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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왕

시호 : 동성왕(東城王)
성 : 부여(扶餘)
휘 : 모대(牟大) / 모도(牟都) / 말다(末多)[1] / 여대(餘大)[2]
생몰년도 : 음력 445년 ~ 501년 11월 (57세)
재위기간 : 음력 479년 11월 ~ 501년 11월 (23년)


1. 출자

백제의 24대 건길지. 이름은 모대(牟大), 모도(牟都), 《일본서기》에는 말다(末多). 중국사서에는 여대(餘大)로 나타난다.

이 때문에 마동(薯童)=서동(薯童)으로, 서동요의 그 인물이 백제 동성왕이 아닌가라는 설도 있다. 실제로 이 시기 동성왕은 신라 소지왕과 결혼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기 어렵다. 아, 좀 심하게는 '말똥'으로 보는 이도 있다. 자세한 것은 서동요 문서 참고.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로, 해구의 반란을 토벌한 진씨 세력에 의해 옹립되었다. 그런데 그가 문주왕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무령왕릉 발굴에 따르면 동성왕이 무령왕보다 나이가 적은 걸로 판명이 되었는데, 그렇다면 왜 동성왕이 먼저 즉위했는가에 대한 의문은 그가 사실 문주왕의 아들이라면 해명이 된다. 하지만 《삼국사기》 등 기록 대부분엔 곤지의 아들로 나와있기 때문에 근거는 빈약하긴 하다. 기록대로 곤지의 아들이라면 형인 무령왕처럼 일본에서 태어났고 10대에 왕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본다면 진씨 세력이 자신들이 주무르기 쉬운 왕손을 고르다 보니 걸린게 바로 동성왕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나이로 본다면 형인 무령왕이 왕이 되어야 정상이었겠으나 진씨 세력의 입장에선 성인인 무령왕은 제어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동성왕을 옹립했다는 것. 백제판 안동 김씨?

《일본서기》에 왕이 되기 위해 백제로 가기 전 일왕인 웅략왕이 격려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는 기록으로 볼 때 모계쪽이 일왕가일 가능성도 높다. 재위 전후시기에 백제는 고구려에게 한성을 빼앗기고 상당한 위기에 처했기에 지리적 위치 때문에 고구려에게 제압되지 않은 왜국의 많은 도움을 필요로 했고 실제 영산강유역에 왜계의 전방후원분이 축조된 시기도 동성왕 재위시기인 6세기 전후부터로 판단되기 때문에 고고학적으로도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담력이 컸으며 활솜씨가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2. 업적

삼근왕과는 대비되게, 전제군주적이라 불릴 정도로 주체적이고 고집있는 왕권강화를 시행했다. 특히나 진씨 세력에 의해 추대 형식으로 옹립된 왕이다 보니 생존을 위해서라도 왕권강화는 필수였을 것이다. 그래서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는 진씨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금강 유역권을 지배기반으로 잡고 있는 신진세력을 대거 등용한다.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세력으로 사씨(혹은 사택씨), 연씨, 백(苩)씨 등이 있다. 대신의 간언을 씹으며 성곽, 궁실등을 과도하게 중측하는등 과도한 왕권 강화및 과시를 했다. 사비서원에서 사냥을 즐기던 중 백가세력에게 암살당했다.

《일본서기》에는 포학무도하므로 국인(귀족)이 제거했다는 기록도 있다.

481년(동성왕 3년)에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한 고구려와 말갈의 연합군을, 신라 및 가야와 연합하여 격퇴했으며, 484년(동성왕 6년)에는 중국 남조(南朝)의 유송(劉宋)에도 사신을 보내고자 시도하고, 이듬해인 485년(동성왕 7년)에는 신라에도 사신을 보내는 등 외교에도 힘을 쏟았다.

백제로 처들어온 북위군을 격파했는데, 유목민인 북위는 물에 익숙하지 않아 황해를 건너지 않았을 것이므로, 북위군이 처들어온 곳은 만주와 화북의 사이에 위치한 요서지방의 백제 식민지라며 이 사건을 백제의 요서경영설의 근거로 활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때 활약한 목간나라는 장수가 북위군의 대선(큰 배)를 빼앗은 공을 세웠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북위군은 배를 타고 황해바다를 건너온 것이 분명하다.[3] 또한, 요즈음에는 북위군이 아니라 고구려군이 처들어왔다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4] 공격자를 북위군으로 보는 것은 남조 측에 전쟁에 대한 소식을 전하면서 공격자를 '위로'로 지칭했기 때문인데, 이 말이 '위나라의 오랑캐'라는 말이 아니라 '위나라에 붙은 오랑캐', 즉 고구려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

가장 최근에는 오히려 백제의 용병설이 대두되고 있다. 이도학교수의 주장으로 백제가 왜에 선진기술을 전수해주고 왜는 백제에 용병을 파견해 군사적 지원을 해주었듯이 백제에게 용병을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여 바다건너 주둔해 있다가 북위와 전쟁을 했다는 것이다.

