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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덕왕
시호 : 위덕왕(威德王)
성 : 부여(扶餘)
휘 : 창(昌)/여창(餘昌)[1]
생몰년도 : 음력 525년 ~ 598년 12월 (74세)
재위기간 : 음력 554년 7월 ~ 598년 12월 (45년)
백제의 27대 건길지
[2]
1. 생애 개요
성왕의 아들이자 다음 왕. 위덕왕이란 명칭은 아버지 성왕처럼 불교에서 따온 것으로, 대위덕명왕에서 온 것이다. 성은 부여, 이름이 창(昌)으로 당대 금석문에는 창왕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는 사마왕(무령왕)과 마찬가지로, 이외에도 이름으로 불리는 왕으로는 온조왕, 의자왕이 있다. 이 때문에 고려의 창왕과 혼동되기도 한다.) 《일본서기》에는 여창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부'만 성으로 생각한건가?
아버지 성왕과 함께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기에 태자 시절의 이야기가 자세하게 나오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버지 성왕과의 관계가 꽤 좋았던 것으로 생각되나 결국 자기 고집 때문에 아버지가 죽게 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죄책감 속에 살게된 비운의 인생이기도 하다.
생몰년도는 525~598년으로 일흔 넷이니 백제의 역대군주 중에서 그나마 장수한 경우이다. [3] 재위기간도 554~598년 총 45년으로 긴 편이다. 아니, 50년씩 해먹은 고이왕 까지의 대다수의 초기 왕들을 제외하고는 가장 길다.
2. 태자 시절
아버지인 성왕을 도와 국정에 참여했고 성왕을 대신해 북벌군을 지휘했다.
실제로 그가 역사서에 첫 등장하는 것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554년의 백합야 전투다. 태자였던 창은 고구려 장수와 일기토를 벌여 승리했고 사기가 오른 백제군은 고구려군을 밀어 붙여 승리를 거뒀다. 기세가 오른 백제는, 553년 한강 상류를 차지한 신라가 약속을 어기고 뒷치기를 하여 한강유역을 뺏은 신라에 대해 정벌론을 펼쳤다. 태자인 창이 강경하게 나가자 많은 신하들의 반대에 불구하고[4] 결국 성왕은 신라 공격을 승인해준다. 그리하여 벌어진 전투가 관산성 전투다. 이때까지는 뛰어난 무용과 자신감 넘치는 패기있는 차세대 유망주로 전성기의 근구수왕처럼 백제판 흑태자로 용명을 떨칠 수 있었겠지만...
이후 창은 직접 선봉에 서서 관산성(管山城) 공략에 나섰다. 이에 아버지인 성왕은 관산성을 공격하고 있던 태자 창을 독려하기 위해 병사 50명만 대동하고 밤길을 달려가다가 신라군에게 급습을 당해 죽임을 당했고, [5] 이 전투에서 창의 부대 역시 포위되어 성왕을 포함 4인의 좌평과 29,600명의 군사가 죽었다.[6] 창은 겨우 살아나게 된다.
3. 즉위
(555년) 8월 백제 여창(餘昌)이 여러 신하들에게 “소자(少子)는 이제 돌아가신 부왕(父王)을 받들기 위하여 출가하여 도를 닦고자(修道) 한다”라고 말하였다. 여러 신하와 백성들이 "지금 임금께서 출가하여 수도하고자 하신다면 우선 왕명을 받들겠습니다. 슬프도다. 이전에 가졌던 생각이 바르지 못하여 후에 큰 근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누구의 잘못입니까. 무릇 백제국은 고구려와 신라가 다투어 멸망시키고자 하는 것이 나라를 연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니, 지금 이 나라의 종묘.사직을 장차 어느 나라에게 넘겨주려하십니까. 무릇 도리는 왕명을 따르는 것이 분명한데, 만약 능히 늙은 노인(耆老)[7]의 말을 들었다면 어찌 여기에 이르렀겠습니까. 바라건대 앞의 잘못을 뉘우치고서 속세를 떠나는 수고로움은 하지 마십시오. 원하시는 것을 굳이 하고 싶으시다면 나라 백성들을 출가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여창이 “좋다”고 대답하고는 곧 나아가 신하들에게 꾀하도록 하였다. 신하들은 마침내 상의하여 100명을 출가시키고 깃발과 우산 모양의 장식물(幡蓋)를 많이 만들어 여러가지 공덕을 행하였다고 운운하였다. -《일본서기》권 19 긴메이 덴노
성왕이 죽었으니 창이 왕이 되어야 했으나 창은 자신의 고집으로 아버지와 함께 많은 군사들이 죽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 왕위를 포기하고 승려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만류로 왕위를 승계하였다. 창이 나이든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아 성왕이 죽었으니 이번에는 제발 나이든 신하들의 말을 들으라고 설득한다. 그리고 대신 백성 100명을 출가시킨다.
