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30015
명절마다 '사장님' 집에서 노동... 불쌍한 남자들
조선시대 남자 노비들의 명절증후군
14.09.08 11:30 l 최종 업데이트 14.09.08 11:30 l 김종성(qqqkim2000)
▲ 드라마 <추노>의 한 장면 ⓒ KBS
옛날에도 명절증후군이 있었을까? 물론 있었다. 옛날에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옛날에는 남자도 그것을 앓았다. 옛날 남자들은 특히 '직장'에서 그런 스트레스를 겪었다.
조선시대 남자의 일반적인 일터는 농토였다.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짓는 경우는 적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지주의 노비가 되어 그 땅을 경작하고 수확물의 일부를 공물로 바쳤다. 흔히 말하는 소작농의 대부분은 그런 노비들이었다.
조선시대의 경우, 노비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을 때는 30%, 보통일 때는 40~50%였다. 고려시대에는 이보다 훨씬 더 높았다. 이런 노비 인구의 대부분은 소작농이었다. 보통 40~50%인 노비 인구의 대부분이 소작농이었다는 사실은, 조선시대 남성의 상당수가 농업 노동자였음을 의미한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그들은 농업 샐러리맨들이었다.
일반적인 경우에 대한민국 남자 샐러리맨들은 적어도 명절 때만큼은 직장에서 해방된다. 그래서 그들은 직장과 관련해서만큼은 명절증후군을 잘 겪지 않는다. 이에 비해, 조선시대 남자 샐러리맨들은 직장과 관련해서도 명절증후군을 겪었다. 이들은 추석이나 설날 같은 명절은 물론이고 주인집의 행사 때도 그런 스트레스로 시달렸다.
명절 때마다 주인집에 '성의 표시'를 해야했던 노비
노비는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국가가 주인인 공노비(관노비)와 개인이 주인인 사노비로 구분됐다. 사노비는 주거가 어떠냐에 따라, 독립 주택이 있는 외거노비와 그렇지 않은 솔거노비로 세분됐다. 명절증후군을 겪는 쪽은 주로 사노비들이었다. 솔거노비는 물론이고 외거노비도 이 증후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주인집과 떨어져서 독립적으로 거주하는 외거노비도 명절증후군에 시달렸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노비는 외거노비였으므로, 이 글에서는 외거노비의 명절증후군만 살펴보자. 이들 외거노비들은 국가적인 명절이나 주인집의 제사 때마다 '성의 표시'를 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주인집에 가서 일도 거들어야 했다. 물론 모든 경우에 다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경우에 그랬다는 말이다.
사노비의 법적 의무는 주인에게 정기적으로 공물을 바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용주인 노비 주인은 우월적 지위를 악용해서 노비들을 명절이나 제사에 동원하거나 그들로부터 선물까지 챙겼다. 이렇게 법전에도 없는 각종 수탈에 시달렸기 때문에,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사노비의 의무는 공노비보다 중할 뿐만 아니라 …… 이 땅에서 사노비만큼 불쌍한 것도 없다"고 탄식했다.
물론 고용주들이 1년 내내 사노비를 착취한 것은 아니다. 조선 후기에 홍석모가 정리한 풍속집인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음력 2월 1일 노비일 즉 노비의 날에 고용주들은 각 노비에게 나이만큼의 송편을 제공했다. 지금 우리가 추석 때 먹는 송편을 2월 1일 '노동자의 날'에 노비들에게 지급한 것이다.
고용주들은 이런 식으로 노비들을 위한다고 했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것은 위로가 아니었다. 노비에게 줄 송편을 만드는 것은 결국 노비의 몫이었다. 노비(솔거 및 외거 포함) 숫자가 몇 백 명 혹은 몇 천 명이나 되는 가문에서 송편을 준비하자면, 그 집 노비들이 중노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문에서는 '노동자의 날'에도 노비들은 명절증후군을 겪었다.
▲ 장작을 달랑 몇 개만 짊어진 노비. 경기도 여주시 능현동의 명성황후 생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한국의 노비뿐만 아니라 서양 중세의 농노도 명절증후군을 앓았다. 노예 같지만 노예는 아니고 노비 같지만 노비는 아니었던 농노들은 성탄절 같은 명절에 양이나 닭을 주인에게 바칠 의무도 부담했다. 물론 모든 경우에 다 그랬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농노들은 명절 때마다 주인에게 뭔가를 바쳐야 했다.
이런 모습은 대한민국 노동자들이 명절만 되면 직장에서 선물 세트를 받아오는 풍경과 대조적이다. 한국의 노비나 서양의 농노들은 명절만 되면 고용주에게 뭔가를 바쳐야 했다. 그러니 이들이 겪는 명절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명절 때면 뭔가를 바쳐야 했을 뿐만 아니라 '사장님 댁'에 가서 일까지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모습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봉건적 착취'다. 이런 착취에 대항하여 노비들은 때로는 공물 납부를 거부하고 때로는 파업이나 태업을 하고 때로는 살주계를 조직해서 주인을 살해했다. 물론 이런 저항은 의식 있는 노비들의 몫이었다. 많은 수의 노비들은 현실을 그냥 받아들였다.
