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2>고구려 건국조 주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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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 치고, 고구려 추모왕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1193년, 대서사시 《동명왕편》을 남긴 고려의 문인 이규보가 동명왕편의 서문에서 '미천한 남녀조차도 동명왕의 이야기를 대충은 알고 있을 정도이다.' 라고 기록해두었으니, 그만큼 주몽이라는 남자의 이야기가 얼마나 한민족 사회에 널리 퍼져있었는지 알만하다.
고구려를 알기 위해서는 추모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고구려 관련 문헌에는 빠지지 않고 추모설화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당시 고구려 사회에 추모의 이야기가 뿌리깊게 박혀있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추모가 활을 잘 쏘았던 탓인지(이름을 봐도 알 수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유달리 활쏘기를 즐겼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고구려의 피가 그렇게 따져보면 이나라 양궁이 올림픽에만 나가면 금메달을 휩쓰는 지금과 같은 걸출한(?)수준에 이르게 된 것도, 우리 조상이신 고구려인, 그리고 추모에게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조상님께 신세진 것이 한둘이 아닌 거다. 나라 이름을 COREA로 딱 점지해주신 것도 모자라 이렇게 활 잘 쏘는 재주까지 물려주셨으니.
고구려의 건국왕에 대해서, 고구려인들이 직접 남긴 기록은 집안의 '광개토대왕릉비'와 '모두루묘지명'이다. 둘다 죽은자를 애도하는 글인데, 하나같이 추모를 언급하면서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우시었다.
(왕은)북부여에서 나셨는데,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여랑(河伯女郞)이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시니, 나면서부터 성스러워...............
남으로 내려오시다가, 길에서 부여의 엄리대수에 이르시었다.
왕이 나루에 이르러 말하시길,
"나는 황천(皇天)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갈대를 엮고 거북은 떠올라 머리를 짓게 하라."
하니 소리에 응하여 갈대가 이어지고, 거북이 물위로 떠올랐다. ...............
비류곡의 홀본 서쪽의 성 위에서 도읍을 정하시었다.
세상에서의 위치를 즐기지 않으시어, (하늘이) 황룡을 아래로 보내어 왕을 영접하니,
왕이 홀본 동쪽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시고, 하늘로 올라가시었다.
ㅡ<광개토대왕비>
하백의 손자이며 일월의 아들인 추모성왕이 북부여에서 태어나셨으니,
천하사방은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알지니.
ㅡ<모두루묘지명>
추모를 '해와 달의 아들', 혹은 '하백의 손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다만 광개토대왕비에서는 '추모', 《삼국사》에서는 '주몽', 모두루묘지명에서는 '추모성왕'이라고 하는 등 표기상의 차이는 있다. 본회에서는 광개토대왕비의 표기를 따른다)
중국의 기록에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시작해 《위서》, 《통전》, 《수서》, 《당서》를 거쳐 고려 시대 송나라 사람인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도 등장한다.
부여(夫餘)의 왕이 하신(河神)의 딸을 얻었는데, 햇빛에 비추임을 받아 감응되어 임신하였으며 알[卵]로 낳았다. 자라서 활을 잘 쏘았는데, 세속에서 활 잘 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 하므로, 따라서 '주몽'이라고 이름지었다. 부여 사람들이 그의 출생이 이상했던 때문에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제거할 것을 청하였다. 주몽이 두려워서 도망하다가 큰물을 만났는데 다리가 없어 건너지 못하게 되매 활을 가지고 물을 치면서 주문(呪文)을 외니,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떠올랐다. 그리하여 타고 건너가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살면서 그 곳을 스스로 '고구려(高句麗)'라고 부르고, 따라서 '고(高)'로 성씨를 삼고 나라를 고려(高麗)라 하였다.
ㅡ<고려도경>중에서
서긍은 송나라 사람으로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돌아와서, 왕실에 진상하는 보고서 형식으로 《고려도경》을 썼는데, 거기에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언급한 것은 오래전부터 중국에서 고려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생각해왔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주몽은 고구려에서 어머니 유화와 함께 '고등신'으로 받들어져서, 해마다 10월이면 고구려 왕이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중국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남아있다.
