(濊人)이라 일컫는다. 예의 영토의 위치를 논하면서 늘상 강릉과 서로 연접했다고 하고 강릉을 예라고 한 것은 강릉이 옛날에 예왕이 도읍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강릉이 예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이때문이 아니랴?
<아방강역고> 권제5, 예맥고(濊貊考)
이러한 정약용의 '가섭원=강릉설'은, 훗날 단재 선생에 의해 부정된다.
단재 선생은 《아방강역고》에 대해 '더 크지도 작지도 말라고 한 압록강 이내의 이상적 강역을 획정하려' 했다고
비판했다. 원래는 만주에 있어야 할 지명들을 우리 나라로 옮겨왔다는 것인데
(단재 선생은 그것을 '귀신도 못하는 땅 옮기기'라고 비판했다지.)
내가 읽어보기에 그건 아니라고 본다.
단재 선생은 가섭원은 《삼국사》에서 말하는 '갈사국'과 동일지명이라고 주장하며,
그곳을 지금의 중국 길림성 훈춘이라고 했다.
해부루가 갈사나ㅡ지금의 훈춘(渾春)에 천도하여 동부여가 되었음을 앞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갈사나란 무엇인가? 우리 옛말에 숲을 '갓' 혹은 '가시'라 하였는데, 고대에 지금의 함경도와 만주 길림의 동북부와 소련 연해주의 남쪽 끝에 나무가 울창하여 수천 리 끝이 없는 대삼림의 바다를 이루고 있어 이 지역을 '가시라'라 일컬었으니, '가시라'란 삼림국(森林國)이라는 뜻이다. '가시라'를 이두문으로 갈사국(曷思國) · 가슬라(加瑟羅) · 가서라(迦西羅) · 아서량(阿西良) 등으로 적는데, 이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지리지에 보인 것이고, 또 혹 '가섭원기(迦葉原記)'라고도 하였으니, 이는 대각국사(大覺國師)의 《삼국사(三國史)》에 보인 것이다.
지나사에서는 '가시라'를 `옥저(沃沮)'라고 적었는데,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의하면 옥저는 '와지'의 번역이고, '와지'는 만주어의 '숲'이니, 예(濊) 곧 읍루(輯婁)는 만주족의 선조요, 읍루가 당시 조선 열국 중 말[言]이 홀로 달라서 《삼국지》나 《북사》에 특기하였으니, 우리의 '가시라'를 예족(濊族)은 '와지'라 불렀으므로 지나인들은 예어를 번역하여 옥저라고 한 것이다. 두만강 이북을 북갈사(北曷思)라 일컫고, 이남을 남갈사(南曷思)라 일컬었는데, 북갈사는 곧 북옥저(北沃沮)요, 남갈사는 곧 남옥저(南沃沮)이니 지금의 함경도는 남옥저에 해당된다.
고사에 남 · 북 옥저를 다 땅이 기름지고 아름답다고 하였으나, 지금의 함경도는 메마른 땅이니, 혹 옛날과 지금의 토질이 달랐던 것이 아닌가 한다. 두 '가시라'의 인민들이 순박하고 부지런하여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고 여자가 다 아름다우므로, 부여나 고구려의 호민(豪民)들이 이를 착취하여 어물과 농산물을 천 리 먼 길에 갖다 바치게 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뽑아다가 비첩(婢妾)을 삼았다고 한다.
해부루가 북 '가시라'ㅡ지금의 훈춘으로 옮겨가 동부여가 되어, 아들 금와를 거쳐 손자 대소(帶素)에 이르러 대소가 고구려 대주류왕(大朱留王)에게 패하여 죽고, 아우 아무개 갑[某甲]과 종제(從弟) 아무개 을[某乙]이 나라를 다투어 아무개 을은 구도(舊都)에 웅거하여 북갈사(北曷思) 혹은 남동부여(南東扶餘)라 하였는데, 그 자세한 것은 다음 장에서 말하려니와 지금까지의 학자들이,
a) 동부여가 나뉘어 북동 ·남동의 두 부여로 되었음을 모르고 한 개의 동부여만 기록하고,
b) 옥저가 곧 갈사(曷思)임을 모르고 옥저 이외에서 갈사를 찾으려 하고,
c) 북동 ·남 동의 두 갈사가 곧 남 ·북의 두 갈사(兩加瑟羅)요, 남북의 두 갈사가 곧 남북의 두 옥저임을 모르고 부여 ·갈사 ·옥저를 각각 다른 세 지방 으로 나누고,
d) 강릉(江陵)을 '가시라'ㅡ가슬라(加瑟那)라 함을 신라 경덕왕이 북쪽 땅을 잃은 뒤에 옮겨 설치한 고적인 줄을 모르고 드디어 가슬라가 동부여의 옛 서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지리가 문란하고 사실이 흔란해져서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었거니와, 이제 갈사(曷思) · 가슬(加瑟) · 가섭(迦葉)이 이두문으로 다 같이 '가시라'임 을 알고, 대소의 아우 모갑과 그 종제 모을이 나뉘어 있는 두 '가시라'의 위치를 찾아서 두 '가시라'가 곧 남 · 북 옥저임을 알고, 추모왕이 동부여에서 고구려로 올 때에 '남으로 달아났다(南奔).'는 말과, 주류왕(朱留王)이 고구려에서 동부여를 칠 때에, '북쪽을 쳤다(北伐).'는 말로써 북 '가시라'의 위치를 알아서 위와 같이 정리하였다.
