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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

시호 : 무왕(武王) / 무광왕(武廣王)
성 : 부여(扶餘)
휘 : 장(璋)
생몰년도 : 음력 580년 ~ 641년 3월 (61세)
재위기간 : 음력 600년 5월 ~ 641년 3월 (약 42년)
 

1. 개요

백제의 30대 왕/건길지.

서동 설화의 영향으로 흔히 서동으로 알려져 있지만, 엄밀히 말해 그건 아명이며, 최근 서동이 무왕이 아니었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본(古本. 옛 기록)에는 무강(武康)이라 하였으나 잘못된 것이다. 백제에는 무강이 없다.】"라고 해 무강왕이 무왕과 동일인물이라는 이야기도 있다.[1]

42년간 즉위하여 혜왕-법왕 때의 불안한 정국을 수습하여 백제의 안정기를 구축하였다는 평이 있지만 이와 반대로 무리한 토목공사와 정복 전쟁으로 백제의 국력을 소모시켰다는 악평도 존재한다.

출신이 불확실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법왕의 아들이라고 하나 문제가 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고, 위덕왕의 아들이라는 가설이 있는데 이거 역시 확실치 않다. 대체로 익산의 지방귀족 출신일 것이라는 시각이 있지만 이 역시도 확실하지 않다.[2] 여러 가지로 보아 신분은 어쨌든 혜왕 때까지만 해도 그의 처지가 중앙귀족과는 거리가 멀었을 거라는 건 분명한 듯.

무왕은 641년 음력 3월에 사망하였다. 사후 당태종이 광록대부를 추증하였다. 무왕의 능은 익산군 팔봉면 신왕리에 있는 쌍릉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나, 이 역시 서동 설화와 관련된 논란거리이다. 고려시대 이미 도굴된 바 있는 쌍릉은 1916년에 조사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사비시대의 능산리고분의 묘제와 일치되고 있음이 밝혀졌다.
 

2. 출신 성분 

1) 위덕왕 아들설 또는 위덕왕 서자설

일각에서는 《삼국사기》의 주장과는 다른 위덕왕 아들설이 존재하였다. 또 《삼국유사》에도 법왕의 아들이라는 설 외에 금강의 과부가 검은 용과 통정해서 무왕을 얻었다는 설과 무왕이 궁밖에서 자랐음을 암시하는 대목이 있었다.

이는 중국 남북조시대 북조쪽의 사서인 《북사》에 근거한다. 그러나 위덕왕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한때 위덕왕의 아들 아좌태자가 무왕의 아버지로 추정되기도 했으나 아좌태자는 일본으로 건너가 귀국하지 않았다고 한다.

2) 법왕 아들설

《삼국사기》의 주장을 따른다.

3) 진이왕 아들설

위덕왕 아들설과 법왕 아들설, 위덕왕 서자설 등이 있어서 오랫동안 이견이 분분했지만 1398년 일본인 오우치 요시히로가 조선 정종에게 자신의 조상이 부여명농의 셋째 아들 부여의조라는 것을 확인해달라고 오우치씨의 족보[3]를 보내면서 새로운 존재가 알려지게 된다.

《북사》를 제외한 중국측의 일부 사서[4]와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과 부여융의 후손인 부여문선의 비석에는 부여관(夫餘寬)의 아들 부여장이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진이왕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3. 서동 설화와의 관계

그와 관련된 걸로 서동 설화와 서동요가 유명하지만, 서동요에 나오는 서동이 정말 무왕인지는 불분명하다. 덧붙여서 서동요의 일반적인 해석에 따르면 그의 아내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이나 이 역시 불분명한 상태.


4. 업적

무왕 3년 관륵(觀勒)을 일본에 파견하여 천문, 지리, 역법(曆法) 등에 대한 서적과 불교를 전달하였다. 630년 사비 왕궁을 수리하였으나 가뭄으로 인해 중지하였다. 634년 궁남지를 건설하였으며,[5] 미륵사를 건설하는 등 토목공사를 자주 벌이고 신라와의 전쟁이 잦아 국력을 소모하는 등 치세에 흠을 남기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탁월한 정치역량을 바탕으로 한 외교력으로 국가의 위상을 높였고 군사력을 크게 신장시킨 치적을 남긴다.

결론적으로 동성왕과 함께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의 전성기 이후로 무너져가는 백제를 되살린 왕으로 평가받는다. 백제의 두번째 전성기를 연 왕.하지만 다음 대에서 나라가...