고구려의 국중대회(國中大會)인 '동맹(東盟)'제에서 주몽을 제사지냈다는 것은 고구려에서 주몽을 하늘의 자손으로 숭상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실제로도 고구려에서는 왕을 '태왕(太王)', 혹은 '성상(聖上)'이라고 부르고,
고구려의 태왕들은 스스로를 '천손(天孫)'이라고 칭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구려는 하늘의 아들이신 거룩한 주몽왕이 세운 나라이니, 그 주몽왕의 후손인 고구려의 왕은 당연히 하늘의 자손이다. 하늘의 자손이 다스리는 나라는 천하 사방에 가장 성스러운 나라이다. 하늘이 그 아들이고 손자인 왕이 다스리는 우리 고구려를 도우신다. 우리야말로 진정 천하의 중심국이고 하늘의 자손이 아닌가. 고구려인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부심이, 900년이라는 고구려 역사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예컨대, 고구려인들은 '천손'이라는 사상으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그 이면에는 주몽이라는 성왕(聖王)의 설화가 존재했던 것이다.
중국의 사서인 《위서》나 《통전》의 '고구려전(傳)'에는 빠짐없이 고구려 건국신화가 등장한다. 《위서》는 북제 사람인 위수가 지은 위나라의 역사책이고, 《통전》은 당나라 때의 두우라는 사람이 지은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두 책 모두 사료적 가치가 높은 역사책으로 우리 역사를 연구할 때에도 필요한 것이며, 내용이 조금 다를 뿐 알에서 태어났다던지 부여에서 도망쳐 고구려를 세웠다던지 하는 기본적인 뼈대는 다르지 않다.
한국에서도 '미천한 남녀도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동명왕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졌는데, 고려 때 학자이자 관료인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에 실려있는 추모의 기록은 이렇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은 성이 고(高)씨이고 이름이 주몽(朱蒙)<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하였다.>이다. 앞서 부여(扶餘)의 왕 해부루(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제사를 드려 대를 이을 자식을 구하였는데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서로 마주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서 그 돌을 옮기니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蛙]<개구리는 또는 달팽이[蝸]라고도 한다.> 모양이었다. 왕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하늘이 나에게 자식을 준 것이다.”
하고는 거두어 길렀는데,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였다. 그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후에 재상 아란불(阿蘭弗)이 말하였다.
“일전에 하느님이 내게 내려와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너희는 피하거라.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땅이 있는데, 토양이 비옥하여 오곡(五穀)이 잘 자라니 도읍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아란불이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나라 이름을 동부여(東扶餘)라고 하였다. 옛 도읍지에는 어디로부터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와서 도읍하였다. 해부루가 죽자 금와는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 때에 태백산(太白山)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발견하고 물으니, 대답하였다.
“나는 하백(河伯)의 딸이며 이름이 유화(柳花)입니다. 여러 동생과 나가 노는데 그 때에 한 남자가 스스로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고 나를 웅심산(熊心山) 아래 압록수(鴨淥水) 가의 집으로 꾀어서 사통하고 곧바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내가 중매없이 남을 좇았다고 책망하여 마침내 우발수에서 귀양살이 하게 하였습니다.”
금와는 이상하게 여겨서 방 안에 가두어 두었는데, 햇빛에 비치어 몸을 당겨 피하였으나 햇빛이 또 좇아와 비쳤다. 그리하여 임신을 해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쯤 되었다. 왕은 알을 버려 개,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또 길 가운데에 버렸으나 소나 말이 피하였다. 후에 들판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덮어 주었다. 왕은 쪼개려고 하였으나 깨뜨리지 못하고 마침내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다. 그 어머니가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골격과 외모가 빼어나고 기이하였다. 나이가 겨우 일곱 살이었을 때에 남달리 뛰어나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면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에 활 잘 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고 하였으므로 이것으로 이름을 삼았다. 금와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어서 항상 주몽과 더불어 놀았는데 그 기예와 능력이 모두 주몽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그 맏아들 대소(帶素)가 왕에게 말하였다.
“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가 아니어서 사람됨이 용맹스럽습니다. 만약 일찍 일을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없애버리십시오!”
왕은 듣지 않고 그를 시켜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날랜 말을 알아내어 먹이를 적게 주어 마르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찐 말을 자신이 타고, 마른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들판에서 사냥할 때 주몽이 활을 잘 쏘기 때문에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주몽은 짐승을 매우 많이 잡았다. 왕자와 여러 신하가 또 죽이려고 꾀하자, 주몽의 어머니가 이것을 눈치채고 일렀다.