그럼 뭐야, 하슬라는 지금의 두만강 북쪽의 동간도와 함경도에 있었고, 원래 부여의 가섭원이고,
나중에 갈사국이 되었고, 신라에서 거기에다가 하슬라주를 설치했다는 거야?
지증왕이 우산국 정벌할 때에 정벌 총사령관이었던 이사부는 하슬라주 군주라고 했는데,
이사부는 그럼 지금의 연변을 '하슬라주'로서 다스렸다고?
이걸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되는 거냐 참. 골치아프다.
[後其相阿蘭弗曰, “日者天降我曰, ‘將使吾子孫立國於此. 汝其避之. 東海之濱有地, 號曰迦葉原. 土壤膏腴宜五穀, 可都也.’” 阿蘭弗遂勸王, 移都於彼. 國號東扶餘, 其舊都有人, 不知所從來, 自稱天帝子解慕漱, 來都焉. 及解夫婁薨, ]
뒤에 재상 아란불(阿蘭弗)이 말하였다.
“일전에 하느님이 내게 내려와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다. 너희는 피하거라.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땅이 있는데, 토양이 비옥하여 오곡(五穀)이 잘 자라니 도읍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아란불이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나라 이름을 동부여(東扶餘)라고 하였다. 옛 도읍지에는 어디로부터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와서 도읍하였다.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동명성왕 즉위전기
여기까지 오면서 한가지 눈치채지 못하셨는가?
그것은 고구려 건국왕의 이야기를 하면서 부여의 역사를 간략히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사적인 의미에서 부여와 고구려는 서로 떼놓을 수 없는 불가결의 관계다.
주몽은 부여에서 태어나 부여의 이름을 얻어 부여에서 살다가 남쪽으로 와서 고구려를 세웠고,
그의 어머니 유화 부인은 고구려에서 '부여신(扶餘神)'이라는 이름으로 신으로 추앙받았다.
그리고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와 따로 나라를 세운 백제는 한때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바꾼 적도 있었다. 백제 성왕 16년(538)의 일이다.
부여가 멸망한 것은 기록상 494년의 일이다. 그리고 성왕은 그 부여 멸망 이후
백년이 지난 뒤의 사람인데, 부여의 이름을 알고 국호를 남부여라 고쳤다는 것은
백제에서도 자신들의 뿌리를 부여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고구려가 멸망하고(668년) 30년 후에 세워진 발해(698~926)의 2대 황제인 무왕이
당시 일본의 수도였던 헤이죠(平城)에 보낸 국서가 《속일본기》라는 책에
발해국서라는 이름으로 실려 전하는데, 그 내용에 이런 대목이 있다.
[復高麗之舊居有扶餘之遺俗]
(발해는)고려(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였고, 부여의 전통을 간직하였다.
우리는 흔히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발해는 외국에 보내는 국서에, 자신들이 계승한 고구려뿐 아니라
고구려 바로 이전의 부여까지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발해가 고구려 이전의 부여라는 나라에 대해 알고 있었고,
자신들의 풍습이 부여족의 풍습을 간직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증거다.
그렇게 따지면 한민족의 역사는 고조선에서 시작해 부여-고구려-발해(고려)로 이어지는
역사 체계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고구려의 이야기에 왜 부여의 이야기가 등장한 것일까?
그 점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고 있지 않기 때문에, 좀더 자세한 자료를 찾은 뒤 설명할까 한다.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보자.