4.1. 토목공사

이로 인해 외부적으로 백제가 안정되자 무왕은 내부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강력한 왕권의 존엄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대규모 토목공사를 단행했다. 630년 사비궁(泗沘宮)을 중수하였으나 가뭄으로 중지하였고 634년 왕궁의 남쪽에 인공호수와 그 안에 인공섬이 조영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궁남지이다. 궁남지가 통일신라의 안압지 모델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사찰인 629년에 익산의 미륵사를 완공하였다. 미륵사가 왕흥사라는 기록도 있으나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6]

4.2. 전쟁

재위기간 중 신라와 자주 전쟁을 벌였다. 600년 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신라와 자주 충돌하였다. 재위기간 중 신라의 아막산성(阿莫山城), 가잠성(椵岑城), 모산성(母山城), 늑노현(勒弩縣), 주제성과 신라 북서쪽의 두 성과 서곡성(西谷城) ·독산성(獨山城) 등을 공격하였다.

또한 무왕은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여러번 고구려 공격을 청하였다.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한 뒤에도 친선 정책을 전개하였다. 624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당 고조(高祖)로부터 대방군왕 백제왕(帶方郡王百濟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627년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 침공을 시도하였으나, 당 태종이 니들 고마해라백제와 신라의 화친을 권유했으므로 이를 중지하였다.

신라 서쪽 변방에 대한 집요한 공격은 562년 가야 멸망 이후 처음으로 백제의 낙동강 진출로 이어져 신라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한층 가중시켰다.[7] 혜왕-법왕으로 이어지는 불안한 정국을 수습하고 관산성 패전 이후 계속 패전만 했던 것과 달리 신라와 전쟁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쇠락해가던 백제가 안정감과 함께 자신감을 찾아갖고 이에 기존의 소극적인 자세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국제문제에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무왕의 업적으로 인해 백제는 다시 중흥기를 맞게 된다. 당시 동아시아의 패자였던 고구려와 수나라가 재충돌 할 때 무왕은 위덕왕과는 달리 사태를 관망하면서 어부지리를 취하려고도 했다.[8]

4.3. 익산 천도계획

正觀十三年 百濟武廣王遷都枳慕密地
639년(무왕 40년)에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9]로 천도했다. - 《관세음응험기》
 
今益山武王置別都於址
익산은 무왕의 별도였다.

(익산은) 본래 백제의 금마지(金馬只)인데 무강왕(武康王) 때 성을 쌓고는 별도(別都)를 두어 금마저(金馬渚)라고 불렀다 - 《대동지지》, 김정호
 
재위 후반기에 무왕은 익산 지역을 중시하여 이곳으로 천도할 계획까지 세웠다. 실제로 그는 왕궁 평성을 축조하였고 제석사를 창건하기도 하였다.[10] 다만 그 이후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11] 한 가지 확실한건 익산 지역이 제2의 수도 역할을 했다는 것. 익산 왕궁리 유적은 완벽한 도성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실제로 궁성의 기능을 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왜 익산으로 천도하려 했는지는 의문이긴 하지만 고대왕조가 지배세력의 교체 차원에서 천도를 단행하던 전례에 비춰보면 무왕이 기존의 사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자신의 출신지이자 본거지에 해당되는 익산으로의 천도를 추진했던 것 같다. 무왕과 왕비가 익산에 묻힌것을 보면 무왕의 익산 천도에 대한 의지는 확고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의자왕대에 익산 천도를 포기한 듯한 느낌을 주는데 의자왕의 등극과정에서 사비세력과 타협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일각에선 무왕의 익산천도가 백제의 지배층 분열의 뿌리가 되어 백제 패망의 요인이 된 것이 아니냐고 보기도 한다.

재위 말기에 사치스러운 연회와 토목공사가 빈번한 것도 이와 연관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대규모 행사를 계속 진행함으로서 왕권을 과시하고 지배 계층 인사들을 권위로 내리 누르려는 의도였다는 것.
 