“나라 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일 것이다.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 어디를 간들 안되겠느냐? 지체하여 머물다가 욕을 당하느니보다는 멀리 가서 뜻을 이루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래서 주몽은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세 사람을 벗으로 삼아 함께 갔다. 엄시수(淹○水)<또는 개사수(蓋斯水)라고도 한다. 지금(고려)의 압록강(鴨淥江) 동북쪽에 있다.>에 다다라 건너려 하였으나 다리가 없어 추격병에게 잡히게 될 것이 두려워 물에게 고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가는데 추격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하면 좋은가?”
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주몽은 건널 수 있었다.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지니 추격하는 기마병이 건널 수 없었다. 주몽은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러<위서(魏書)에는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세 사람을 만났다. 그 중 한 사람은 삼베옷[麻衣]을 입었고, 한 사람은 중 옷[衲衣]을 입었으며, 한 사람은 마름옷[水藻衣]을 입고 있었다. 주몽은
“자네들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가?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삼베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재사(再思)입니다.”
라고 하였고, 중 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무골(武骨)입니다.”
라고 하였고, 마름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묵거(默居)입니다.”
라고 대답하였으나, 성들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은 재사에게 극씨(克氏), 무골에게 중실씨(仲室氏), 묵거에게 소실씨(少室氏)의 성을 주었다. 그리고 무리에게 일러 말하였다.
“내가 이제 하늘의 큰 명령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이 세 어진 사람들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마침내 그 능력을 살펴 각각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卒本川)<위서(魏書)에서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고 하였다.>에 이르렀다.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하가 험하고 견고한 것을 보고 마침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으므로 다만 비류수(沸流水)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그로 말미암아 고(高)로써 성을 삼았다.<다른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주몽은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그) 왕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범상치 않은 사람인 것을 알고 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죽자 주몽은 왕위를 이었다.』> 이때 주몽의 나이가 22세였다. 이 해는 한(漢)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 갑신년(서기전 37)으로 사방에서 듣고 와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동명성왕 즉위전기
이미 다 아시겠지만,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는 한국에서 찬사와 혹평을 함께 받는 책이다. 찬사를 받는 쪽을 말한다면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역사책'이라는 것이고, 혹평을 받는 쪽을 말한다면 '사대주의에 찌든 역사책'이다.
실제로 김부식은 《삼국사》 편찬 과정에서 신라를 가장 많이 서술하고 (신라 왕족인 경주 김씨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고구려와 백제를 소홀하게 다루었다.
이 점을 단재 신채호는 비판한 바 있다. 그러면서 《삼국사》를 백번 읽는 것보다 광개토태왕릉비를 한번 보는 것이 낫다면서, 만주의 광개토태왕릉비를 손으로 한뼘 한뼘 재가면서 조사를 하셨단다.
김부식[1075~1151]과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았던 문인 이규보(1168~1241)는 《동명왕편》의 서문에서 《구삼국사(舊三國史)》라는 책이 있었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자신이 이 《구삼국사》를 본 감동으로 동명왕편을 썼다는 것이다. 이름에 옛 '구(舊)'자가 붙어있다면 그것은 최근에 새로 편찬한 것에 대해 '그 이전부터 있던 것'이라는 의미로 붙인 것이다. 그렇다면 《삼국사》 편찬 당시의 고려인들은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를 《구삼국사》와 대비시켜 《신삼국사》라 부르지는 않았을까? 그 점에 대해서는 필자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삼국사》와 《동명왕편》, 두 책이 지어진 이면에 《구삼국사》라는 책이 존재했음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는 있다.
그런데도, 주몽의 아버지인 천왕랑 해모수를 진실로 하늘의 아들이라 표현한 《동명왕편》과, '자칭 천제의 아들이라 하는 해모수가 와서'라고 표현한 《삼국사》는, 모두 같은 《구삼국사》를 원조로 삼았음에도 이렇게 내용이 다를 수가 있을까?
이러한 점은 간단히 말해, 서로의 인식이 달랐다고 보면 된다. 이규보가 살았던 고려는 무신정권의 횡포와 몽고의 침략로 폭풍치던 격동의 고려였고, 김부식이 살았던 고려는 칭제건원(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쓴다)을 내세우며 서경(평양)천도를 주장하던 묘청이 일으킨 난이 진압된 뒤였다.
김부식은 경주를 고향으로 하는 신라계였고, 무엇보다 문벌 귀족이었다. 묘청이나 정지상을 비롯한 서경파는 모두 고구려계였다. 고구려계가 일으킨 서경천도운동을 진압한 것은 다름아닌 김부식.