初從空中下 처음에 공중에서 내려오는데
身乘五龍軌 몸소 오룡거 타고 오시니
從子百餘人 종자 백여 사람은 고니를 타도다
騎鵠紛○○ 펄럭거리는 날개
淸樂動鏘洋 맑은 음악소리는 장양히 울려 퍼지고
彩雲浮○○ 오색구름[彩雲] 너울거리도다
[漢神雀三年壬戌歲. 天帝遣太子降遊扶余王古都. 號解慕漱. 從天而下. 乘五龍車. 從者百餘人. 皆騎白鵠. 彩雲浮於上. 音樂動雲中. 止熊心山. 經十餘日始下. 首戴烏羽之冠. 腰帶龍光之劍.]
한(漢) 신작(神雀) 3년 임술에 천제가 태자를 보내어 부여왕의 옛 도읍에 내려와 놀게 하였는데, (그를) 해모수라 불렀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데 오룡거를 타고 종자는 1백여 명이었으며 모두 흰 고니를 타고 있었다. 오색구름이 위에 뜨고 음악이 구름 가운데 울려 퍼졌다. 웅심산에 머물며 열흘 정도 지내다가 처음으로 내려왔다. 머리에는 까마귀 깃털을 꽂은 관[鳥羽之冠]을 쓰고 허리에는 용광검을 찼다.
<동명왕편> 서장
《삼국사》의 기록에는 없는, 해모수의 강림(降臨)을 묘사한 기록이다.
아마 《구삼국사》에 실려있던 기록을, 김부식이 《삼국사》를 지으면서 너무 황당한 기록이라는
생각을 하고 그것을 지워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규보는 주몽의 영웅적인 업적을 노래하고자
《구삼국사》에 기록된 그 장엄한 장면을 자신의 대서사시 《동명왕편》에 삽입했을 것이다.
환웅은 풍백에 우사, 운사, 환인이 내려주신 천부인 세 개에다
옵션으로 이끄는 부하 3천 명까지 줄줄이 이끌고 태백산에 내려왔는데,
그거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겠네 그래.
그러고보니, 천제가 태자를 보내어ㅡ라는 대목은,
어디선가 많이 본 대목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렇다. 단군이다.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나라를 세울 때의 내용이다.
환웅도 살기 좋은 동방에 내려가 나라를 세우려 했고,
환인이 허락해서 천부인 세 개를 주어 환웅을 동방의 땅에 가서 나라를 세우기를 허락하였다.
단군설화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동명왕의 설화에서 이렇게 단군설화의 내용이 부분적으로 나온 것은,
단군설화의 '천손강림(天孫降臨: 하늘의 자손이 내려와 나라를 세움)'이라는 모티브에 의해서다.
고구려 건국신화가 어느 정도 고조선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동명왕설화를 이루는 또다른 뼈대인 '난생(卵生: 알에서 태어남)'의 모티브는
나중에 주몽의 성장과정을 이야기하면서 설명하기로 한다.
自古受命君 자고로 천명을 받은 임금이란
何是非天賜 어찌 하늘이 내신 것 아니겠냐마는
白日下靑冥 대낮에 하늘[靑冥]에서 내려옴은
從昔所未視 일찌기 보지 못한 것
朝居人世中 아침에는 인간 세상에 살고
暮反天宮裡 저녁에는 천궁으로 돌아가네
[朝則聽事, 暮卽升天, 世謂之天王郞.]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저녁에는 하늘로 오르니, 세속에서 천왕랑이라 불렀다.
<동명왕편> 병서
말이 필요없다...... 이건 세살 먹은 꼬마도 안 믿을 완벽한 오리지날 허구다.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오다니, 지금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믿으려 하겠는가?
필자로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이야기는 후세에 남겨서는 안된다고 말한 김부식이라는 자가
갑자기 내심 존경스럽게(?)느껴질 따름이다.
하지만 《동명왕편》이 씌여진 취지를 생각할 때, 이 내용을 그저 허구라고 해서
무시하거나 흘려버릴 수는 없다.(그렇다고 다 믿는 것은 아니다)
《동명왕편》은 엄연한 영웅서사시다. 한 인물에 대한 찬양과 경탄을 담고 있는 것이기에,
약간의(?)허구와 과장이 첨가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당연한 결과다.
(조선 태조의 개국을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생각합시다)
더구나 주몽의 업적을 찬양하고 고구려의 전통을 노래하며
'천하 사방이 이 나라가 성인의 도읍임을 알게 하리라'하던 이규보 선생의 말씀을 생각한다면,
《동명왕편》의 이 거짓말같은 이야기에 더 이상 토를 달지 말자.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吾聞於古人 내 옛 사람에게 들으니
蒼穹之去地 하늘에서 땅까지의 거리[去]란
二億萬八千 2억만 8천 하고도
七百八十里 7백 80리라
梯棧躡難升 사다리 놓고도 오르기 어렵고
羽翮飛易瘁 날개로 날아도 쉽게 지치거늘
朝夕恣升降 아침저녁 마음대로[恣] 오르내리니
此理復何爾 그런 이치가 어디 있으랴
<동명왕편> 서장(序章)
하늘과 땅의 사이가 2억만 8천 7백 80리라는 것은 엄청난 과장이다.
