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pUCHm1 (문서파일)
"해동성국 발해 : 제2부 발해의 문화 - 김동우" 중 "2. 발해인의 생활"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2. 발해인의 생활
넓은 영토에 살고 있었던 발해인들은 여러 자연환경 속에서 지역마다 다른 생활을 영위하였다. 대개 발해 중부는 대평원지대이고 북부와 동부에는 산악지대로 울창한 삼림이 분포하고 서북쪽으로는 사막지대로 매우 건조하다. 그리고 이 지역은 대륙성 기후 때문에 추운 겨울이 1년의 절반에 가까웠지만 여름에는 덥고 비가 많아 농작물을 경작할 수 있었다.
비록 발해 지역은 논농사에 적합한 지역은 아니었으나 노성(盧城)에서 벼가 생산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벼가 생산이 되었더라도 주식은 잡곡이었을 것이다. 발해 건국 전의 물길과 말갈은 조 보리 메기장 등을 경작하였고 연해주의 발해 성터에서는 콩메밀 보리 수수가 발견되었다. 특히 콩을 이용해서 만든 된장은 발해의 특산물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옛 부여지역의 사슴 막힐부(鄚頡府)의 돼지 미타호(湄沱湖 현 길림성 경박호)의 붕어 환도(丸都)의 오얏 낙랑(樂浪)의 배 등이 유명하였다 이밖에 삼림지대에서는 야생 동물의 사냥이 이루어졌다. 러시아 연해주의 발해 유적에서 나온 뼈를 분석하면 발해인들이 말 소 돼지 뿐만 아니라 수렵을 통해 잡은 각종 동물들도 잡아먹었음을 알 수 있으며 동해안에서는 다시마를 비롯한 게 문어 고래 등도 식품으로 이용하였다.
발해에서 생산된 옷감으로는 현주(顯州)의 삼베와 옥주(沃州)의 솜 용주(龍州)의 명주가 있었다 이밖에 짐승 가죽으로는 당과 일본으로 수출된 담비와 호랑이 가죽이 있었다. 특히 담비 가죽 옷은 일본 귀족들 사이에 유행하였다. 920년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배구 가 담비 가죽 옷을 입었는데 이를 보고 일본의 중명친왕(重明親王)이 검은 담비 가죽 옷 8벌을 껴입고 조회에 참석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발해인들의 생활은 그들이 남긴 토기와 무기 도자기 금속세공품 등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발해의 토기는 표면색이 흑색이나 회색을 띠는 고구려계와 갈색이나 적색을 띠는 말갈계의 두 계통으로 뚜렷하게 구분되며 단지 접시, 바리, 자배기, 보시기, 시루 병, 세발 달린 그릇 등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토기 표면에는 중(中), 신(信), 지(知) 양견(禳見), 장(章) 등의 글자를 새기거나 찍기도 하였다.
또한 발해에서는 당나라의 삼채(三彩) 기법을 받아들여 이른바 발해삼채라는 도자기가 유행하였다. 노란색, 갈색, 녹색, 자색 등의 유약을 사용하여 그 화려함을 더했는데 화룡 북대고분군 7호 무덤에서 거의 완벽한 형태의 삼채병과 삼채 사발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상경성에서 백자 사발과 발해 단지가 발견되었는데 이러한 발해 자기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금속세공품에는 쇠나 구리 또는 은이나 금으로 만든 것이 많다 쇠는 중경 관할의 철주에 속하였던 위성현이 철의 생산지로 유명하였고 구리는 당나라에 수출을 하기도 하였다 특히 하남둔에서 발견된 금 세공품은 금 알갱이를 촘촘하게 붙인 누금 수법이 뛰어나다.
발해인들은 말타기와 활쏘기 격구(擊毬)등을 즐겼다. 격구는 지금의 폴로 경기와 비슷한 것으로 타구(打毬)라고도 불렀다. 말을 타고 막대로 공을 서로 치며 겨루던 경기로 본래 유목민족들이 즐겨하던 놀이였다. 발해 후기에 거란인 야율할저는 발해인들이 격구를 즐기는 틈을 타서 말을 훔치기도 했었으며 발해를 멸망시킨 후 거란은 발해 유민이 즐기는 격구를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특히 822년 정월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왕문구(王文矩)가 일왕에게 이를 시연하자 일왕과 신하가 그의 묘기를 찬탄하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발해인들은 답추(踏鎚)라는 춤도 즐겼다고 한다. 송나라 왕증(王曾)이 기록한 것에 “발해 풍속에는 세시歲時 때마다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며 논다. 먼저 노래와 춤을 잘하는 사람들을 여러 명 앞에 내세우고 그 뒤를 남녀가 따르면서 서로 화답하여 노래를 부르며 빙빙 돌고 구르고 하는데 이를 답추라 한다”는 글이 있다. 또 세시 풍속으로 음력 5월 5일에 발해인들은 쑥떡을 해 먹었으며 조선시대 실학자 유득공은 단오절에 쑥떡을 해 먹는 풍습이 발해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발해에서는 약탈혼의 풍속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금金나라 세종이 1177년 발해인들의 약탈혼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 유습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고 할 것이다. 여기서 약탈혼은 서로 미리 약속해 놓고 결혼할 여인을 빼앗아 가는 것인지 실제로 여자를 강제로 빼앗아서 아내로 삼은 것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전자의 가능성이 더욱 크다고 생각된다. 남송(南宋)시대에 쓰여진 송막기문(松漠紀聞)에는 “부인들이 모두 사납고 투기가 심하다. 대大씨는 다른 성씨와 서로 연결을 맺어 10자매(十姉妹)를 이루었는데, 이들이 번갈아 가며, 다른 여자와 연애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만약 이런 일이 있으면 부인은 반드시 남편과 사귄 여자를 죽이려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때문에 주변의 나라에서는 일반 사람들이 첩과 몸종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발해에서는 없었고, 또한 창녀도 없었다고 한다. 문왕의 둘째 딸 정혜공주와 넷째 딸 정효공주의 묘지명에 ‘한 수레에 탄 부부로서 친밀하게 지냈고, 영원한 지조를 지켰다’라고 전하는데, 1부1처제가 상류층에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인 풍습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발해 > 사회,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발해의 교통로(5도)와 신라도 - 우리역사넷 (0) | 2019.12.20 |
---|---|
발해의 주민은 누구였을까? - 법률저널 (0) | 2014.12.09 |
[윤명철 교수의 고구려 이야기]<12>바다를 제패한 아시아의 바이킹, 발해인들 - 동아 (0) | 2014.06.29 |
고구려·발해 융성의 원천은 ‘다종족 통합’ - 경향 (0) | 2014.06.25 |
동해를 건너 간 발해의 교역품은 어떤 것일까? - 구난희 (0) | 2014.0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