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tdGqAF (문서파일) 
* "연변 지역 고구려 유적의 현황과 과제 - 양시은" 중 "서론, 결론" 부분을 가져왔습니다. 

연변 지역 고구려 유적의 현황과 과제
양시은 서울대학교박물관 학예연구사
투고일: 2012년 5월 18일, 심사일: 2012년 8월 21일, 게재 확정일: 2012년 11월 23일

Ⅰ. 머리말

연변 지역은 한반도 고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서쪽으로는 백두산에 인접해 있어 품질이 우수한 산림 자원을 확보할 수 있으며, 동쪽으로는 바다와 인접하여 풍부한 수산 자원을 획득함과 동시에 다른 지역으로의 진출이 가능한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 연변 지역은 또한 연길·용정·훈춘 등 넓은 평야 지대가 분포해 있어 곡물 자원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고, 주변에 양질의 광물 자원이 매장된 지점도 많아, 고대 국가 발전에 필요한 요소를 고루 갖추었다.

한반도와 관련한 고대국가 중에서 연변 지역에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옥저(북옥저)다. 이후 고구려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柵城을 설치하고 연변 지역을 영역화하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다음에는 발해가 들어섰는데, 당시 연변 지역은 발해의 5京 중 東京과 中京이 위치할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다. 

연변 지역이 고구려 국가 발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음에도 지배 방식이나 관할 내역을 알려줄 수 있는 직접적인 기록이 존재하지 않아 관련 연구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이러한 문제는 기록이 추가로 발견되지 않는 이상 고구려 유적과 유물에 대한 고고학적 접근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연변 지역은 발해 시기에 들어와 도성이 위치할 만큼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현재 중국 학계에서는 발해와 관련한 고고학 조사와 연구에 집중하고 있을 뿐 연변 지역의 고구려에 대한 관심은 전무한 상황이다. 이와 같은 무관심 때문에 아직까지도 연변 지역의 고구려 유적은 현황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못한 실정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유적은 만주국 성립 이후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보고되거나, 1980년대 중반 중국에서 실시한 문물조사 당시 지표에서 수습된 유물을 근거로 추정한 내용이 전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렇지만 이마저도 보고 내용이 소략하거나 출토 유물에 대한 자료가 공개되지 않은 것들이 많고, 중국의 공식적인 기초 보고서(『文物誌』, 『연변문화유물략편』, 『中國文物地圖集-吉林分冊』)에서도 동일한 유적에 대한 판단이 서로 다른 부분도 있다. 또한 근래 발해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중국 정부의 노력이나 東北工程 등과 같은 정치적인 문제는 연변 지역의 고구려 유적과 유물에 대한 연구를 보다 어렵게 하고 있다.

발해가 과거 고구려의 영토나 인적 구성원을 상당부분 이어받았기 때문에, 고구려와 발해 초기의 물질문화를 구별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연변 지역의 여러 성에서는 고구려와 발해 또는 金의 유물이 함께 출토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문에 고구려 유물이 출토되더라도 발해나 그 이후 시기로 보고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함경도에서 고구려 시기의 유적을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이나 집안 지역에서 발해 유적이 거의 보고되지 않는 점과도 상통한다고 하겠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요령 지역의 석실분 일부를 발해 시기로 파악하거나 집안 동대자 유적의 연대를 발해까지 늦춰 보려는 강현숙의 견해가 주목된다. 1)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은 분명하지만, 고구려가 멸망한 시점인 668년에서 30년이 지난 698년에야 세워졌고, 고구려 유민과 말갈 세력이 함께 건국하였으므로 물질문화상에서 고구려와는 차이가 나타날 수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 격차가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또한 연변 지역은 고구려 멸망기에 다른 지역에 비해 피해가 크지 않은 곳이었으므로, 유물상에서 고구려와 발해의 구별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연변 지역의 고구려 유적과 유물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한 상황에서 최근 중국 정부가 기존에 고구려 시대로 보고된 유적을 별다른 근거 없이 발해 내지는 그 이후로 재보고하고 있어, 연구의 어려움이 점차 가중되고 있다.

연변 지역이 고구려 시대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관련 자료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상황 등으로 인해 오히려 자료가 훼손되고 있기 때문에, 연변 지역 내 고구려 유적과 유물에 대해 보다 명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발굴과 같은 고고학적인 조사가 수반되어야 하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그동안의 관련 자료를 최대한 수합하고 새로운 자료를 확보하여 이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다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연변 지역 고구려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 자료가 전무하기 때문에 기존에 보고된 유물을 통해 유적의 기본 성격을 파악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위해 본 연구에서는 연변대학 발해사연구소 2)와 서울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연변 지역의 고구려 자료들을 포함시켜 검토하도록 하겠다.