그런 멀고 먼 거리를 사닥다리와 새를 들어서,
하늘과 땅의 거리란 사람이나 미물은 감히 엄두도 못 낼 먼 거리라는 것을 강조하고,
아울러 그런 거리를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와 함께 아침저녁으로 제집 드나들듯 하는
해모수의 신성함을 부각시킨다. 또한 그런 것을 통해 신비함이 더욱 고조된다.
城北有靑河 성의 북쪽에 청하가 있어
<靑河, 今鴨綠江也.> <청하(靑河)는 지금의 압록강(鴨綠江)이다.>
河伯三女美 하백의 세 딸이 아름다웠다.
[長曰柳花, 次曰萱花, 季曰葦花.]
맏딸은 유화(柳花), 둘째는 훤화(萱花), 막내는 위화(葦花)였다.
<동명왕편> 서장(序章)
이름 이쁘다. 버들꽃, 원추리꽃, 그리고 갈대꽃.
물가를 다스리는 신의 딸 답게, 이름까지 물과 관련해서 짓는구나.
사냥과 목축을 업으로 삼아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던 사람들이 '농경'이라는 것을 시작하면서부터,
바람을 불어 구름을 옮기고, 비를 내리게 하는 '하늘'과 함께
척박한 땅을 기름지게 만드는 '물'이 가득한 저 '강'의 신에게도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고,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하기 시작했다.
擘出鴨頭波 압록강의 파도[頭波]를 헤치고 나와
往遊熊心○ 웅심의 물가에 가서 노니는데
[自靑河, 出遊熊心淵上.]
청하에서 나와서 웅심연 위에서 놀았다.
鏘琅佩玉鳴 찰그랑[鏘琅]하는 옥소리
綽約顔花媚 가냘픈 맵시가 아름답구나
[神姿艶麗. 雜佩鏘洋. 與漢皐無異]
신령스러운 자태가 곱고 고왔으며 섞인 옥소리가 울려 퍼지니 한고(漢皐: 옛날 선녀들이 놀던 자리)와 다름없었다.
<동명왕편> 서장(序章)
<단둥에서 바라본 압록강. 조선조까지 이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하백에게 제사를 지냈다.>
안정복 영감은 하백이 군장의 이름이라 했고, 단재 선생은 《동명왕편》에서 말한 청하는 지금의 송화강이라고 했다.
단재의 말에 따르면 청하, 즉 압록수(압록강)이라 불리는 강은 원래 다섯 곳이 있었다.
원(原)압록강은 지금의 송화강으로 곧 옛날 단군께서 나라를 세우신 곳에 있는 강이고,
여기서 남쪽으로 내려가서 고구려인들이 부른 요하가 제2압록강이며,
지금 우리나라와 중국의 국경을 삼고 있는 압록강은 제3압록강에 속한다.
훗날 고구려가 서쪽으로 더 영토를 넓혔을 때 북경 근교 난하(灤河)를 가리켜 또 압록강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제4압록강이고,
광개토태왕이 백제를 치러 남쪽으로 내려가서 마주친 강, '욱리하'라고도 불린 아리수 즉 지금의 한강이 제5압록강,
마지막으로 신라에서 아시량이니, 아례나리하니 하던 낙동강이 제6압록강이다.(헥헥)
국경에 있는 강은 모조리 싸잡아서 압록수라고 불렀던가 싶기도 하고,
단재 선생의 말대로 중국 기록에 '열수'라는 강은 모두 압록강을 가리킨 것이란 말이 맞는 건가 싶기도 한데
아무튼 저 시대에는 압록강이라 불리는 강이 하나둘이 아니었다는 것.
조선 후기의 실학자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압록강을 건너는 사신이나 상인들은 모두 압록강에 이르러
하백에게 제사를 지낸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박지원이 건넜던 강이 바로 지금의 압록강이었다.
하백이 주관하는 청하라는 강이 지금의 압록강이 되었고, 이 강을 건너면서
강물의 신인 하백에게 제사를 지내던 전통(고구려 때부터인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고,
압록강을 건너 청으로 향하던 박지원이 그것을 보고 자신의 저서인 《열하일기》에 남긴 것은 아닐까 한다.
훗날 만주족이 청을 세우고 그들 조상신화를 만들면서,
고구려 건국신화를 많이 참조했다지 아마.