한때 《일본서기》의 기록을 근거로 554~557년 까지 부여창이 태자로 있던 공위시대가 있었다 주장되어 인정받기도 했으나 95년 부여 능산리 유적에서 발굴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에 의해 공위가 없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애초 《일본서기》의 그 출가기사가 권력대립 보단 성왕전사로 인한 비감한 분위기가 물씬나는 부분이고 위덕왕 스스로가 출가하려 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에 '공위설'은 한계가 있다.
4. 후폭풍
관산성 전투의 패전에 대한 귀족들의 책임추궁으로 위덕왕은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한다. 이로인해 동성왕-무령왕-성왕을 거치면서 강화된 왕권이 약화되었고 귀족들의 발언권이 강화되었다. 게다가 좌평4인과 3만에 가까운 군사, 영토, 무엇보다 왕을 잃었기 때문에 백제는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하게 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과 부총리급 장관 4명이 몰살당한 격이니...
앞날에 벌어질 일들을 고려하지 않아 훗날 큰 환란이 있었으니 누구의 잘못입니까? 만약 원로들의 말을 들었다면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십시요. -《일본서기》
왕권이 땅바닥에 떨어진 것은 위의 기록으로도 알수가 있는데 위덕왕은 취임하자 마자 귀족들에게 "똑바로해!"라는 소리를 들을정도였다. 또 《수서(隨書)》에는 사비천도 이후 형성된 대성8족(大姓八族)이 실세가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는 왕권이 떨어졌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수있는 대목이다.
5. 치적
국정을 맡고 몇개월 후 554년 9월 신라 변경 진성을 공격해 상당수의 백성과 말을 탈취했지만 영토 확장은 실패한 소극적 성과였다.[8]
그리고 이어 귀신같이 고구려가 쳐들어왔다. 성왕이 전사한지 불과 3개월 만에 쳐들어 온 것이다 [9] 고구려가 금강유역일대인 웅천성까지 단숨에 밀고 들어오자 위덕왕은 이를 방어해냈다.
이후 고구려가 신라와 연합하여 재침할 것을 우려하여 반파국에 밀사를 파견하여 가야를 이용해 신라의 후미를 치고 532년 금관가야 지역을 다시 되찾아주면서 신라를 견제시키려 했으나....
오히려 백제군이 신라군의 반격에 당하면서 1,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역관광 당했고 게다가 가야를 집어삼키려고 호시탐탐 노리던 신라에게 있어 오히려 좋은 명분이 생겼고 562년 음력 7월 신라는 장군 이사부와 화랑 사다함의 활약으로 대가야를 패망시켰고 가야 전지역을 집어삼켰다. (가야 멸망 이후 수나라가 건국되기 전까지(563~589,26년간) 백제가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는 추가바람)
그러나 근성가이 위덕왕은 포기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위덕왕 24년과 진지왕 2년의 기사를 보면 백제가 신라 서쪽 주, 군을 쳤는데 이찬 세종(김유신의 큰할아버지시다.)에게 3,700명의 목을 베었다고 하는 것을 봤을 때 백제의 대패로 보인다. 그런데 위덕왕은 진흥왕에게 반격당해 패한 후 장장 16년을 준비했을 텐데 이렇게 패배했으니 원통할 것 이다. 그리고 백제군을 무너뜨린 것이 위덕왕의 아버지 성왕을 죽인 김무력의 형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진지왕 3년에 알야산성을 백제에게 주었다는 기사가 있다. 다만 이는 백제 위덕왕의 자료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 때 위덕왕은 주나라의 조공을 보냈다고만 나온다. 그리고 내주었다고 하지 않고, 주었다고 하는 것을 보았을 대 양국 간에 무슨 협상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왜 신라가 알약산성을 주었는지 아시는 분은 추가바람
국제적인 고립을 피하고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남북조와 외교관계를 펼쳤다.[10] 이후 남북조가 통일되고, 어느정도 내부가 안정되자 위덕왕은 잠재적인 위협요소인 고구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수를 이용하기로 한다. 상황을 주시하던 위덕왕은 596년에 수문제와 고구려가 요동을 놓고 여수전쟁을 벌이자, 수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는 예의없고 오만한 나라라며 깠다. 그러나 고구려가 지길 바랬던 백제의 생각과는 달리 수가 오히려 털렸고 백제가 수나라 뒤를 봐줬다는 사실을 안 고구려는 바로 백제로 진격하여 보복을 감행하고 돌아갔다.