묘청이나 정지상, 백수한 같은 서경파가 뭐라고 주장했나? 고려왕을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정해서 금나라와 싸우고,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한다? 생각만 해도 꿈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역사는 승자만이 역사라는 거대한 무대의 주역이 되는 곳. 김부식은 개경을 수도로 놔두자는 개경파로서, 칭제건원과 금나라정벌을 외치던 서경파를 무참히 짓밟아버린다.
잘살아보세 하면서 일어났던 것들을 걷어차버리고 보니, 이제 정당성을 좀 확보를 해야 될 것인데, 고려는 원래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 고구려 계승의식이 상당히 강하다. 언제 또 이런 난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 그때 마침 나라에서 삼국의 역사책을 편찬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그리고 김부식에게 역사책을 쓰는데 참고로 할 사료들을 뽑아 올리라는 임무도 함께 떨어졌다.
만약에 자기 집안이 노비 집안이라고 치자. 원래 노비 집안이었는데, (막말로 해서)대대로 양반 가문에서 노비 노릇만 하고 살다가, 나라에 전쟁이 터진 어수선한 틈을 타서 자신의 주인인 양반의 집안 식구들을 모두 죽였다. 그런데 자신이 노비였다는 것을 언제 들킬 지도 모르는 것이, 양반 집안에서 자기가 노비라는 문서를 딱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노비라는 신분에서 풀려나려는데, 양반 집안이 가진 노비문서가 자신의 발목을 붙든다. (뒷이야기는 더 말 안해도 아시겠죠?)
자기 가문이 들으면 기분 나쁠 소리(신라가 고구려의 속국이었다는)가 적힌 고대 기록들은 모두 엄숙히(?)삭제해버렸음은 말할 나위도 없음이다. 그렇게 고구려와 백제의 대외진출이나 영토확장에 대한 기록들은 모두 삭제되고, 반면 신라는 쥐뿔도 없던 것을 뻥튀기시켜서 표현한다.....;;;
그게 《삼국사》이고, 현재 재야사학계가 주장하는 《삼국사》의 허구다. 유교적 사대주의에 물든 김부식이 자신의 집안을 높이기 위해서 고구려와 백제의 기록을 의도적으로 지우거나 감추어버렸다는 것. 《삼국사》가 요즘에 와서 비판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이야기의 서두에 《삼국사》의 기록을 언급한 것은 어쩌면 필자의 몸에도 간헐적으로나마 신라계의 피가 흐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본인은 선산 김씨임)
어떻게보면 지금 우리 사학계도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는지도 모른다. 이병도의 실증주의 사관을 바탕으로 하는 현 한국사학계가, 신채호나 정인보의 민족주의 사관을 바탕으로 하는 재야사학계와 끊임없는 암투를 치르고 있지 않은가. 지금의 한국사학계와 재야사학계의 다툼이, 천년 전 고려의 운명을 결정지은 서경천도문제를 두고 싸웠던 개경파와 서경파의 대립과는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국문학적 관점에서, 한민족 고대 국가의 형성과정에서 나타난 수많은 영웅신화 중에서, 지도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천손강림(天孫降臨)'의 모티브와, (단군신화가 여기에 해당한다) 지도자가 알에서 깨어났다는 '난생(卵生)'의 모티브를 모두 가지고 있는 유일무이한 신화가 바로 동명왕의 설화다. 게다가 난생설화이면서도, 김수로왕이나 박혁거세처럼 동물(말 혹은 거북)이 관련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점에서, 동명왕 설화의 문학성은 최고조에 달한다.
얼마나 환상적이고 웅장하며 장엄한 건국이야기인가? 하늘나라 천제(天帝)의 태자 해모수를 아버지로, 물의 신 하백(河伯)의 따님 유화를 어머니로, 어머니가 햇빛의 점지로 낳은 알에서 깨어났으며, 활을 잘 쏘아 명궁의 칭호인 주몽이라는 이름까지 얻었는데, 그를 시기하는 다른 태자들의 모함으로 따르던 신하들과 함께 부여를 탈출해 나라를 세웠으니. 세상 어느 나라에도 이같이 장엄한 건국신화는 없을 것이다.
필자는 한민족의 '주몽설화'를 통해서, 주몽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살았고, 우리한테 주는 의미는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짚어보고 싶다.
[출처]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2>고구려 건국조 주몽(1)|작성자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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