初疑漢皐濱 처음에는 한고(漢皐)의 물가인가 했는데
復想洛水沚 다시 보니 낙수(洛水)의 물가로다.
王因出獵見 왕이 사냥을 나가서 보고
目送頗留意 눈길에 자못 뜻을 담아 보내니
玆非悅紛華 곱고 아름다움이 좋은 것이 아니라
誠急生斷嗣 실은 대를 잇는 것이 급함이로다.
[王謂左右曰 "得而爲妃, 可有後○."]
왕이 좌우에 말하기를
"얻어서 비를 삼으면 후사를 얻을 수 있겠구나."
하였다.
<동명왕편> 서장(序章)
아들 얻으려고 여자를 납치한다.
요즘 여자들이 보면 정말 손가락질 받을 대죄다.
원시 사회에나 나타날법한 약탈결혼의 방식이, 동명왕의 건국서사시에 드러나다니.
여담인데 발해에도 이런 약탈혼 방식이 존재했었다고 한다.
금(金)의 역사를 다룬 《금사》 대정(大定) 17년, 금 명종 7년(1177)조에,
남녀가 혼인을 하는데에 대부분 예의를 따르지 않고 반드시 먼저 약탈하여 도망쳤던
발해의 옛 풍속을 금지시켰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대개 이런 약탈식 혼인법은 무척 야만적이고 편파적인 혼인방식으로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무척 천박한 짓이긴 하지만,
따지고보면 아주 오랜 옛날부터 남자가 여자를 훔쳐서 도망가는 것은
어느 한쪽(대부분 남자)의 일방통행도 있지만 실은 양방통행으로
이미 얘기 다 끝난 상태에서 훔쳐가는 형식(?)만 갖추는,
이른바 짜고 치는 고스톱(점잖게는 야반도주)도 있다. 계속 이야기해보자.
三女見君來 세 여자가 왕이 오는 것을 보고
入水尋相避 물 속 깊이 들어가 서로 피하매
擬將作宮殿 왕께선 짐짓 궁전을 지으셨다
潛候同來戱 함께 와서 놀기를 몰래 기다리려
馬撾一畫地 말채찍으로 땅 한번 그으시니
銅室欻然峙 구리 집 홀연히 솟았다.
錦席鋪絢明 현란히 비단을 펼치고
金罇置淳旨 금술독에는 순한 술[淳旨]을 두었더니
○○果自入 과연 춤을 추며 스스로 들어와
對酌還徑醉 서로 마시고 곧 취하였다네.
[基女見王卽入水. 左右曰. 大王何不作宮殿. 俟女入室. 當戶遮之. 王以爲然. 以馬鞭○地. 銅室俄成壯麗. 於室中. 設三席置樽酒. 其女各坐其席. 相勸飮酒大醉云云].
<그 여자들이 왕을 보고 곧 물로 들어갔다. 좌우에서 말하기를
"대왕은 어찌하여 궁전을 지어서 여자가 방에 들어가기를 기다려 문을 막아버리지 않으십니까?"
하므로 왕이 그렇게 여겨 말채찍으로 땅을 그으니 구리 집이 갑자기 이루어져 장려하였다. 집 가운데 세 자리를 베풀어 술자리를 두었다. 그 여자들이 각기 그 자리에 앉아 서로 권하여 술을 마시니 크게 취하였다.>
王時出橫遮 왕이 그때 나가 가로막으니
驚走僅顚躓 놀라 달아나다 미끄러져 자빠졌다
[王俟三女大醉急出. 庶女等驚走, 長女柳花, 爲王所止.]
<왕이 세 여자가 크게 취할 것을 기다려 급히 나가 막았다. 여자들이 놀라 달아나다가 맏딸 유화가 왕에게 붙잡혔다.>
長女曰柳花 맏딸이 유화인데
是爲王所止 이 여자가 왕에게 붙잡혔다네
河伯大怒嗔 하백이 크게 노하여
遣使急且駛 사자를 시켜 급히 달려가서
告云渠何人 "고하노니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乃敢放輕肆 감히 경솔하고 방자한 짓을 하는가?"
報云天帝子 회보하노니 "나는 천제의 아들이라
高族請相累 높은 집안[高族]과 서로 혼인하기 청하나이다."
指天降龍馭 하늘을 가리키자 용수레가 내려오니
徑到海宮邃 그대로 깊은 해궁에 이르도다.