하지만 위덕왕은 근성의 정신으로 수나라가 다시 고구려를 친다면 백제가 적극적으로 길안내, 군량 보급등을 협력하겠다고 제의 했으나 수 문제는 그럴 여력이 없다 판단하여 위덕왕의 제의를 무시했다.
재위기간 내에 관산성전투의 복수를 하기 위해 빈번히 신라를 침공하였으나 별 성과는 없었다. 단지 오래 산게.. [11]
6. 문화
죽은 왕자를 위해 왕흥사를 창건했다. 법흥사는 부여 백마강변에 위치한 왕실 원찰로 당시 백제에서 가장 중요한 사찰. 하지만 백제 멸망 때 쫄딱 타버렸다
이전까지 법흥사는 《삼국사기》 기사에 따라 무왕 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져왔으나, 2007년 10월 10일에 법흥사지에서 금은동 사리함이 발견되어 이는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위덕왕이 재위기간 45년 동안 밥만 축낸 게 아니었다.
이 사리함 중 청동 사리함에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立刹本舍, 利二枚葬時神化爲三” 즉, “정유년(丁酉年, 577년) 2월 15일에 백제왕 창(百濟王昌)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찰(刹)을 세우는데, 2매였던 사리가 장시(葬時)에 신(神)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로 인해 법흥사가 위덕왕 때 577년에 세워졌다는 것이 처음으로 밝혀졌다.[12] 어쨌든 이걸로 《삼국사기》가 또 한번 엿을 먹었다(..).
이같은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백제 관련 유적, 유물이 워낙 적은 상황에서 이 사리함은 기존의 기록과 다른 내용이 밝힌 중대한 유물이다. 때문에 문화재청은 발굴된지 불과 5년 밖에 안 된 2012년에 이 사리함들을 냅다 보물로 등록시켰다.[13]
1993년 충남 능산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걸작 백제금동대향로도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위덕왕 때 같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금동대향로에 대해서 추가바람)
7. 사망 후
598년 74세로 죽었고 그 묘는 능산리 고분군에 있다고 추정하며 그가 죽은 후 아들인 아좌태자[14]가 왕위를 이어받지 않고 동생인 혜왕이 이어받았다. 다만 이상한 점은 아좌태자가 일본에 있음에도 귀국하여 위덕왕의 뒤를 잇지 않고 동생인 혜왕이 등극했다는 것. 태자가 버젓이 있음에도 동생이 뒤를 이었다는 점은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일각에서는 위덕왕이 귀족세력에게 암살당한게 아니냐는 추정을 하기도 한다. 일흔에도 자연사 하지 않고 횡사를 했다면.. 백제의 역대 국왕들이 귀족세력에게 암살당한 경우가 여러번 있는것을 보면 위덕왕과 혜왕의 승계 과정을 둘러싼 석연치 않은 상황이 위덕왕의 암살을 암시하는게 아니냐는 것. 그러나 기록상으론 그런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확실하다고 보긴 어렵다.