Ⅱ. 기존 연구 검토

연변 지역의 고구려 유적과 관련한 기존 연구는 크게 세 분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우선 책성의 위치 비정 문제로, 주로 정영진(1990), 방학봉(1999), 이종훈(2005), 박진석(2008) 등이 꾸준히 제기하고 있다. 기존의 논의는 주로 역사 기록에 초점을 맞추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고 있으며, 대상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현 상황에서 더 이상의 진전된 논의는 무의미하다고 판단되어 본고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두 번째는 연변 장성의 축조 세력과 관련된 문제다. 연변 장성은 1980년대 초부터 연구되기 시작하였는데, 그동안 장성 축조 주체에 대해 여러 논의가 있었다. 연변 지역을 둘러싸고 있는 장성의 여러 구간들을 답사한 결과, 석축 성벽의 축성 방식이 엉성하고 연길을 바라보는 안쪽 사면에 성벽이 축조되어 마치 연길을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므로, 고구려는 연변 장성의 축조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본고에서 연변 장성 문제는 일단 제외하도록 하겠다.

다음으로 연변 지역 고구려 유적의 전반적인 내용과 관련된 문제로, 이와 관련된 연구는 20세기 초부터 이루어졌다. 청나라 사람인 吳祿貞이 펴낸 『延吉邊務報告』(1908)나 일본인이 작성한 『統監府臨時間島派出所紀要』(1910) 등에서는 城子山山城 등과 같은 연변의 성곽 유적을 소개하고 있지만, 당시에 해당 성곽을 고구려 시기로 파악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보다 본격적인 조사는 일본인 연구자들이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京城帝國大學 교수였던 도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와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는 滿洲國 文敎部의 囑託으로 1937년 4월경에 間島省(지금의 연변) 일대를 다니면서 여러 유적의 현황을 조사하였다. 3) 이 또한 고구려 시기에 집중하거나  고구려 유적 발견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고, 선사시대부터 고구려·발해 및 遼金 전반에 걸친 것이었다. 

그러나 도리야마와 후지타는 평양과 집안 일대의 고구려 유적과 유물을 조사한 경험이 있는 연구자로써, 당시의 조사 내용이 초보적이고 간략하기는 하나 연변 일대의 고구려 유적을 구별해 내고 또한 관련 계통을 논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이전과는 차이를 보인다. 당시 간행된 『間島省古迹調査報告』는 연변 일대의 많은 유적이 개발로 인해 없어지거나 훼손된 지금, 당시의 유적 정황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밖에도 단편적이긴 하지만, 사이토 마사루[齋藤優]는 1942년에 半拉城(지금의 팔련성)을 발굴조사한 뒤 훈춘 일대의 유적들을 답사하면서 高力城(지금의 비우성)과 연변의 장성 유적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4) 이후 중국에서는 『文物誌』 편찬을 위해 1980년대 초반 연변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실시하였고, 이로써 연변 지역 내 고구려 유적의 전반적인 현황이 간략하게나마 밝혀지게 되었다. 당시 출간된 문물지에는 이전에 고구려의 것으로 보고되었던 유적들도 발해나 요·금 시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유적에서 고구려 유물이 수습되었다고 할지라도 고구려라는 명칭은 모두 빠져 있다. 그나마 해당 지역 전반의 역사를 소개하는 문물지의 서문에 고구려 유적에 대한 간략한 내용이 실려 있는 정도다. 문물지에 소개되어 있는 고구려 유적은 薩其城·溫特赫部城·城子山山城·興安古城뿐이다. 이러한 중국 측 분위기는 1992년에 출간된 『中國文物地圖集-吉林分冊』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지도집에서는 성자산산성과 흥안고성만이 고구려 유적으로 표시되어 있다.

반면, 연변 지역 문물지의 성과를 반영하여 1989년에 발간한 『연변문화유물략편』에는 살기성·온특혁부성·석두하자고성·연변장성·성자산산성·흥안고성·토성촌고성·중평고성 등이 고구려 유적으로 명시되었다. 해당 책에서는 연변지역 내 고구려 성의 판단 기준을 보다 명확히 하고 있는데, 전형적인 고구려 기와, 즉 승문(繩紋)·승석문(席紋)·사격자문(網紋)이 함께 출토되는 경우에만 고구려 유적으로 판단하며, 발해 기와가 함께 출토되는 경우에는 고구려가 처음 축조하여 발해로 이어지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육정산 고분군과 같이 일부 발해 고분에서 고구려계 기와가 출토되는 것에 대해서는 발해 초기에 고구려 기와를 받아들여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정영진에 의해 보다 심화된다. 정영진은 1990년에 발표한 논고에서 연변 지역의 고구려 유적의 현황을 정리하고 이와 관련된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는 연변 지역 고구려 성곽은 요동 지역과 고구려 중심지역에서 보이는 산성 중심이 아니라 비교적 규모가 큰 평지성이 위주이고 또한 유적에서 주로 출토되는 북옥저 계통의 판자 모양의 파수 등을 근거로, 연변 지역에서 보이는 고구려 문화의 지역성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또한 온특혁부성을 책성으로 비정하고, 연변 일대에 존재하는 장성은 고구려 시기에 읍루의 남침을 막기 위하여 축조한 것으로, 발해와 요금 시기에도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5) 