[河伯大怒, 遣使告曰 "汝是何人, 留我女乎?" 王報云 "我是天帝之子, 今欲與河伯結婚." 河伯又使告曰 "汝若天帝之子, 於我有求昏者, 當使媒云云, 今輒留我女, 何其失禮?" 王慙之, 將往見河伯, 不能入室. 欲放其女, 女間與王定情, 不肯離去. 乃勸王曰 "如有龍車, 可到河伯之國." 王指天而告, 俄而五龍車從空而下. 王與女乘車, 風雲忽起, 至其宮.]
<하백(河伯)이 크게 노하여 사자를 보내어 고하기를,
“네놈은 어떤 놈이길래 내 딸을 잡아 두느냐?”
하였다. 왕(해모수)이 회보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인데 지금 하백에게 구혼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하백이 또 사자를 보내어 고하기를,
“네놈이 정말 천제의 아들이고 내게 구혼할 생각이 있으면 마땅히 중매를 시켜 말할 것이지, 이렇게 갑자기 내 딸을 붙잡아 두다니, 어찌 그리도 버릇이 없느냐?”
하였다. 왕이 부끄러워하며 하백을 뵈려 했으나 궁실에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 여자를 놓아 보내려 했는데, 그 여자가 이미 왕과 정이 들어서 떠나려 하지 않으면서 왕에게 권하기를,
“용거(龍車)가 있으면 하백의 나라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였다. 왕이 하늘을 가리켜 고하니, 조금 뒤에 오룡거(五龍車)가 공중에서 내려왔다. 왕이 여자와 함께 수레를 타니 풍운이 홀연히 일어나며 하백의 궁에 이르렀다.>
<동명왕편> 서장(序章)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게 있지.... 아마?
인질이 인질범들에게 동화되어 그들에게 동조하는 비이성적 현상을 가리키는 범죄심리학 용어인데,
지금 유화가 그렇게 되었다. 분명 그녀는 납치당했을텐데,
하백이 돌려보내라고 말했고 해모수 자신도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해모수에게 빠져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한다.
더구나 하늘의 사람인 해모수는 하백의 궁이 있는 청하의 용궁으로 들어갈수 없는 것을 알고
그에게 하백궁까지 들어갈 방법을 알려주기도 한다.
이게 무슨 당황스런 시츄에이션인지 참.
河伯乃謂王 하백이 왕에게 이르기를
婚姻是大事 혼인은 중대한 일[大事]이라
媒贄有通法 중매와 폐백의 법이 있거늘
胡奈得自恣 어째서 방자한 짓을 하느뇨.
[河伯備禮迎之. 坐定. 謂曰. 婚姻之道. 天下之通規. 何爲失禮. 辱我門宗云云.]
<하백이 예를 갖추어 맞아 좌정한 뒤에 이르기를,
“혼인의 도는 천하의 공통된 법규인데 어찌하여 실례되는 일을 해서 내 가문을 욕되게 하는가?”
하였다.>
<동명왕편> 서장(序章)
이런 식으로 해서 결국 해모수는 유화와 맺어지고,
좋든 싫든 유화는 해모수의 여자가 된다.
그리고 졸지에 딸을 빼앗긴 하백은 엄청 대노해서 해모수를 잡아오라고 이른다.
그러나 상대는 하늘나라 천제의 태자다.
겨우 동방의 강 하나나 다스리고 있는 자신에 비하면, 해모수는 확실한 빽그라운드가 있고,
천제의 태자인 이상 천제가 죽으면 해모수가 천제가 될 수도 있다.
해모수에게 딸을 주고, 만약 해모수가 천제가 되면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 아닌가.
君是上帝胤 그대가 상제의 아들이라면
神變請可試 신이한 변화를 청해 시험해보자구나.
漣○碧波中 잔물결이 물결치는 속에서
河伯化作鯉 하백이 잉어가 되니
王尋變爲獺 왕께서 곧 수달로 변하사
立捕不待○ 반 발짝도 못 되어 곧 잡아버렸다.
又復生兩翼 또 다시 양날개가 생겨
翩然化爲雉 꿩이 되어 날아가니
王又化神鷹 왕이 또한 신령스러운 매로 변하사
搏擊何大○ 어찌 그토록 사납게 잡아치시나.
彼爲鹿而走 저쪽이 사슴이 되어 달아나면
我爲豺而進 이쪽은 승냥이가 되어 쫓아갔도다.
<동명왕편> 서장(序章)
의도된 연출인가. 장인과 사윗감이 서로 대결을 벌인다.
