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차 출전
주요현황
전투명 | 일시 | 장소 | 전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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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포해전 | 1594. 9. 29 ~ 10. 7 |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 적선 2척 격침 |
전투개요
당항포해전 후 4개월이 지난 7,8월경부터는 왜군의 움직임이 전보다 조직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장문포(長門浦) 일대를 중심으로 연안에는 각 포구마다 집을 짓는 등 장기간 머무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이순신은 수륙협공으로 왜적을 쳐부술 태세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8월 초순부터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과 여러 차례에 거쳐 공문으로 출전을 위한 대책을 상의했다. 또 직접 만나는 등 분주한 나날을 보내던 중, 9월 22일에는 권율장군으로부터 “27일 군사를 일으킨다”는 내용의 연락을 받았다. 이때부터 이순신은 더욱 적극적인 임진태세를 취하여 24일에는 해전시 각도 지휘관들의 표식을 위한 호의(號衣)를 지급했다. 이에 따라 전라좌도는 푸른 옷 9벌, 전라우도는 붉은 옷 10벌, 경상도는 검은 옷 4벌 등이었다. 이 색깔 있는 옷으로 부대를 식별할 수 있다. 푸른색은 좌군(左軍), 붉은 색은 전군(前軍), 검은 색은 후군(後軍)을 나타낸다.
드디어 26일에는 유명한 곽재우(郭再祐)와 김덕령(金德齡) 등이 권율의 지시에 따라 견내량에 이르자, 이순신도 27일 한산도를 출항하여 적도(赤島) 앞바다에 이르러 이들 육군 장수들은 각 전선(戰船)에 승선하게 했다. 말하자면 이제 이순신이 원하던 수륙 협공작전을 실천 단계에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이어 28일에는 흉도 앞바다에 이르러 일단 휴식하고 29일 일제히 장문포 앞바다로 돌입하였다. 이때 왜군들은 험준한 곳에 웅거하여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누각을 높이 짓고 있었으며, 양쪽 봉우리에는 벽루(壁壘)를 쌓고 있으면서 조금도 항전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적이 싸우려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순신은 선봉선 2척만을 공격하기는 하였으나, 이것 역시 배탄 사람들이 육지로 도주하였던 까닭에 빈 배만 부수고 나서 다시 칠천량을 기점으로 하여 장문포 등지의 왜군을 격멸하려고 여러 날 동안 세밀히 정찰을 하였다.
또 직접 전선을 거느리고 공격하기도 하였지만, 역시 적선은 응전할 기색이 보이지 않아 10월 4일에는 본격적인 수륙 협공 작전을 계획하였다. 이것은 1593년에 있었던 웅포 해전에서 부렸던 전술과 거의 같은 것이었다.
곽재우·김덕령 등의 육군들은 왜군들이 겁을 내어 동서로 달아나면서 칼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서는 공격을 계속하지 않고 배로 내려오고 말았다.
이리하여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자, 이순신은 지상군의 무능을 통탄하면서 칠천량으로 회군하였다.
그러나 6일에는 다시 선봉선으로 하여금 장문포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때 왜군들은 “일본은 지금 명나라와 화친을 의논하는 중이니, 서로 싸울 수 없다.”는 패를 꽂아 둔 채 도주하고 없었다.
이에 이순신은 군사들로 하여금 왜군의 소굴에 상륙하게 한다는 것은 위험하고, 또 곽재우·김덕령이 거느린 지상군도 사실상 대병력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여, 7일에는 일단 수륙군을 해체하고 8일 한산도로 돌아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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