정영진은 이후 연구 대상을 연변 지역의 전체 성곽으로 확대하여, 고구려와 발해, 요금 시기의 성곽의 특징과 차이점 등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와 관련하여서는 기존의 내용을 재정리한 것이지만, 王禹浪과 王宏北이 편찬한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滙編』(1994)에서 고구려 성의 범위를 확대한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밝히고 있다. 6) 

최근 이성제는 그동안 연변 지역의 산성 답사를 통해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연변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고구려와 발해 성곽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논문에서는 교통로 분석과 역사적 정황 등을 근거로 연변 지역의 고구려 성을 보다 확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연변 지역에 다수 확인되고 있는 평지성은 요동이나 고구려 중심지역과는 달리 군사적 목적이 아닌 지역 지배의 중심지로서 역할이 요구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7) 고고학적으로 검증이 되지 않은 유적까지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취약점을 지니고 있지만, 실체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연변 지역의 고구려 및 발해 유적에 대해 기존과는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해 볼 만하다. 

이처럼 연변 지역의 고구려 유적은 현실적인 여러 제약으로 인해 유적 현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실정이다. 관련 유적과 유물에 대한 기초 자료가 매우 부족한 상황이기 때문에 정황상의 근거만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할 경우 자칫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가장 좋은 방안은 지금까지 보고된 고고자료를 최대한 확보하여 접근 가능한 범위 내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다음 장에서는 고구려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 유적을 중심으로 관련 내용을 검토해 보도록 한다.


 1) 강현숙, 2009, 「高句麗 故地의 渤海 古墳-中國 遼寧地方 石室墳을 中心으로」,  『韓國考古學報』 72, 韓國考古學會; 姜賢淑, 2010, 「中國 吉林城 集安 東台子遺蹟 再考」, 『韓國考古學報』 75, 韓國考古學會

2) 발해사연구소 소장 고구려·발해 유물에 대한 조사를 흔쾌히 허락해 준 정영진 선생님께 본 지면을 빌려 감사드린다.

3) 서울대학교 박물관에는 鳥山喜一과 藤田亮策이 당시 수집했던 유물 다수가 소장되어 있으며, 이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을 참조하기 바란다. 滿洲國民生部 編, 1942, 『間島省古迹調査報告』, 滿洲國古蹟古物調査報告 第三編; 양시은, 2010, 「일제강점기 고구려 발해 유적조사와 그 의미: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高句麗渤海硏究』 38, 高句麗渤海學會
 
 
4) 齋藤優, 1978, 『半拉城と他の史蹟』, 半拉城史刊行會
 
5) 鄭永振, 1990, 「연변지구의 고구려유적 및 몇 개 문제에 대한 탐구」, 『韓國上古史
學報』 4, 韓國上古史學會
 
6) 鄭永振, 1999, 「延邊地域의 城郭에 대한 연구」, 『高句麗山城硏究』(『高句麗硏究』8), 학연문화사
 
7) 李成制, 2009, 「高句麗와 渤海의 城郭 운용방식에 대한 기초적 검토-延邊地域분 포의 성곽에 대한 이해를 겸하여」, 『高句麗渤海硏究』 34, 高句麗渤海學會 


Ⅲ. 연변 지역의 주요 고구려 유적
 
2_ 溫特赫部城  http://tadream.tistory.com/12614
3_ 石頭河子城  http://tadream.tistory.com/12684
4_ 城子山山城  http://tadream.tistory.com/12707
5_ 河龍古城  http://tadream.tistory.com/12744
6_ 興安古城  http://tadream.tistory.com/12746
7_ 台岩古城  http://tadream.tistory.com/12747
8_ 土城村古城(또는 土城屯古城)  http://tadream.tistory.com/12749
9_ 東興古城과 주변 유적  http://tadream.tistory.com/12751,  http://tadream.tistory.com/12785
10_ 仲坪古城  http://tadream.tistory.com/12752


