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23461
떡볶이로 유명한 신당동, 원래는 '무녀촌'이었다
[2013 전국투어- 수도권⑪] 이성계의 쿠데타, 신당동의 역사를 새로 쓰다
13.11.21 21:28 l 최종 업데이트 13.11.21 21:30 l 김종성(qqqkim2000)
<오마이뉴스>가 다시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기존 지역투어를 발전시킨 '2013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전국투어'가 4월부터 시작됐습니다. 올해 전국투어에서는 '재야의 고수'와 함께 지역 기획기사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시민-상근기자의 공동 작품은 물론이고, 각 지역에서 오랫동안 삶의 문제를 고민한 시민단체 활동가와 전문가들의 기사도 선보입니다. 11월 <오마이뉴스> 전국투어가 찾아간 지역은 수도권입니다. [편집자말]
▲ 지하철 신당역. ⓒ 김종성
"요동을 정벌하라!" 고려 우왕과 최영의 명령을 받고 5만 대군을 지휘하게 된 이성계는 압록강까지 올라갔다가 군대를 되돌려 수도 개경으로 진격했다.
이성계의 쿠데타는 인간 세상에서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세워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럼, 이 쿠데타가 '신들의 세상'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성계의 쿠데타와 왕조 창업은 민간신앙에 영향을 미쳤고, 서울 신당동을 무녀촌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는 '신당동' 하면 떡볶이 타운을 떠올리지만,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신당동' 하면 무녀촌을 떠올렸다.
만약 이성계가 쿠데타와 왕조 창업을 성사시키지 못했다면, 별다른 사유가 없는 한 신당동의 무녀촌 이미지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많은 땅 중에서 하필이면 신당동이 무녀촌이 된 것은 바로 이성계 때문이었다.
떡볶이로 유명한 '신당동', 원래는 무녀촌 이었다
오늘날 '신당동'에 해당하는 한자는 새로운 신(新)자와 집 당(堂)자와 마을 동(洞)자로 구성된 '新堂洞'이다. 말 그대로 하면 '새로 세워진 집들이 있는 동네'란 뜻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신도시 개념이다.
하지만, 1894년 갑오경장(동학전쟁 당시 일본군에 의한 강제적 사회 개편) 이전까지만 해도 신당동에 해당하는 한자는 귀신 신(神)자가 들어간 '神堂洞'이었다. 무녀들의 신당이 많다고 해서 그렇게 불렸던 것이다.
오늘날 서울에서는 동서남북 어디로든지 운구차가 빠져나갈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지정된 성문을 통해서만 시신이 한양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한양에서 그런 성문으로 지정된 곳은 광희문(서소문)과 소의문(남소문)이었다. 이 중에서도 광희문이 이런 기능의 중심이었다. 광희문은 '시체를 내가는 문'이라는 뜻인 시구문(屍口門)으로도 불렸을 정도다.
시구문이 되다 보니, 광희문은 산 사람과 더불어 죽은 사람이 통과하는 문이 되었다.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가 교차하는 공간이 된 것이다. 이것은 이 지역을 무녀촌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때문에 '神堂'이란 지명이 생긴 것이다.
남산 기슭의 약수골에서 시작해서 신당동을 지나 청계천에 합류하는 개천이 과거에는 무당 개울 혹은 무당천으로 불리고 무당 개울 곳곳에 놓인 다리가 무당 다리 혹은 무당교로 불렸던 것도 신당동에 무녀촌이 있었기 때문이다.
1920년 이전만 해도 신당동에는 묘지가 많았고, 일제 강점기에는 화장터가 있었다. 그래서 말 그대로 이곳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신당동 근처인 왕십리에 액막이굿(재앙 방지 굿)을 하는 아기씨당이란 신당이 많았던 것도 신당동의 주술적 기능이 주변 지역으로 파급된 결과였다.
▲ 광희문. ⓒ 김종성
정확히 언제부터 '神堂'(신당)이란 지명이 생겼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광희문이 시구문으로 지정되고 이곳에 무녀촌이 생기고 나서 한참 뒤에 이런 지명이 생겼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순조(정조 임금의 아들) 때인 1808년에 왕명으로 편찬된 <만기요람>에 따르면, 지금의 신당동은 영조 때인 1751년의 행정구역 개편 당시 한양부 남부 두모방 소속이었다.