장인이 사윗감에게 '딸을 데려가고 싶으면 네가 가진 능력을 보여봐!'라고 엄포를 주는 것은
일종의 신랑다루기다. 왜 그 있잖아. 우리나라 전통 혼인에서 혼인 끝나고 신랑이 신부 집에 가면,
신랑 친척이나 친구들이 잡아다 발 동동 묶어갖고 발바닥 때리면서 형수님 노래 한 곡 해주세요,
형수님 춤 한번 춰보세요 하고 짖궃게 막 질문하고, 우리 누나 훔쳐가놓고 어딜 왔어,
여긴 또 뭐 훔쳐먹으러 왔어 하고 평소 쌓인 것 다 풀면서 신랑이 조금만 어물어물하면
가차없이 때려. 그러면 신부가 그러지 마세요 하면서 술상 차려서 내오고,
그거 받고 못 이기는 척 신랑 풀어 주고 다같이 즐기면서,
이제부터는 너도 어른이다 하고 덕담 해주고 잘 살라고 축복해주는 거다.
왜 요즘에 그 반듯하게 혼인하는데도 장인어른이나 장모님이,
자기 사위보고 '딸 도둑놈' 이러잖아. 자식놈 키워봤자 소용없다고.
이게 옛날에는 남녀가 몰래 작당하고 같이 멀리 도망쳐서 사는 식으로 혼인하고 했는데,
그러던 것이 점차 반듯하게 신랑 쪽에서 마담뚜 보내서 혼인합시다 하고 청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거창하게 말하면 '약탈혼'에서 '중매혼'의 방식으로 넘어가게 되는 건데,
봉건시대에 최고의 '재산'으로 분류되었던 '여자'를 도둑놈처럼 그냥 훔쳐가는 게 아니라
남자 쪽에서 무슨 대가를 치르고 '사가는' 거다. 속되게 표현하면 그런 건데 고구려의 경우에는
술하고 돼지고기, 그리고 혼인하는 남자의 '노동력'을
남자가 여자를 데려가는 '대가'로 처갓댁에다 지불을 했다.
그래도 여자 쪽에서는 남자 쪽에 여자를 '뺏긴다'는 느낌을 영 못 지우겠거든.
아무리 그래도 지금까지 키우느라 들어간 돈이 얼마고 쌀이 얼마인데
(딸 키우려면 아들보다 돈이 좀 든다잖수)
기껏 술, 돼지고기만 갖고 되겠어? 막말로 자식 태어나서 자랄 때까지 일해준다고 해도
결국 딸을 데려가는 것은 똑같은 건데 부모 쪽에서는 차라리 그 노동력 안 받고,
술 돼지고기 다 안 받고 그냥 딸 안 주는게 더 낫지 뭐.
그러다 보니까 신부쪽에서 신부를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훔쳐가는' 신랑이
못내 미워서, 보내는 김에 한번 괴롭히기나 실컷 괴롭히자고 저런 걸 하게 된 거다.
그놈의 신랑다루기 한번 거창하기도 하지.
하늘의 태자와 물의 신이 둔갑술로 대결을 벌여, 승리는 하늘의 태자 해모수에게 돌아간다.
河伯知有神 하백은 신이함이 있음을 알고
置酒相燕喜 술자리를 벌려 서로 기뻐하고.
伺醉載革輿 취한 틈을 엿보아 가죽수레에 실어
幷置女於○ 딸도 수레 옆에 두었다네.
<車傍曰○> <수레의 옆을 '의'라 한다.>
意令與其女 속으로 생각키로[意]
天上同騰○ 딸과 함께 천상에 오르게 하리라 하더니
其車未出水 그 수레가 물 밖으로 나오기 전에
酒醒忽驚起 술이 깨어 홀연히 놀라 일어나
<河伯之酒七日乃醒> <하백의 술은 이레가 지나야 깬다.>
取女黃金○ 여자의 황금 비녀를 가지고
剌革從竅出 가죽을 찢어 구멍으로부터 나와서
<犀韻> <出은 협운이다.>
獨乘赤○上 홀로 노을 위에 타고 올랐다.
寂寞不廻騎. 고요하고 쓸쓸히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동명왕편> 서장(序章)
하백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사윗감을 술에 취하게 해서, 딸과 함께 자루에 넣고 수레에 묶어 하늘로 보낸다?
아무래도 하백은 두려웠던 것 같다.
땅의 강신일 뿐인 자신의 딸을 천제가 좋아할 리가 없고, 또 이렇게 갈데까지 다 가놓고(?)
이제 와서 나몰라라 하고 해모수가 휙 도망쳐버리면, 자신의 체면은 물론
딸의 몸까지 망치는 꼴이 아닌가.
그런 생각으로 결단을 내렸고, 그것이란 사위인 해모수를 술에 취하게 해서 딸과 함께 두어 보내는 것.
(가문의 영광이라는 영화를 보시면 대충은 아실것임.)
