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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덕왕 백제의 위기를 극복하고 중흥의 발판을 만든 왕



백제 제27대 임금 위덕왕(威德王, ?~598, 재위: 554〜598)은 553년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에 의해 전사한 성왕(聖王, 재위: 523〜554)의 아들로, 위기에 몰린 백제의 국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한 임금이었다.

용맹한 왕자 창(昌)
 
위덕왕은 525년 성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창(昌)이었다. 그의 젊은 시절 활약에 대해 [일본서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553년 10월) 그가 백제 군대를 징발해 고구려를 공격해, 백합(百合) 들판에서 고구려군과 마주쳤다. 그가 고구려 장수와 마주하여 ‘나의 성은 동성(同姓)이고 관위는 간솔(杆率: 백제의 벼슬 등급으로, 16등급 가운데 5위 관등)이며 나이는 29세이다’라고 말하고는, 고구려 장수와 맞대결을 벌였다. 그가 적을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려 머리를 베고, 이를 창 끝에 꽂아들고 돌아와서는 군사들에게 보였다. 그러자 백제군의 사기가 올라, 고구려군을 멀리 쫓아버렸다.”

이처럼 그는 왕자의 신분으로 적장과 맞대결을 벌여 목을 베어버린 놀라운 무예 실력을 가진 용맹한 왕자였다. 551년 백제는 신라와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해, 과거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한강 하류 지역의 영토를 회복했다. 이때 창 왕자도 참여했을 것이나, 그의 활약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위의 기록뿐이다.

그런데 고구려가 백제를 물리치기 위해, 몰래 신라와 밀약을 맺었다. 신라는 고구려와 밀약을 맺은 뒤,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한강 하류 지역을 공격해 그 땅을 차지해버렸다. 동맹국이었던 신라의 배신으로 어렵게 차지했던 땅을 빼앗기자, 백제 사람들은 크게 분노했다. 이때 창 왕자가 앞장서서 신라 정벌을 주장했다. 그러자 원로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고구려와 신라 두 나라를 적으로 둔 백제의 입장에서는 방어에 전념하는 것이 옳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창 왕자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라 정벌의 선봉장에 나섰다.

관산성 전투 패전의 책임과 왕위 계승을 둘러싼 논란
 
신라와의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그러자 성왕은 아들이 계속된 전쟁에 쉬지도 못하고 고생하는 것을 위로하고자,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전장에 나섰다. 그런데 이 정보를 입수한 신라에서 기습을 감행, 성왕을 붙잡아 죽였다. 아울러 창 왕자도 신라군에 포위되었다가 간신히 도망쳐 나왔다. 관산성 전투로 불리는 이 싸움에서 백제는 성왕과 4명의 좌평(佐平: 1위 관등), 그리고 3만 군사가 전사하는 엄청난 참패를 당했다. 관산성 전투의 패전은 창 왕자에게 커다란 정치적 부담이 되었다. 성왕이 죽은 후, 왕위 계승이 당장 문제였다.

[삼국사기]는 성왕이 죽자, 554년 7월 그가 곧 왕위에 올라 위덕왕이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반면 [일본서기]에는 성왕이 죽은 후, 그가 신하들에게 “내가 돌아가신 부왕을 받들기 위해 출가하여 불도를 닦고자 한다”고 선언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신하들은 그가 늙은 신하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아 패전의 위기를 맞았다고 비판했지만, 만약 그가 출가를 한다면 백제가 더 위태로워질 것을 염려했다. 따라서 창 왕자에게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속세를 떠나지 말 것을 권유하며 부왕의 명복을 비는 일은 백성들을 대신 출가시키라고 했다. 결국 그는 1백 명의 사람들을 대신 출가시키는 것으로 합의했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그가 즉위한 시점을 557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성왕의 죽음 이후 3년 동안의 왕위 공백이 있게 된다. 3년 공백은 성왕에 대한 3년 상(喪) 기간과 겹친다. 이 기간 동안 위덕왕은 관산성 전투 패전의 책임 탓에 정식 왕위에 오르지 않고 있다가, 3년 뒤 귀족들의 합의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고 이해하는 견해들이 있다. 관산성 패전의 책임 탓에 왕위 계승이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그의 출가 거론은 이런 상황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정치적 위기를 실력으로 극복하다
 
하지만 1991년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사리함에 새겨진 명문(銘文)에 의하면, 위덕왕은 성왕이 죽은 다음 해에 큰 공백 없이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패전의 책임 탓에 정치적 위기에 몰리긴 했지만, 위덕왕은 이를 빠르게 극복했다. [삼국유사]에는 554년 9월 신라 진성을 공격해, 남녀 3만 9천 명과 8천 필의 말을 빼앗는 승리를 거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공격은 위덕왕이 성왕의 유해(遺骸)을 찾아오기 위한 전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해 10월 고구려가 웅천성을 공격해오자, 백제는 이를 물리치기도 했다. 이러한 군사적 승리에 힘입어, 위덕왕은 귀족들을 상대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켜 결국 왕위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귀족 세력 역시 관산성 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위덕왕을 적극적으로 반대할 힘을 갖지 못했다.