'귀여운 방법'으로 주인에게 저항한 한 노비
그런데 의식 있는 노비 중에서 '꽤 귀여운 방법'으로 봉건적 착취에 저항한 이가 있다. 서유영이 지은 실화집 혹은 민담집인 <금계필담>에 나오는 그 노비의 이름은 알 수 없다. 편의상 그를 '을'이라고 부르자.
을과 관련된 곳이 지금의 서울시에 남아 있다. 남대문구 회현동에 있는 유명한 은행나무가 바로 그것이다. 회현동 은행나무는 남대문으로부터 동쪽으로 직경 600m 정도 되는 곳에 있다.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다. 은행나무가 있는 이곳은 조선 중기의 유명한 정승인 정광필이 살았던 집터다.
정광필이 살았던 당시의 임금인 중종은 왕권강화를 목표로 조광조를 이용해서 구세력을 약화시키다가 어느 정도 목표가 성취되자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렸다. 이때 정광필은 조광조와 뜻을 함께하는 개혁파는 아니지만 조광조를 살리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해보았다.
조광조를 살리려 했다는 점만 놓고 보면, 정광필은 양심적인 보수파다. 하지만 그는 고용주로서는 썩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집에서는 명절이나 제사 때마다 외거노비들에게 번거로운 의무를 부과했다. 한양 밖에 사는 외거노비들에게 선물을 들고 방문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정승 집에 아무 선물이나 갖고 갈 수는 없었으니, 그 집 외거노비들은 선물 준비로 속병을 많이 앓았을 것이다.
갑에게 큰 충격 준 을의 행동이 가져온 결말
▲ 복원된 직후의 서울 숭례문(남대문). ⓒ 김종성
정광필이 죽은 뒤였다. 그날은 정광필의 제삿날이었다. 이때 을은 '앞으로는 더 이상 이런 일로 스트레스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아이디어 하나를 짜냈다.
제삿날이 되면, 밤 10시께 이전에 회현동의 주인집에 도착해야 했다. 남대문이 닫히는 밤 10시께가 지나면 성내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그는 집에서 잠을 푹 잔 뒤 새벽 4시께에 남대문을 통과해서 주인집에 도착했다. 그때는 이미 제사가 끝난 뒤였다.
제사가 끝난 뒤에 들어갔으니, 이 집 주인이자 정광필의 후손인 '갑'으로부터 질책을 당할 게 뻔했다. 이에 대비해서 그가 사전에 짜둔 작전이 있었다. 자기와 친한 노비에게 "제사상에 올라간 배 한 덩어리를 빼내달라"고 부탁해두었던 것이다.
을은 주인집 대문을 통과하기 전에 집밖에서 배를 건네받았다. 집안에 들어간 을은 자기가 지각한 이유를 설명했다. <금계필담>에 묘사된 상황을 토대로 그의 변명을 재구성하면 아래와 같다.
"제사에 늦지 않으려고 어젯밤에 출발했거든요. 그런데 남대문이 닫혀 있지 뭡니까. 그래서 새벽 4시까지 문 밖에 서 있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얼른 뛰어왔죠. 그런데 주인댁에 오는 도중에 희한한 일을 겪었네요. 돌아가신 대감님(정광필)을 뵌 겁니다. 근데 대감님이 저한테 이 배를 주시네요. 그걸 받아오다 보니 이렇게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노비의 변명과 함께 배를 본 갑은 깜짝 놀랐다. 좀전까지 제사상에 있었던 배가 을의 손에 있었기 때문이다. 갑은 어찌된 영문인지를 몰라 당황했다.
이 사건은 갑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 직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갑은 외거노비들의 의무를 덜어주었다. 외거노비들에게 "앞으로는 이런 일이 있을 때 집에 들어올 필요 없이 문밖에서 절만 하고 가라"고 명령한 것이다.
그 뒤로 그 집 외거노비들은 주인집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거들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을의 쇼 덕분에 그 집 외거노비들은 명절이나 제사 때마다 겪던 명절증후군을 조금은 덜게 되었다.
이런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조선시대 남자 노비들도 명절증후군을 겪었다. 합법적으로 혹은 사실상 허용된 봉건적 착취 때문에 그들은 국가적인 명절이나 주인집의 제사 때마다 선물을 준비하고 주인집 일까지 거들어야 했다. 을의 행동은 그런 봉건적 착취에 대한 귀여운 도전이었다.
을과 갑의 뒷이야기를 소개한다. 갑은 을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갑은 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이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래서 을이 제사에 참석하러 가다가 정광필의 혼령을 만나 배를 얻은 뒤 본가에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금계필담>에 실리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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