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bp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7626
3. 한강 유역을 지켜내기 위한 ‘최후의 방어선’, 부평
[기획연재] 내고장 부평의 어제와 오늘 ③
한만송 기자 | mansong2@hanmail.net 승인 2006.05.03 17:36:27
편집자 주> 본지는 ‘부평의 어제와 오늘을 찾아’라는 기획 기사를 통해, 부평 지역의 과거와 발전과정을 조명하고 향후 부평지역의 발전 방향을 그려보고자 한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 선문대학교 고고학연구소 관계자들이 계양산성 2차 발굴 시 발견한 산성터를 보고 논의하는 장면.
경인여대 방향에서 계양산을 오르다 보면, 한 고비를 넘어 정상이 멀찌감치 올려다 보이는 고갯마루에 자그마한 정자가 세워져 있다. 산을 오르던 사람들이 잠시 땀을 식히며 시원스레 펼쳐진 부평분지의 경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명당자리다. 시선이 먼 곳으로만 옮겨지는 까닭에 정자에서 남쪽으로 한 발자국만 옮겨 놓으면, 발밑으로 5m나 되는 높이의 성벽이 쌓아 올려져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질듯이 위태롭게 보이는 이 성벽은 삼국시대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계양산성의 일부다.
계양산성은 머리띠를 두르듯이 산봉우리 중턱을 빙돌아 쌓는 방식의 테뫼식 산성인데, 지금은 거의 훼손되어 대부분의 성벽은 무너져 있는 상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계양산고성은 석축인데, 둘레는 1,937척이다. 지금은 모두 퇴락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계양산성이 산성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계양산성이 언제 축조되었는지를 알려주는 문헌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가 명나라 군사와 싸워 산성을 점령한 후 부평지역을 유린하였다거나, 조선시대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의 감독 하에 성을 여러 번 수축하여 이성(李城)이라 불려졌다는 구전만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지난해 여름 계양산성 일대를 발굴하던 선문대학교 고고학연구소팀은 산성의 동문 부근을 파내려 가던 중 깜짝 놀랄만한 ‘물건’을 발견했다. 석축 윗부분에서 수집한 기와조각에 ‘주부토(主夫吐)’라는 한자가 적혀져 있었던 것이다.
‘주부토’란 문헌상 부평지역을 지칭하는 최초의 행정구역상 명칭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부평도호부는 본래 고구려의 주부토군’이라고 밝히고 있어 부평지역을 공식적으로 일컫던 명칭이 ‘주부토’라는 지명으로 시작되었던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데, 지금까지는 이를 증명할 만한 어떠한 물증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통일신라 이후 불려지던 ‘장제(長堤)’라는 말로부터 역 추적해, ‘줄보뚝’이라는 토착어가 ‘주부토’라는 말로 음차 되었다는 언어학적인 추측만이 간혹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계양산성에서 발견된 기와 조각이 지명의 변천 이유를 속 시원히 설명해 주기는 어렵겠지만, 그나마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갖게 된다.
계양산성 안에서는 이밖에도 물을 모이도록 만든 집수정(集水井) 바닥에서 《논어》의 글귀를 적어놓은 목간이 발견되어 함께 출토된 토기 등과 함께 모두 한성백제시기의 유물들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발굴 유물이나 계양산성의 흔적으로 인해 부평지역이 고대 국가 단계에서 중요한 방어선 역할을 담당했던 지역이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해주고 있는데, 이는 대개 비류의 정착과 연관지어 설명되고 있다.
▲ 2005년 여름 선문대학교 고고학연구소가 계양산성 2차 발굴시 발견한 ‘집수정’.
인천은 오래전부터 고구려에서 남하한 비류가 정착해 나라를 세웠다는 비류전승이 전해져왔다. 비류가 온조와 함께 남하하여 온조는 한성에, 비류는 지금의 인천지역인 미추홀에 각각 나라를 세웠고, 척박한 땅에 나라를 세운 비류는 결국 죽음으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전승이다.
비류가 정착하였다는 문학산 주변에는 최근까지도 비류우물이니 미추왕릉이니 하는 전승물들이 전해져 와 전승의 사실성을 부각시키기도 하였다. 문학산에도 산성이 일부 남아 있어 온조가 비류계 세력을 흡수한 후 백제가 초기에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계양산성과 함께 한강을 방어하는 저항선의 역할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제세력이 부평지역을 확보하기 이전에도 작은 소국 형태의 정치집단들이 존재하였을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는데, 학자들은 그 가능성을 마한 54국 중에서 찾고 있다.
인천지역에 존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한의 소국들은 대개 소석색국, 대석색국, 우휴모탁국, 목지국 등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2002년에 간행된 ‘인천광역시사’에서는 목지국은 문학산을 중심으로 하는 문학동, 관교동 일대, 소석색국은 교동, 대석색국은 강화, 그리고 우휴모탁국은 부평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소국들로 설명하고 있다.
이들 소국형태의 세력들이 백제의 성장과 함께 백제의 권역 속으로 흡수되어갔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후 부평지역은 장수왕의 남하 정책으로 인해 고구려의 강역이 되어 주부토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가,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6년(757) 한화정책에 의해 전국의 지명을 한자식 지명으로 고치는 과정에서 ‘장제’라는 명칭으로 바뀌어지게 되었다. 각국이 명멸해 가는 고대 국가 단계에서 부평지역은 한강 유역을 지켜내기 위한 최후 방어선으로서 그 지리적 중요성을 부여받아왔던 것이다.
감수 : 김현석·부평사편찬위원회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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