11_ 기타 유적  

이상 앞에서 언급한 유적 외에도 연변 지역에서 고구려 유물이 출토되는 중요 유적으로는 화룡현의 龍淵遺蹟과 용정시의 龍曲遺蹟 등이 있는데, 주로 승문과 승석문, 사격자문 등의 고구려 기와가 채집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용곡유적에서는 발해 시기의 기와도 상당량 출토되었다고 한다. 19)

<그림 18> 용연유적 출토 고구려 기와『(和龍縣文物志』)20)
 
 19) 鄭永振, 1990, 앞의 논문, 301쪽
 20) 연화문와당의 경우 실물을 접하지 못해 그 소속을 명확히 하기가 어렵다. 趙越은 해당 유형을 훈춘 팔련성에서 출토된 것과 함께 발해의 특수연화문와당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趙越, 2007, 『渤海瓦當硏究』, 吉林大學 碩士學位論文 
 

Ⅳ. 연변 지역 고구려 유적의 검토  http://tadream.tistory.com/12782
        운두산성, 조동산성


Ⅴ. 맺음말

이상으로 연변 지역 고구려 유적의 현황과 이와 관련한 문제들을 검토해 보았다. 앞서 연변 지역 고구려 유적과 유물의 연구를 위한 기초 고고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임을 강조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기존에 보고된 자료 외에도 연변대학 발해사연구소와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유물을 검토하여 관련 자료를 추가로 보고하였다. 연변 지역의 고구려 연구에 기초 자료를 보강할 수 있었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으나 아쉽게도 당초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연변 지역 고구려 연구와 관련하여 큰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연변 지역이 고구려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현재 연변 지역의 고구려에 대한 연구는 시작단계에 머물러 있다. 고고학적인 조사와 연구가 수반되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고구려에서 발해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한 고고학적인 연구는 매우 초보적인 수준이다. 이번 연구에서는 1930년대 후반 일본인 연구자들이 채집한 연변 지역의 고구려와 발해 유물을 검토하고, 이를 집안이나 평양, 그리고 길림 등지에서 출토된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고구려 유물 및 서고성이나 상경성과 같은 발해 도성에서 출토된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발해 유물과 비교 검토하였다.

서울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된 유물은 기와가 상당량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평기와가 가장 많다. 그렇지만 기존 연구는 대부분 고구려나 발해의 와당과 관련한 것이었기 때문에, 실제 기와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평기와와 관련한 연구 성과는 접할 수 없었다. 분명 발해 중기 이후의 평기와는 고구려의 것과는 문양이나 색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었으나 발해 초기의 자료들이 명확하지 않아 이를 구분하는 초보적인 작업도 쉽지 않았다. 일부 지두문 기와의 경우에는 집안 고구려 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서고성이나 상경성에서 출토된 것들이 크게 다르지 않은 예도 있어, 연변 지역에서 고구려와 발해 유물이 섞여 있는 유적의 출토 유물은 그 시기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두문 기와는 보통 회색조에 무문양이 많은데, 연변 지역의 일부 지두문 기와는 등면에 승문이 타날된 예, 내면 포목흔이 지워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예, 적갈색 색조를 띠고 있는 예 등 과도기적인 특징을 보이는 경우도 확인되었다. 

이러한 확인은 추후의 연구를 위한 기초적인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새로운 정보다. 이 밖에도 이번 연구에서는 연변 지역에서 고구려 와당이 발견된 사례가 매우 드물고, 그 수량도 매우 적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었다. 보고된 와당 또한 전형적인 고구려 양식이라기보다는 변형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와당의 제작 시기와도 관련되는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후 자료의 증가를 기대해 본다. 한편, 연변 지역에서 확인되는 고구려 유적은 대부분 성곽으로, 무덤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적석총 계통의 묘제가 보고된 바 있지만, 전형적인 고구려 적석총과는 거리가 있고 부장된 토기 또한 발해 시기로 볼 수 있어 본고에서는 해당 묘제를 발해 시기로 판단하였다. 연변 지역이 책성이 소재한 고구려의 중요한 지역 중 하나임에는 분명하므로, 이후 연변 지역의 고구려 묘제를 밝히는 것 역시 중요한 과제로 남는다.

연변 지역의 성곽은 산성이 아닌 평지성 중심의 분포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 역시 다른 지역들과는 다른 점이다. 도성 지역을 제외한다면, 규모도 다른 지역에 비해 상당히 큰 편이었다. 본고에서는 연변 지역의 평지성의 분포 양상은 고구려의 지배 방식 내지는 전략과 맞물려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연변 지역의 고구려 성곽에 대한 고고학 발굴조사가 실시된 예가 없으므로,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닌다. 연변 지역의 고구려 평지성이 더 이상 훼손되기 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앞서 언급한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서를 확보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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