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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성립과 발전 - 노중국" 중 "
2.백제사의 여러 쟁점 - 2)한성시기의 도성문제"을 가져왔습니다.

백제 한성시기의 도성 문제
 
          1. 백제사에 대한 이해  http://tadream.tistory.com/14408
          2. 백제사의 여러 쟁점

              1) 건국시기와 건국세력의 문제  http://tadream.tistory.com/14359
              2) 한성시기의 도성 문제  http://tadream.tistory.com/14360
              3) 정치세력의 문제  http://tadream.tistory.com/14361
              4) 중앙통치체제의 정비  http://tadream.tistory.com/14362
              5) 지방통치제도의 발전  http://tadream.tistory.com/14363
          3. 백제사 연구의 과제  http://tadream.tistory.com/14408 
 
 
한성시대 백제사의 주요한 테마 가운데 하나가 왕성을 포함한 도성의 문제이다. 백제 초기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진행되었던 역사적 공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백제 한성시대 도성과 관련하여『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건국당시의 도성, 온조왕 14년에 천도한 동성, 근초고왕 26년의 이도지, 개로왕대의 도성 등 다양한 기록이 있다. 이로 말미암아 연구자가 사료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변천과정과 위치에 대한 다가한 의견이 개진되고 있다.
 
『삼국유사』기이편 남부여 전 백제조를 보면 위례성(慰禮城), 한산(漢山), 북한산(北漢山)을 각각 지금의 직산(稷山), 광주(廣州), 양주(楊州)에 비정하였다. 이러한 위치비정은 그 후 『고려사』와『세종실록』지리지 및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안정복의『동서강목』에서도 위례성을 직산으로 비정하면서 하남위례성을 광주, 한성을 한양부에 비정했다. 그런데 조선후기 실학자인 정약용은 위례성을 직산에 비정하던 종래의 견해를 이의를 제기하면서 삼각산 동쪽 자락인 한양고읍에 비정하였다. 그러나 두 견해 모두 위례성→하남위례성→한성으로 백제의 도성이 변했다는 데는 뜻을 같이하고 있다.
 
차용걸은 하남위례성=한성이라는 이병도의 견해를 이었는데, 한산으로의 이도 사실을 인정해 위례성(중랑천 유역)→하남위례성(몽촌~이성산성 사이)→한성(남한산성)으로파악해 하남위례성과 한성을 달리 보았다. 최몽룡, 권오영도 하북위례성(중랑천일대)→하남위례성(몽촌토성)→한산(춘궁리 일대)→한성(이성산성)으로 비정하면서, 이기백, 정영호, 성주탁의 견해를 이어 하남위례성을 몽촌토성으로 봄으로써 이후 몽촌토성이 하남위례성지로 유력하게 되었다.
 
한성시대 도성에 대한 문제는 김기섭에 의해 더욱 세분화되었다. 그는 한성이란 북성(대성)을 추축으로 하여 왕성인 남성을 포함하는 명칭으로서 넓게는 두성을 포괄하는 지역의 범칭이며, 좁게는 북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았다. 우진천도를 단행한 이후에도 한성은 두가지 의미를 모두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화북위례성(성동구와 동대문구일대)→하남위례성(한성)으로 변화된 것으로 보면서 한성≥북성=대성=사성=거민성=현재 풍납토성과, 한성〉남성=하남위례성=왕성=현재 몽촌토성이라는 왕성과 거민성이 합쳐진 넓은 의미의 도성이라고 파악했다. 그 뒤 한산과 관련하여 한성은 풍납토성이며, 새로이 이도한 한산은 성새로서의 기능을 더욱 강화한 왕성인 몽촌토성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도학은 근초고왕 때의 ‘이도한산(移都漢山)’이라는 기록에 대해 한신을 지금의 북한산성으로 비정했으며, 이후에 다시 한성으로 재천도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강인구는 위례성과 하남위례성은 별개의 도성이 아니라 같은 하나의 도성이며, 하남위례성과 한성은 별개의 도성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위례성을 풍납리토성에, 한성을 몽촌토성에 비정하였다. 그리고 한산성은 산성이 아니라 현재의 뚝섬지구로 보았다. 결국 위례성(하남위례성)에서 한성으로 변화했다고 보면서, 위례성(하남위례성)=북한성=북성=풍납리토성, 한성=도성=남성=몽촌토성이라고 이해함으로써 하남위례성의 비정에 차이를 두고 있다.
 
박현숙은 하남위례성에서의 ‘하남(河南)’이란 한강의 남쪽이라는 뜻으로, 고유명사가 아니라 위례성의 상대적 개념으로 쓰인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근초고왕 26년의 ‘이도한산’이란 고구려왕을 살해함으로써 그에 대한 반격을 우려한 수도방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방어선인 산성으로 일시적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백제한성시대의 도성은 위례성(중랑천 일대)→한성(하남위례성, 풍납리토성과 몽촌토성)→한성+한산성(남한산성)으로 변화해 간 것으로 파악하였다.
 
여호규는 371년 무렵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한산에 축조한 군사 방어성을 한성으로 보았다. 이후 줄곧 왕성으로 사용되다가 「광개토왕릉비문」에 기록된 것 같이 196년 고구려 광개토왕의 백제 도성공략에 항복하면서 평상시의 왕성이었던 북성, 즉 풍납토성으로 환도하였고, 몽촌토성은 비상시의 군사적 방어성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박순발은 한성기 백제 도성의 변화를 하북위례성→하남위례성(한성)→한산→한성으로 정리하고, 백제의 왕도였던 한성=하남위례성에는 대성=북성과 왕성=남성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북성은 풍납리토성, 남성은 몽촌토성이라는 견해에 동의하면서, 풍납토성만이 하남위례성이고, 왕성이라는 주장은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또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모두 3세기 중,후반경 이후에 축성되었는데, 몽촌토성이 더 이른 시기에 등장하였고, 이어서 국가의 성장과 함께 풍납리토성이 축조되었을 것으로 이해하였다.
 
반면에 신희권은 풍납리토성을 기원전후에 초축된 것으로 파악하여 『삼국사기』초기기록의 신뢰성을 확인하였으며, 한성시대에서 하남위례성으로 풍납토성이 차지하는 역사적 비중을 강조하였다. 풍납리토성의 축조시기와 성격을 둘러싼, 고고학계의 논쟁은 한성시대 도성문제에 대한 간극을 쉽게 좁히지 못하고 있다.
 
이와같은 많은 연구자들이 백제 한성시대의 도성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한서에는 두 개의 성이 있었는데, 그것은 대성(=북성)과 왕성(=남성)이며, 북성은 풍납토성, 남성은 몽촌토성이라는 데까지는 논의가 좁혀진 듯하다.

그러나 출발점은 위례성, 하남위례성, 한성, 한산의 위치비정과 관계에 대해서는 더욱 논의가 필요하다. 또한 위례성과 하남위례성이 같은 도성인지, 다른 도성인지, 하남위례성과 한성을 동일시할 것인지 달리 볼 것인지, 풍납리토성과 몽촌토성의 선후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지, 근초고왕 26년의 한산천도 사실을 인정할 것인지 등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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