웅진천도 이후 아작이 났었던 백제의 왕권과 국제적 위치를 그나마 살려낸 왕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개로왕 이후 단절된 중국(특히 남조)와의 관계를 회복시켰고, 신라의 소지왕에게 결혼동맹을 제안하여, 이찬 비지의 딸과 결혼하면서 고구려에 대처하기도 하였다.

《일본서기》에만 나오면 487년에 기생반숙녜의 반란으로 가야가 혼란속에 빠지자 이에 개입, 가야연맹에 대한 세력을 강화를 시도하기도 했었다. 아마 기록상으로 보았을때 가야가 백제에 도움을 요청한듯 보인다.

489년(동성왕 11년) 남도 바닷가의 농부가 두 이삭이 합쳐진 벼를 바쳤다는 기록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근초고왕대의 경략 이후에도 현지 세력을 인정하는 불완전한 지배에 머물렀던 현재 호남권 마한에 대한 합병이 이 때 완료되어 지방관을 파견하는 직접통치로 전환된 것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현재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은 동성왕이 파견한 왜계 지방관의 묘라는 것.

494년(동성왕 16년)과 495년 두 해에 걸쳐 백제와 신라를 번갈아 침공해오는 고구려의 군대를 신라와 연합해 격퇴하는 등, 신라와의 동맹을 더욱 돈독히 다졌다. 498년에 공물과 세금을 바치지 않는 탐라국(지금의 제주도)을 친히 정벌하고자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광주)에 이르렀다가, 탐라국의 항복을 받고 그만두면서 탐라국을 복속시켰다.

군사적으로도 힘을 쏟아서, 반란의 이유로 언급되는 잦은 사냥이라는 것도 사실은 군사훈련으로 보는 시각이 유력하다. 이런 노력 끝에 어느정도 군세를 회복하여, 한때 한강 이남 저 남쪽까지 밀려났던 백제가 대략 이시기부터 다시 한강 근처까지 진출해 한강유역 쟁탈전이 벌어졌다.[5]

여러모로 웅진천도 이후 막장을 향해 달리던 백제를 다시 어느정도 추스려서, 무령왕 시기 재중흥으로 나아가는 발판을 만들었다는 평판은 나올만하다.

웅진 천도 이후 계속된 혼란을 수습하는데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말기에 이르러서는 점차 향락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으며 놀기만 했다. 499년(동성왕 21년)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 죽어나가자, 궁궐의 창고를 열어서 백성들을 구제하자는 신하들의 권고도 받아들이지 않고, 500년(동성왕 22년) 봄에 웅진성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짓고 사치스러운 정원을 만들었다. 또한 신하들이 간언하는 것을 귀찮아하며 궁궐의 문까지 닫아버릴 정도로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다.

501년(동성왕 23년) 겨울 음력 11월, 사냥을 나갔다가 폭설을 만나 근처에서 머무르던 중, 왕의 정책에 반발을 한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에게 살해당했다. 시호(諡號)는 동성왕(東城王)이다.

아들로 무령왕인 사마가 있다고 하나 다른 기록에는 무령왕이 이복 형이라고도 한다.[6]

2.1. 동성왕 죽음의 의문 

동성왕은 통치 말년에 접어들면서 의도적으로 신진 세력들을 중용했는데 이는 웅진 천도이후 문주왕-삼근왕을 거치면서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고 볼수 있다. 한성에서 함께 내려온 구 귀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웅진 출신의 신진 세력을 중용한 것이다.

문제는 동성왕을 암살한 백가는 구 귀족세력이 아니라 신진 세력이었다는 점이다. 백제의 대성팔족중 하나인 백씨 가문의 백가는 웅진 출신이었고 동성왕에 의해 위사좌평에 임명된 인물이었다. 위사좌평은 오늘날의 경호실장에 해당되는 위치였기 때문에 사실상 백가는 동성왕의 최측근이라고 봐도 좋을 인물이었다.[7]

그런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성왕은 백가를 새로 신축한 가림성[8]의 성주로 임명했다. 백가는 이에 불만이 있었는지 병을 핑계대고 가림성으로 부임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동성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불만을 품고 자객을 보내 동성왕을 암살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백가는 가림성으로 도망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무령왕이 보낸 토벌대에 저항도 하지 않고 항복했더니 그대로 처형되고 말았다.(...)