8. 기타
이병훈 감독의 사극 서동요에서는 정욱 씨가 연기했다. 서동요에서는 무왕이 위덕왕의 숨겨진 아들로 등장하지만 역사적 사실과 맞는지는 논란이 있는 편이다. 서동요에서는 결국 위덕왕이 아좌태자에게 양위를 하려고 하나, 양위식 직전 법왕 부여선이 암살단을 보내 아좌태자를 암살하게 되자 위덕왕이 비밀리에 자신의 숨겨진 아들인 서동을 태자로 책봉하고 부여선을 제거하려다 되려 역관광 당해 부여선에게 암살당한다고 나온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위덕왕과 혜왕의 석연치 않은 승계과정을 생각하면 타당하다고 볼 수도 있는 스토리이긴 하지만 역사 기록상의 근거가 없는 이상 픽션이라고 봐야할 듯.
현대 한국에 다시 태어나 위덕대학교를 세워 백제 부흥을 위한 엘리트 양성에 힘쓰고 있다. 공교롭게도(?) 위덕대는 불교학교이고 위덕왕은 불교와 관련된 이런저런 흔적을 많이 남긴 왕이다.... 아마 위덕이 같은 단어일 것이다. 그러면서 학교가 위덕왕의 원수인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 있다는 게 함정
겁스 무한세계의 화랑 세계에서는 587년 神國 신라에게 백제가 멸망당하자 자살한다. 안습.
9. 삼국사기 기록
一年秋七月 위덕왕이 즉위하다
一年冬十月 고구려가 웅천성을 공격하다
六年夏五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八年秋七月 신라의 변경을 공격하다
十四年秋九月 진나라에 조공을 보내다
十七年 제가 왕을 거기대장군으로 책봉하다
十八年 제가 왕을 다시 책봉하다
十九年 사신을 제에 보내 조공하다
十九年秋九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二十四年秋七月 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四年冬十月 신라의 서부 변경을 공격하다
二十四年冬十一月 사신을 우문주에 보내 조공하다
二十五年 사신을 우문씨의 북주에 보내 조공하다
二十六年冬十月 혜성이 나타나다
二十六年 지진이 일어나다
二十八年 수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八年 수에서 왕을 책봉하다
二十九年春一月 수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三十一年冬十一月 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三十三年 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三十六年 수가 진을 평정하다
三十六年 수의 배가 탐모라국으로 표류하다
三十九年秋七月 일식이 일어나다
四十一年冬十一月 혜성이 나타나다
四十五年秋九月 수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四十五年 수의 군도가 되기를 요청하다
四十五年冬十二月 위덕왕이 죽다
외교에 관한 기사가 상당히 많다.
주석
[1] 여기서는 "여"가 성
[2] 출처.
[3] 백제 초기왕들은 생몰년도가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제외.
[4] 《일본서기》에는 이때 주화파 노신들에게 늙었냐고 비이냥 거렸다고 전한다.
[5] 전후수습을 위해 달려가다가 잡혔다는 기록도 있다.
[6] 김유신 열전에서는 장수 4명과 1만명이라고 되어있다.
[7] 60세 이상의 노인을 일컫는다.
[8]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이때 남녀 3만 6천명과 말 8천필을 약취했다고 전한다. 허나 학계에선 과장된 전과로 실상 성과는 미미했을 것으로 보인다.
[9] 신라가 길을 열어줬다고 한다. 가도정명이 아니라 가도정백제(?)허나 여기에도 다른 견해도 많다. 당시 한강유역을 막 접수한 신라가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틈을 일부 소통로를 고구려가 장악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상당하다.
[10] 남북조와 동시적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백제 역사상 최초였다. 이는 중국정세 외에도 위덕왕 정권이 다각도로 위기관계를 청산해보고자 한 발로로 보인다.
[11] 기록미비로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재위기간 내에 줄창 위기에 빠진걸 보면...
[12] 발굴한 학자 왈, 자기가 이걸 직접 파낸 게 아니었다면, 《삼국사기》와 내용이 달라 위조품이라고 코웃음쳤을 것이란다(..).
[13] 보물 제1767호. 등록명은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
[14] 쇼토쿠 태자의 스승,597년 일본으로 건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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