그때는 신당동이라 하지 않고 신당리계라고 불렀다. 따라서 필자가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근거로 한다면, 조선왕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1394년에서 영조시대의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던 1751년 사이의 어느 시점에 신당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신당동은 한성 안에서 볼 때 광희문 바깥에 있는 동네였다. 도성 바깥에 있는 동네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성부가 아닌 경기도에 편입되는 게 논리적이다. 그럼에도 이곳은 한성부 남부 두모방 신당리계였다. 이렇게 된 것은 조선왕조가 한성 사대문 내부뿐만 아니라 사대문 바깥 10리 이내의 지역도 한성부에서 관할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신당동, 무녀촌 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신당동이 무녀촌이 된 것과 관련이 깊은 또 하나의 현상이 있었다. 그것은 신당동이 서민 의료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는 점이다.
무녀는 단순히 무속인 역할만 한 게 아니다. 이들은 의료인의 역할도 했다. 일반 서민들은 아플 때면 의원보다는 무녀를 더 많이 찾았다.
40년간 3천 명의 무녀와 인터뷰한 민속학자 겸 국어학자 서정범의 <한국 무속인 열전>에 따르면, 무녀들 중에는 일반인보다 훨씬 더 많은 태양 에너지를 체내에 보유한 이들이 많다고 한다. 태양 에너지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들에게 생명의 근원이 된다. 고대인들이 태양을 숭배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에너지를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이 보유한 일부 무녀들이 이것을 바탕으로 질병을 치료한다는 것이 고 서정범 교수의 추론이다.
일부 무녀들이 주관하는 기 치료의 본질은 바로 태양 에너지에 있다는 것이 서정범의 주장이다. 그들이 환자의 몸에 손을 대면 병이 치료되는 사례가 있는 것은, 초월적인 신의 작용이라기보다는 체내에 비정상적으로 많이 축적된 태양 에너지의 작용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녀를 비롯한 무속인들이 의료인 역할을 했다는 점은 의사를 가리키는 한자에서도 확인된다. 지금은 의사의 '의'를 '醫'라고 쓰지만, 고대에는 '毉'라고 썼다. 무당을 지칭하는 무(巫)를 이용해서 의(毉)라는 글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무속인이 주술적 방법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기 때문에 이런 글자가 나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책으로 의술을 공부한 일반 지식인들이 술 등의 약물을 이용해서 사람을 치료하게 되자, 이런 현상을 반영하여 새롭게 '醫'라는 글자가 나왔다. '醫'는 술 주(酒)에서 물 수(氵)를 뺀 유(酉)자를 이용해서 만든 글자다.
이성계, 개경에 있던 신(神)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 영화 <무녀도> 포스터. 경기도 남양주종합촬영소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예언적 능력에 더해 의료적 능력까지 겸비한 무녀들이 신당동 쪽에 모이다 보니, 이곳은 자연히 서민 의료의 중심으로도 부각되었다.
조선시대에 서민 병원인 활인서(대비원·활인원)가 이곳에 세워진 것도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중종 12년 9월 18일자 즉 1517년 10월 3일자 <중종실록>에는 무녀들이 활인서에 배치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무녀들이 많이 모인 곳이라면 사람들이 신당동을 가벼이 여기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조선시대를 유학자들만의 사회로 인식하는 선입견이 낳은 편견이다.
조선시대에 무녀의 지위가 이전보다 현저히 떨어지긴 했지만, 이들은 여전히 예언적 능력과 의료적 능력을 바탕으로 일반 서민들에 대한 장악력을 확보했다. 그렇기 때문에 신당동이 일반인들에 의해 가벼이 여김을 당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무녀들이 대단한 존경을 받았던 것은 물론 아니다.
신당동 무녀촌의 위상이 결정적으로 흔들린 것은 구한말의 개화기 때였다. 서구 문명이 확산되면서 무녀들에 대한 시선이 차가워졌고, 이 때문에 '神堂'이란 동네 명칭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로 인해 1894년 갑오경장 때 이곳은 '神堂洞'에서 '新堂洞'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신당동 무녀촌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서서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신당동이 '예언의 중심지', '의료의 중심지'가 된 것은 이곳에 시구문인 광희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시구문이 세워진 것은 조선왕조가 한양에 도읍을 두었기 때문이고, 도읍이 한양에 세워진 것은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군대를 '유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때문에 신당동이 무녀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성계가 군대를 끌고 개경으로 밀고 들어간 행위는 개경에 있던 우왕과 최영의 조정뿐만 아니라 개경에 있던 신(神)들의 세계에까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개경 시구문 앞에 있었을 신들이 이성계 때문에 신당동으로 '전입신고'를 하게 됐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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