동성왕의 죽음과 백가의 황당한 반란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왕의 최측근이던 백가가 왕을 암살하고 저항도 하지않고서 항복했다가 처형되었다는 점은 백가가 뭔가 뒤에 믿는 구석이 있었을가능성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백가 혼자서 동성왕을 암살했다기 보단 백가의 뒤에 배후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것. 그러나 누가 배후였을지는 불확실하다.


3. 삼국사기 기록

一年冬十一月 동성왕이 즉위하다
四年春一月 진로를 병관좌평으로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맡기다
四年秋九月 말갈이 한산성을 습격하다
四年冬十月 큰 눈이 내리다
五年 한산성으로 행차하여 군사와 백성을 위무하다
五年夏四月 웅진 북쪽에서 사냥하다
五年春二月 남제에 사절을 파견하다
六年秋七月 남제에 파견하는 사절의 통행을 고구려가 차단하다
七年夏五月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다
八年春二月 백가를 위사좌평에 임명하다
八年春三月 사절을 남제에 보내 조공하다
八年秋七月 궁실을 중수하고 우두성을 쌓다
八年冬十月 대궐 남쪽에서 군대를 사열하다
十年 위가 침입하다
十一年 두 이삭이 합쳐진 벼를 바치다
十一年冬十月 천지신명에 제사지내다
十一年冬十一月 남당에서 군신들과 잔치를 벌이다
十二年秋七月 사현성과 이산성을 쌓다
十二年秋九月 연돌을 달솔에 임명하다
十二年冬十一月 겨울에 물이 얼지 않다
十三年夏六月 웅천의 물이 불어 민가가 피해를 입다
十三年秋七月 백성이 굶주려 신라로 도망한 무리가 일어나다
十四年春三月 3월에 눈이 내리다
十四年夏四月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다
十四年冬十月 우명곡에서 사냥하다
十五年春三月 신라와 혼인관계를 맺다
十六年秋七月 군사를 보내 신라를 구원하다
十七年夏五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七年秋八月 신라군이 구원하여 고구려가 물러나다
十九年夏五月 연돌을 병관좌평으로 임명하다
十九年夏六月 큰 비가 내려 백성들의 가옥이 유실되다
二十年 웅진교를 가설하다
二十年秋七月 사정성을 축조하고 한솔 비타를 보내 지키게 하다
二十年秋八月 왕이 무진주로 행차하여 탐라의 사죄를 받다
二十一年 백성이 굶주려 고구려로 도망한 무리가 일어나다
二十一年冬十月 전염병이 크게 돌다
二十二年 대궐 동쪽에 임류각을 세우다
二十二年夏四月 우두성에서 사냥하다
二十二年夏五月 임류각에서 잔치를 베풀다
二十三年春一月 서울에서 노파가 여우로 둔갑하여 사라지다
二十三年春三月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치다
二十三年夏五月 여름부터 가을까지 비가 내리지 않다
二十三年秋七月 탄현에 목책을 세워 신라의 침입을 대비하다
二十三年秋八月 가림성을 축조하여 백가로 하여금 지키게 하다
二十三年冬十月 사비 동쪽 벌판에서 사냥하다
二十三年冬十一月 백가가 자객을 보내 동성왕을 죽이다

기록이 상당히 많다. 제위 기간으로 비교하면 의자왕보다도 많을 정도. 백제에서 온조왕, 무왕 다음으로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왕이다.


주석 

[1] 《일본서기》의 기록
[2] 여기에서 여(餘)가 성이고 이름이 대(大)이다. 백제왕가의 성씨는 부여씨인데, 외국 기록에는 종종 부가 탈락한 여만 나오는 경우가 많다.
[3] 백제의 요서경략설은 대륙백제라는 상한 떡밥과는 다르게 여러모로 논쟁이 되고 있으며, 이 전쟁 역시 논란이 끝이 없다. 심지어 근거는 미약하지만 있지도 않은 전쟁을 지어낸 것이라는 일본인 학자의 주장까지 존재하는 상황.
[4] 이것도 없는전쟁을 지어냈다는 주장만큼이나 근거가 미약하다. 당시 《삼국사기》는 고구려와 백제의 싸움을 빠뜨리지 않고 꼬박꼬박 적고 있는데 이것만 누락할리 없다.
[5] 애초에 문주왕 때에도 한강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라는 설도 존재한다. 하지만 동성왕 이전 백제 사정을 고려하면 물러났느냐를 떠나서 관리할 여력 자체가 부족하였다.
[6] 무령왕 즉위시 40대였고 동성왕도 시해됐을 때 그 정도의 나이라고 생각한다면 충분히 일리가 있다.
[7] 당연한 이야기지만, 가장 믿을만한 사람을 경호실장에 앉히지 않겠는가.
[8] 오늘날의 충남 부여군 성흥산성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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