그의 왕위 계승에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인물로는 동생인 혜(惠)가 있다. 그러나 혜는 형을 돕는 입장이었다. 혜는 553년 왜국에 원병(援兵)을 청하는 사신으로 파견된 바 있었다. 위덕왕은 552년 2월 혜를 다시 왜국에 보내 1천의 원병을 얻어오기도 했다. 혜는 위덕왕 재위 45년 동안 형을 돕다가, 위덕왕이 죽은 이후 백제 28대 임금(혜왕(惠王), 재위: 598~599)으로 즉위하였고, 그 아들 무(武)가 뒤를 이어 29대 임금(법왕(法王), 재위: 599~600)으로 즉위한다. 따라서 그는 위덕왕을 정치적으로 위협할 인물이 아니었다.

위덕왕은 귀족들의 비판을 잠재우고, 왕실 내부의 결속을 바탕으로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성왕의 목숨을 앗아간 관산성 전투 패전의 책임을 완전히 벗어버릴 수는 없었다. 따라서 그는 성왕에 대한 명복을 빌고, 백성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불교를 장려하는 정책을 펼쳤다.

능산리 사찰 건립과 불교의 융성

백제금동대향로와 창왕명석조사리감이 출토된 능산리 절터. 국보급 유물이 출토된 이곳은 사비 시대 백제를 대표하는 사찰이었다.



성왕과 위덕왕이 묻힌 부여 능산리 고분.
 
1993년 백제를 대표할 만한 예술품인 백제금동대향로(국보 287호)가 부여 능산리 절터 회랑 부근 바닥 구덩이에서 진흙 속에 묻힌 채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능산리 절터는 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288호)을 비롯한 국보급 유물이 출토된 백제 사비 시대의 대표적인 사찰 유적이다.

이 유적의 동쪽에는 성왕을 비롯한 백제 왕들의 무덤이 모인 능산리 고분이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능산리 사찰은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왕실의 원찰(願刹: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던 법당)이라고 할 수 있다. 창왕명석조사리감에는, 창왕 즉 위덕왕 13년(567)에 매형공주(妹兄公主)가 사리를 공양했다는 글이 적혀 있다. 매형공주는 성왕의 딸이자 위덕왕의 누이동생으로 추정된다. 대규모 능사(陵寺)가 건립되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과 물력이 소요되므로, 이 사찰이 공주 한 개인에 의해 건립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위덕왕을 비롯한 성왕의 자식과 친척들이 성왕의 명복을 빌고 효를 실천하기 위해 567년경 능사 건립을 주도했을 것으로 보인다.

능산리 사찰을 건립한 위덕왕은 불교를 열심히 신앙한 임금이었다. 그는 왕흥사(王興寺)를 건립하기도 했다. 2007년 부여군 규암면 왕흥사지에서 발굴된 청동 사리함에서는 “정유년(577년) 2월 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사찰을 세웠다. 본래 사리 2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는 명문(銘文)이 발견되었다. 위덕왕이 일찍 죽은 아들을 위해 절을 세운 것이다. 그는 아버지가 적의 손에 비참하게 스러지고, 자식이 먼저 죽는 가족사의 비극을 불교에 귀의함으로써 극복했다. [주서(周書: 북주(557〜581)의 역사를 기록한 책)]는 “백제에는 승려와 사찰이 매우 많고 도사는 없다”고 기록하고 있어, 불교에 심취한 위덕왕 재위 시기에 백제에서 불교가 크게 번영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왜국과의 관계를 중요시한 위덕왕
 
위덕왕은 즉위 초 신라를 공격한 바 있으나, 당시의 백제는 내부 결집이 더 필요했던 시기였으므로 무모한 공격은 감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561년 신라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신라가 대가야를 병합하고자 했기 때문에 이는 가야를 돕기 위한 전쟁이었다. 하지만 562년 신라가 대가야를 멸망시킨 후, 전쟁은 일단락된다. 아직 백제는 신라를 제압할 국력이 되지 못했고, 신라 역시 가야 지역을 통합하는 것이 더 시급했기 때문이다. 이후 577년과 578년에 걸쳐 신라와 다시 전쟁 상태에 돌입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난다.