5. 미디어에서

5.1. 서동요

SBS 사극 서동요에서는 주인공 롤이며 조현재가 연기했다. 드라마를 이끌어나가는 주인공으로, 이병훈 PD 사극의 주인공답게 온갖 역경을 강인하고 지혜롭게 이겨내고 왕이 된다. 위덕왕의 아들 설을 따라 위덕왕의 서자이자 아좌태자의 이복동생으로 나온다. 다른 역사적 가설에서는 아버지로 추측되기도 하는 법왕이 이 드라마에서는 위덕왕과 아좌태자를 위협하는 악역이자 서동의 적으로 나온다. 결국 법왕의 손에 위덕왕과 아좌태자가 암살당하지만 서동은 와신상담 끝에 법왕을 물리치고 백제의 왕이 되어 백제를 부흥시킨다.

이 사극에서 선화공주[12]는 설화대로 실제 신라의 공주(진평왕의 셋째딸, 선덕여왕과 천명공주(김춘추의 어머니)의 동생)로 나온다. 서동이 어린 시절 법왕이 일으킨 정변 때문에 신라에 피신해 있을 때 선화공주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는 설정. 서동이 속해있는 백제의 기술집단 태학사가 정변으로 신라에 망명한 뒤 백제인이라는 것을 숨기고 신라 궁궐에 납품을 해, 백제인에다 평민인 서동이 신라 궁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 선화공주는 서동이 평민인데다[13] 백제인이라는 것을 알고도 서동과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서동과 백제로 건너간다. 그 뒤 서동이 온갖 역경 끝에 백제 왕이 되자 왕으로서 신라의 공주인 선화공주에게 정식 청혼해 백제 왕후가 된다.

그런데 친정아버지인 진평왕이 선화공주가 백제 왕후가 된 뒤에도 계속 백제에 전쟁을 걸어(...) 백제 신료들이 선화공주를 폐비시키자, 사형시키자고 아우성치는 상황이 벌어진다. 결국 사극 서동요는 선화공주가 친정아버지 때문에 마음고생만 실컷 하다 병이 들어 일찍 죽어버리는 안습한 결말을 맺게 되었다. 신라 공주라는 설정과 무왕 재위 기간 중 신라와 자주 전쟁을 벌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둘 다 살리려다 나온 전개인데, 정말 신라의 공주가 무왕의 왕후였다면 정말 이런 이유로 일찍 사망했을 수도 있긴 하겠다.

5.2. 계백

드라마 계백에서도 초반부에 선화공주가 등장, 사택비를 필두로 한 반신라파에게 간첩으로 몰리면서 계백의 아버지와 더불어 신라로 달아나다시피 출궁된다. 그러다가 추격하는 위제단(사택비 휘하 자객단)에게 따라잡히고 종국에는 아들 의자를 살리기 위해 자결. 이런 전개는 무왕 대 세워진 미륵사지 석탑을 2009년에 해체하다가 그 밑에서 발견된 사택비의 내용 중 사택왕후라고 쓰여있는 것을 바탕으로 창작된 것이다. 훨씬 일찍 제작된 드라마 서동요의 혜안을 엿볼 수 있는 대목. 그리고 선화공주는 앞으로도 편히 눈감긴 글렀다.

위 부분에서 단적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여기서의 부여장은 실제 역사와 전혀 다르게 나약한 군주 포지션으로서 지못미라는 한 마디로 모든 설명이 가능하다(쓰는 의미로도, 당하는 의미로도). 신라에 미실이 있다면, 백제에는 사택비가 있다

5.3. 대왕의 꿈

KBS 대하드라마 대왕의 꿈에서는 배우 박철호가 연기하는데 신라에 대해 파상공세를 펼쳤던 역사 속 무왕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재위 내내 신라를 호시탐탐 노릴 만큼 호전적이며 현명한 아들 의자를 매우 신임하고 있다. 위 작품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실제에 가까운 호방한 군주라 할 수 있다.

단순히 호전적인 것 뿐만 아니라 처세술과 지모 역시 뛰어나서, 아들 의자조차 생각하지 못한 계략을 간파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신임하는 장수에게는 막대한 병권을 선뜻 쥐어주는 쿨가이스러운 모습 역시 보여준다.

결국 숙업인 신라 정복의 뜻을 이루지는 못한 채, 아들 의자왕에게 자신의 과업을 물려주고 눈을 감는다.