일단 천상에만 가면 그걸로 딸인 유화도 불행 끝 행복 시작이지 않느냐. 제 딸자식 위하는데 아버지가 이 정도도 못해주랴.
[河伯曰 "王是天帝之子, 有何神異?" 王曰 "唯在所試." 於是, 河伯於庭前水, 化爲鯉, 隨浪而游, 王化爲獺而捕之. 河伯又化爲鹿而走, 王化爲豺逐之, 河伯化爲雉, 王化爲鷹擊之. 河伯以爲誠是天帝之子, 以禮成婚. 恐王無將女之心, 張樂置酒, 勸王大醉, 與女入於小革輿中, 載以龍車, 欲令升天. 其車未出水, 王卽酒醒, 取女黃金釵刺革輿, 從孔獨出升天.]
하백이 말하였다.
“왕이 천제(天帝)의 아들이라면 무슨 신통하고 이상한 재주가 있는가?”
“뭐든 시험해 보시지요.”
이에 하백이 뜰 앞의 물에서 잉어로 변신해 물결을 따라 노니니 왕이 수달로 변해서 잡았다. 하백이 또 사슴으로 변해서 달아나니 왕이 승냥이로 변신해 쫓고, 하백이 꿩으로 변신하니 왕은 매로 변했다. 하백은 참으로 천제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여 예로 혼인을 이루었다. 왕이 딸을 데려갈 마음이 없을까 두려워하여 풍악을 베풀고 술을 내어 왕을 권하여 크게 취하자 딸과 함께 작은 가죽 수레에 넣어 용거(龍車)에 실으니 이는 하늘에 오르게 하려 함이었다. 그 수레가 미처 물에서 나오기 전에 왕이 술이 깨어 여자의 황금비녀로 가죽 수레를 뚫고 구멍으로 홀로 나와서 하늘로 올라갔다.
<동명왕편> 서장(序章)
이렇게 해서 일단 해모수는 술에 취했고,
그러나 어찌하랴. 영화와 현실은 차이가 있는 것을.
해모수는 무정하게도 유화의 비녀로 자루를 찢고, 유화를 남겨두고 혼자 하늘로 가버린다.
일단 받을 것(?) 다 받았으니 이제 볼일 없다는 식이었을까.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하백은 정말 돌아버릴 것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소중한 딸은 어디서 나타난 웬 뜬금없는 놈한테 정조를 빼앗겼고,
그 파렴치한 놈(해모수)은 딸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나몰라라 냅다 튀어버렸고.
무엇보다 천제의 사돈이 될 기회를 놓쳐버렸으니 하백은 진짜 속터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하백보다도 더 괴로운 것은 정작 버림받은 유화였다.
동명왕편의 유화가 느꼈던, 해모수가 떠나버린 '고요하고 쓸쓸한'느낌.
마치 남자에게 실연당한 여자처럼 쓸쓸한 마음 지울 길 없다.
처음에는 납치당해 강제로 감금되었다가, 떠나고 나서는 쓸쓸한 감정을 느낀다?
그 사이에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뜻인가?
여자 마음 갈대라더니, 자신을 가둔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세상에 이처럼 멋진(?) 러브 환타지 스토리의 소재가 또 있을까?
아마도, 남모르게 잡혀있는 동안에 정이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납치한 해모수라는 남자에게 끌려,
마침내는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스톡홀름 증후군이란 건 참 황당한 심리표현이다.
사람 마음이라는 건 참으로 알수없는 것ㅡ
그러나ㅡ신화 속 모든 여자들이 그러하듯, 유화도 결국은 버림받았다.
그리고 사랑하던 남자에게 배반당한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유화는 또다른 시련을 맞는다.
해모수와 유화가 만나서 로맨틱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국문학적으로 의미가 아주 깊다.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물의 신 하백의 딸 유화가 서로 만난 것은,
하늘과 땅이 서로 만났음을 의미한다.
하늘을 대표하는 해모수와 물을 대표하는 유화가 만남으로서
양(陽)인 하늘과 음(陰)인 물의 조화가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주몽이라는 영웅이 태어나게 되는 일련의 복선 구실을 하는 것이다.
《동명왕편》은 주몽의 이야기를 시로 읊은 장편서사시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주몽의 선대인 해모수와 유화의 이야기를 기록한 서장(序章)과
주몽의 본 행적을 기록한 본장(本章), 그리고 주몽의 아들인 유리왕과
저자의 의견을 기록한 종장(終章)으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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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모수가 떠난 후, 유화가 어떻게 되었고 또 어떻게 부여로 와서 주몽을 낳았는지는
다음에 설명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3>고구려 건국조 주몽(2)|작성자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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