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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천도] 中. 통일 후 신라가 수도를 안 옮긴 이유는
[중앙일보] 입력 2005.05.21 17:09 / 수정 2006.01.30 22:49

'지배층 물갈이'에 眞骨 저항
이전비도 만만찮아 없던 일로

신라 천년의 수도 왕경(경주)에 있던 황룡사터 발굴때의 주춧돌들이 당시의 규모를 상상하게 해준다.

삼국 가운데 신라만이 천도(遷都) 경험이 없다. 그러나 천도의 시도조차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천도를 계획한 사람은 통일전쟁 이후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던 신문왕이었다. 신문왕은 689년(신문왕 9)에 달구벌(현재의 대구)로 천도를 하려고 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고구려.백제 등의 경우를 보면 고대 국가에서 천도를 하는 주요 계기는 외부 세력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신라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천도를 계획한 689년 무렵 신라를 위협할 만한 외세의 침략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신문왕은 왜 천도를 추진했을까. 신문왕은 강력한 왕권을 확립해 새로운 신라를 건설하려고 했다. 그의 아버지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하고 민생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집권말기에 민생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새로운 신라의 건설을 위해서는 진골 귀족의 정치력을 약화시키고 왕권 강화를 실현할 수 있는 제도의 정비가 시급했다. 그 과제는 아들인 신문왕에게 넘겨졌다. 681년 즉위하자마자 신문왕은 유력한 진골들을 제거하고, 나머지 진골들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강요했다. 나아가 정부의 통치력이 하부 행정단위까지 효과적으로 미치도록 하기 위해 중앙과 지방 통치조직을 재정비했다. 이어서 보다 근본적인 개혁을 위해 신문왕이 구상한 조치가 바로 수도를 옮기는 것이었다.

삼국통일 후 수도 경주는 지나치게 동남부에 치우쳐 있어 행정 중심지로서 문제가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신문왕이 천도를 계획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국왕의 입장에서 보면 천도는 기득권을 누렸던 귀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 있다. 때문에 천도를 구상할 때 신문왕은 진골 귀족을 겨냥했었다고 보인다.

신문왕은 새로운 수도의 후보지로 달구벌을 점찍었다. 이때 왜 신문왕이 국토의 중앙에 위치한 충주나 한강 유역의 서울을 수도의 후보지로 물색하지 않았을까 하고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혹시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충주.서울 등은 본래 고구려나 백제의 영토였다. 신문왕에게 원래 신라의 영역이 아니었던 곳으로 수도를 옮기는 것은 매우 커다란 모험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신문왕은 경주에서 지리적으로 그리 멀지 않으면서도 교통의 요지로 행정 중심지인 달구벌을 후보지로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6세기 전반부터 신라의 수도 경주는 왕경 또는 왕도라 불렸다. 이 무렵 왕경 6부(양부.사량부.모량부.본피부.사비피부.한기부)의 지배세력에 경위(京位)를 수여하고, 지방의 지배세력에 외위(外位)를 수여해 차별했다. 경위란 왕경의 관위란 뜻으로 이벌찬부터 조위까지의 17관등을 말하며 외위는 지방의 관위란 뜻으로 악간부터 아척까지의 11관등을 지칭한다. 신라는 경위, 즉 17관등을 보유한 왕경 6부인만을 관리로 등용했다. 지방민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관리로 채용하지 않았다. 나아가 7세기 중반 진덕여왕대에는 경위를 보유한 6부의 지배세력만을 골품 신분으로 편제해 그것에 따라 관리의 선발이나 승진에 차별을 두는 관료제 운영원칙을 마련했다. 골품 신분에 편제된 사람들, 그들 역시 경주에 뿌리를 둔 왕경인이었다.

이처럼 통일기 이전의 신라에서는 왕경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특히 진골 귀족이 그러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문왕이 천도 계획을 발표하자, 그들은 왕이 지배층을 대대적으로 물갈이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다고 인식했을 법하다.

'삼국사기'에는 달구벌로 수도를 옮기려고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만 전할 뿐, 천도를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선 설명이 없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참조할 때 대략 다음의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할 수 있다. 하나는 경주에 뿌리를 둔 진골 귀족들의 반발이다. 신문왕이 수도를 옮기면서 동시에 지배층을 물갈이하려는 시도에 대해 그들이 거세게 저항했음을 쉽게 예상해볼 수 있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새로운 수도의 건설에 들어가는 막대한 재정 비용을 절약하면서 천도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대안이 제시됐다는 점이다. 새 대안이란 왕경의 범위를 축소함으로써 기존의 6부 영역을 조정하는 조치였다.

왕경의 범위를 축소한 구체적 내용은 방대한 왕경을 현재의 경주 시내 정도로 줄이는 것이었다. 통일기의 왕경은 오늘날 경주 시가지의 범위와 대략 일치한다. 대성군과 상성군.임관군이 왕경을 둘러싸고 있는데, 이들 군은 모두 통일 이후 설치한 것이다. 삼국통일 이전까지 대성군 등은 모두 왕경에 속했었다. 그 범위는 현재의 행정 구역상으로 안강읍을 제외한 경주시 전체와 울산시 농소동 일부, 두동면과 두서면을 망라했다. 통일기에는 또 6부의 영역도 축소된 왕경의 범위 안에서 새롭게 조정했다. 최근의 연구에서 그 시기가 신문왕대였음이 밝혀졌다.

신문왕은 달구벌로의 천도가 진골귀족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어려워지자, 왕경의 범위를 재조정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했던 것이다. 그런데 천도의 포기는 역으로 지배층의 물갈이를 통한 정치개혁의 후퇴를 전제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왕경의 범위 축소에도 불구하고 진골귀족을 비롯한 왕경 지배층의 정치.사회적 지위에 획기적인 변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신문왕은 천도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추진했고, 가시적인 성과도 있었다. 진골들의 핵심 경제 기반인 녹읍을 혁파해 그들이 경제적으로 국왕에게 의존하게 만들었고, 또 부분적으로 능력에 따라 관리를 채용하거나 승진시키는 관료제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부딪혀 천도가 무산됐다는 점에서 보면 신문왕의 정치개혁은 완전한 결실을 봤다고 보기 어렵다. 

그 후유증은 70~80년 뒤에 나타났다. 8세기 후반 혜공왕대부터 진골들의 왕권에 대한 도전이 거세게 일어나 신라의 몰락을 부채질했다. 폐쇄적인 골품제와 그에 기초해 운영하는 인사 관행을 청산하지 못한 결과였다. 


전덕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책임연구원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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