6. 삼국사기 기록 

一年夏五月 무왕이 즉위하다
三年秋八月 신라의 아막산성을 공격하다
六年春二月 각산성을 쌓다
六年秋八月 신라가 동쪽 변경을 공격하다
七年春三月 서울에 흙비가 내리다
七年夏四月 가물어 기근이 들다
八年春三月 수에 한솔 연문진을 사절로 파견하다
八年夏五月 고구려가 송산성과 석두성을 공격하다
九年春三月 수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九年春三月 수 사절이 왜국으로 가면서 백제의 남쪽 길을 통과하다
十二年春二月 수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十二年春二月 수에 국지모를 보내 고구려 공격을 논의하다
十二年秋八月 적암성을 쌓다
十二年冬十月 신라의 가잠성을 함락하다
十三年 수가 고구려를 공격하자 양단책을 펼치다
十三年夏四月 대궐 남문에 벼락이 치다
十三年夏五月 홍수가 일어나 인가가 유실되다
十七年冬十月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하다
十七年冬十一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十九年 신라가 가잠성을 공격하다
二十四年冬十月 당에 사절을 보내 과하마를 보내다
二十四年 신라의 늑로현을 공격하다
二十四年春一月 당에 대신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四年秋七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五年冬十月 신라의 속함성 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二十六年冬十一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七年 당에 사신을 보내 명광개 등을 선사하다
二十七年秋八月 신라의 왕재성을 공격하다
二十七年冬十二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八年秋七月 신라 서부 변경의 두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二十八年秋八月 당에 복신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九年春二月 신라의 가잠성을 공격하다
三十年秋九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三十一年春二月 사비의 궁전을 중수하다
三十一年 가뭄이 들어 궁전 중수를 중단하다
三十一年秋七月 왕이 웅진에서 돌아오다
三十二年秋九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三十三年春一月 의자를 태자로 책봉하다
三十三年春二月 마천성을 개축하다
三十三年秋七月 신라를 공격하다
三十三年 왕이 생초원에서 사냥하다
三十三年冬十二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三十四年秋八月 신라의 서곡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三十五年春二月 왕흥사를 준공하다
三十五年春三月 대궐 남쪽에 연못을 파다
三十七年春二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三十七年春三月 사비하 북쪽 포구에서 연회를 열다
三十七年夏五月 장군 우소가 신라의 독산성을 공격하다
三十七年夏六月 가뭄이 발생하다
三十七年秋八月 망해루에서 잔치를 벌이다

무려 50줄. 백제 역사상 온조왕 다음으로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왕이다.


주석

[1] 마한의 왕으로 알려진 무강왕과 시호가 같은 것으로 보아 마한의 무강왕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참고로 마한의 무강왕은 고조선의 왕 준왕이라는 설도 존재.
[2] 그래서 일부학자들은 무왕을 위덕왕의 자제가 아닌 왕위계승과는 거리가 먼 익산출신의 방계왕족이라는 주장도 제기한다.
[3] 오우치 씨의 후손은 오우치(大內) 씨와 오우치씨 종손 가문의 방계인 도요타(豊田) 씨가 현재 존재한다.
[4] 《후주서(後周書)》와 《풍속통(風俗通)》과 《만성통보(萬姓統譜)》, 《성보(姓譜)》 등
[5] 왕흥사와 같이 언급되지만, 현재 발굴된 부여 왕흥사는 위덕왕 대에 건축된 것이다. 이 왕흥사가 건립되었다는 언급이 위덕왕, 법왕, 무왕의 3명의 왕 항목에서 언급되고 있으나, 익산 등지에 동명이찰의 왕흥사가 건립된 것이 아니라면 왕흥사의 건립자는 위덕왕이다.
[6] 위덕왕대에 세워진 것으로 밝혀진 부여 왕흥사와 동명이찰이 익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 무왕 대에 지어진 왕흥사는 미륵사를 언급한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 백제왕의 원찰을 왕흥사라고 표현했을 수도 있다.
[7] 이는 의자왕의 대야성 공격으로 이어지게 되며, 결국 신라가 당과 더 긴밀해지는 단초를 제공했다.
[8] 위덕왕은 노골적으로 한쪽 편을 들다 되려 위기에 빠졌다
[9] 왕궁리 인근의 옛이름이 지마마지인데, 이것의 오기이다.
[10] 다만 제석사는 창건 후 10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벼락을 맞고 완전히 불타버렸다.
[11] 애초에 《삼국사기》에는 분명히 축조된 익산 왕성에 대한 기록이 없다.
[12] 이보영이 연기했다. 아역은 f(X)의 설리. 설리는 원래 아역배우 출신으로 f(X) 활동을 하기 전에 출연한 것이다.
[13] 이때는 서동도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라 자신이 평민인 줄 알았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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