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4/10/23/0200000000AKR20141023128700005.HTML
용 신발 신고 저승 세계로 날아간 백제인
<그래픽> 백제 금동식리 출토 위치
(서울=연합뉴스) 장예진 기자 = 23일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현재까지 발견된 백제 금동신발 중에서는 가장 완벽한 형태를 자랑하는 유물이 전남 나주 복암리 고분군과 인접한 정촌 고분에서 발굴됐다. jin34@yna.co.kr 페이스북 tuney.kr/LeYN1 트위터 @yonhap_graphics
나주 정촌고분 발굴 금동신발은 "백제 공예문화의 진수"
(나주=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용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은 숨이 멎는 듯했습니다."
이상준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장은 23일 나주 정촌고분을 발굴하다가 금동신발이 출현하던 순간의 흥분을 이렇게 말했다.
백제시대 금동신발은 무령왕릉을 필두로 공주 수촌리 유적, 고흥 길두리 안동고분, 고창 봉덕리 1호분을 포함해 13곳에서 17점에 이르는 제법 많은 수량이 출토됐음에도 이 소장이 놀란 까닭은 종래 알려진 금동신발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금동신발은 보존상태가 가장 완벽했다. 현재 박물관 같은 데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전시 중인 금동신발은 자세히 보면 그 대부분이 적지 않은 곳이 떨어져 나갔다. 불완전품인 셈이다.
금동신발
그에 견주어 정촌고분 출토품도 손상이 비록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어느 것보다 원형을 가장 잘 간직한 유물로 평가된다.
더불어 그렇기 때문에 종래 백제 금동신발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면모를 많이 보여준다.
특히 놀라운 점은 버선으로 치면 코에 해당하는 부분에 비상하는 듯한 모습의 용 장식을 표현한 대목이다. 두 짝 중 한 짝은 용 머리 부분이 떨어져 나갔지만, 온전히 남은 다른 한 짝으로 미루어 이 신발 세트가 원래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코 부분 이런 장식은 백제는 물론이고 동시대 고구려나 신라 금동신발에서도 보이지 않던 대목이다.
나아가 신발 바닥은 더욱 두드러진 점이 있었다. 한복판에는 연꽃 문양임이 분명한 장식을 하고, 다른 쪽에는 우락부락한 인상의 도깨비 비슷한 문양을 장식했다. 이것이 용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데는 전문가들의 이견이 없었다.
따라서 이 금동신발은 전체를 보면 마치 살아 꿈틀대는 용이 밑에서 받치고, 앞에서 끄는 듯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용선(龍船)인 셈이다. 그러니 이런 신발을 신었을 사람을 상상하면 도대체 백제인들이 죽은 사람에게 왜 이런 신발을 착장케 했는지도 짐작할 수도 있다.
백제 금속공예 전문 고고학도인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이번 발굴을 통해 금동신발의 장송의례(葬送儀禮)적 성격을 분명히 드러났다"면서 "사이즈도 크고 장식 또한 지나치게 화려하며 실생활에서도 신을 수 없을 정도로 약하기 때문에 장례의식이라는 특수한 용도로 제작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금동신발
이 교수는 특히 백제인들이 죽은 자의 영혼을 사후 세계로 인도하는 일종의 배로 이 금동신발을 무덤에 넣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당시 사람들이 죽음을 단순히 생명의 종말로 보지 않았으며, 또 다른 영원한 삶이 열리는 신선의 세계로 인도하는 승선(昇仙) 도구로 이 금동신발을 무덤에 넣었을 것이라는 게 이 교수의 분석이다.
이 금동신발에서는 연꽃이 보여 불교의 전통이 가미된 흔적도 분명히 엿볼 수 있다. 그렇지만 금동이라는 재료로 제작하고, 용이 사람을 이끌어 신선 세계로 끌고 간다는 발상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도교 사상이 농후하게 엿보인다. 실제 이 정촌고분에서는 도교에서는 장기간 복용하면 몸이 가벼워져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영원한 사람을 얻게 해준다는 영약 중의 영약인 운모(雲母)라는 약물도 함께 출토됐다.
이 교수는 나아가 이 금동신발이 백제 금속공예문화의 수준을 재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강조했다.
백제사회에서 유행한 용 문양은 중국에서 수입한 도안이지만, 용이 정면으로 바라보는 모습으로 묘사하거나 투조(뚫음무늬)를 통해 묘사하는 등에서 백제적인 응용이 현저하게 엿보여 백제 장인의 창의성이나 백제문화의 저력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번 발견을 계기로 무령왕릉 동탁은잔과 장식대도 등 백제 웅진 시대 공예품이라든가 부여 능산리사지 향로 등 사비기 공예품처럼 수준 높은 작품이 중국에서 제작됐다는 주장은 이제 설 땅이 없어졌다.
금동신발
정촌고분은 봉분 하나에 무덤 여러 기를 만든 이른바 '벌집형 고분'에 속한다. 금동신발이 확인된 곳은 모두 9기에 이르는 매장주체 시설 중에서도 남쪽을 향하는 중심부를 차지하는 1호 돌방(石室)무덤에서 다종다양한 유물과 함께 출토됐다. 이들 유물로 보아 1호 돌방무덤은 한성백제 말기인 5세기 중·후반에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정촌고분 인근 반남리 고분군 발굴 주역 중 한 명인 김낙중 전북대 교수 또한 1호 돌방무덤 축조시기를 이렇게 보았다.
그런 까닭에 정촌고분 금동신발은 한성기와 웅진기 백제 금속공예문화의 연속성을 확인케 해주는 유물로 평가된다.
흔히 백제문화사는 수도 한성이 고구려에 함몰되고 웅진시대가 열린 475년을 경계로 단절되는 경향으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정촌고분 발굴성과는 그런 기존 견해가 틀렸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백제 금동신발 중에서는 공주 수촌리 유적 출토품이 가장 이른 시기 유물로 꼽힌다. 정촌고분 금동신발은 고창 봉덕리고분 출토품과 여러모로 통하면서도 그것을 새롭게 발전시킨 형태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런 금동신발은 누구에 의해 만들어져 나주에 묻히게 되었을까?
정촌고분
최근 호남지역 고대사를 백제에서 분리해 마한으로 설정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 특히 고고학적 증거가 충분한 것은 아니다. 한성백제 말기 무렵 정촌고분 1호 돌방에 묻혔을 사람이 이 지역에서 상당한 세력을 갖춘 것이 분명한 이상, 그리고 금동신발이 중앙 아니면 제작하기 힘든 최고급 사치품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백제 중앙 권력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지방 권력자임은 분명하다.
다만, 최근 활발한 고고학적 발굴성과로 볼 때 영산강 유역 일대에는 백제의 영향이 짙기는 하지만 신라, 가야, 심지어 왜의 영향도 느낄 만한 대목이 적지 않아 이 지역 고대사회가 상당히 복잡하게 구성됐음을 짐작게 한다.
한편 백제만큼이나 화려한 금동신발 문화를 자랑한 신라권 유물 중 유독 신라 전통과는 단절된 모습을 보이는 경주 식리총 출토 금동신발은 이번 발굴을 통해 백제산일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이한상 교수는 "식리총 신발이 주조품이라는 점에서는 백제 식리(장례용 신발)와 다소 차이가 있지만 도안이나 조립방식 등에서 정촌고분 신발과 고창 봉덕리 신발은 매우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taesh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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