그런데 신라가 583년 선부(船府)를 설치하며 해상 통제권을 강화하자, 백제는 왜국과의 해양 통로가 신라에 의해 견제될 것을 우려하게 되었다. [일본서기]에는 관산성 전투에서 창 왕자가 신라군의 포위를 뚫고 탈출할 때에 활을 잘 쏘는 왜국 장수의 도움이 받았다고 했다. 위덕왕은 즉위 직후 왜국에 사신을 보내 원군을 청하기도 했다. 성왕과 위덕왕 재위 시 백제에는 왜국 출신 관료들도 많이 있었다. 이처럼 백제에게 왜국과의 관계는 대단히 중요했다.

그런 만큼 위덕왕은 왜국과 긴밀한 협력을 강화하는 한편 신라를 포위하려는 목적에서, 축자(築紫: 규슈 섬 후쿠오카)지역에 백제 사람들을 대거 이주시켜, 이 지역을 직접 다스리는 신국(新國)을 건설하고자 했다. 축자 지역은 왜국이 백제를 지원할 때 거점이 되는 곳이며, 백제의 선진 문물이 왜국에 전해지는 관문이었다.

축자 지역을 백제가 직접 다스리기 위해서는 당연히 왜국의 협조가 필요했다. 당시 왜국에서는 모노노베시(物部氏)와 친(親) 백제적인 소가시(蘇我氏) 세력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그런데 축자 지역에 이권을 가진 모노노베시는 왜국 민달천황과 결탁해 백제와의 관계 단절을 구사하는 강경책을 구사했다. 결국 축자 지역에 백제가 다스리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던 위덕왕의 의지는 좌절되었다.

하지만 587년, 소가시가 모노노베시를 타도하자 왜국과 백제와의 관계는 다시 정상화되었다. 위덕왕은 587년 왜국에 사신과 승려들을 보내 양국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힘썼다. 이후 왜국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이 커지고, 백제 문화가 왜국에 널리 확산되었다.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한 대중국 외교술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왜국과의 협력이 필요했다면,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대(對) 중국 관계가 중요했다. 위덕왕은 남조(南朝)의 진(陳), 북조(北朝)의 북제(北齊), 북주(北周), 수(隋)에게 자주 사신을 보냈다. 그동안 백제는 양자강 지역에 있는 남조의 나라들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위덕왕은 진은 물론 북제, 북주 등 북조의 나라들과 등거리 외교를 견지해 균형을 잃지 않았다. 위덕왕은 외교 관계를 통해 대외 교역의 이익을 증진하고, 그들의 앞선 기술을 흡수하며, 국제적 협력을 통해 고구려를 견제하고자 했다.

특히 589년 북중국을 통일한 수나라가 진을 멸망시키고 통일 제국을 건설하자, 즉시 사신을 보내 이를 축하해주었다. 또 598년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수나라 군의 길 안내를 해주겠다는 제안까지 했다. 위덕왕은 국제 정세의 변화에 신속하게 반응하며 백제의 외교적 위상을 높이려고 노력했다. 물론 이런 움직임 때문에 598년 고구려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위기를 극복하고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위덕왕
 
위덕왕은 재위 기간 동안 불교의 번영, [백제본기(百濟本紀)]와 같은 역사서의 편찬, 행정제도의 정비 등 많은 일들을 벌였지만, 남아 있는 기록이 부족해 그 구체적인 상황을 알기 어렵다. 다만 남은 기록들을 통해 볼 때, 위덕왕은 관산성 전투 패전과 성왕의 죽음으로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왕위에 올라 빠르게 정국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45년의 재위 기간 동안 대외 팽창과 신라에 대한 복수보다는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통해 백제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국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한 임금이었다. 위덕왕의 재위 시기 그가 이룩한 안정을 바탕으로 불교 문화를 비롯한 백제 문화의 전성기가 열렸다. 이렇듯 위덕왕은 7세기 무왕(武王)과 의자왕(義子王) 시기 백제가 팽창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놓은 임금이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일본서기] 
[삼국유사] 
[주서(周書)]
김현구 외 공저, [일본서기 한국 관계기사 연구(Ⅱ)], 일지사, 2003년
박찬흥, <백제 성왕ㆍ위덕왕대의 왜계백제관료>, [사림] 39,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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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철, <백제 왕실의 3년상 – 무령왕과 성왕을 중심으로>, [동방학지] 145, 2009년
김병남, <백제 위덕왕대의 정치 상황과 대외관계>, [한국상고사학보] 43, 2004년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 고대 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등의 책을 썼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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